213화. 당신의 검과 방패2022.03.13.
다음날. 라틸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내내 기르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레안에 대한 일로 너무나 화가 나 넘어갔지만, 갑자기 나타난 공동 일도 만만치 않게 중요하긴 했으니까. 기르골이 쇼드 폴리 공동에서 훈련하자고 했지. 그 안에 괴물들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러니 훈련 장소로 정했겠지. 그는 훈련 재료라면서 식시귀를 데려온 전적이 있지 않던가. 확실하다. 라틸의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복잡한, 하지만 뒤엉키진 않은 생각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식사를 끝낼 즈음. 라틸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고, 식당에서 나가면서는 시종장을 불러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사블레 후작.”
“예, 폐하.”
“쇼드 폴리 공동 말입니다.”
“예.”
“생각해 보니, 다른 나라 일이라고 너무 방치한 거 같습니다. 혹시 일이 커지면 이쪽에도 피해잖아요, 대비할 새도 없이.”
“아. 그렇지요. 그럼 역시 먼저 도움을 제안하는 편이 좋을까요?”
“네. 그쪽 왕에게 서신을 보내서, 위험한 시기이니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해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돕고 싶으니 알리라고요.”
“네.”
시종장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나란히 걸어가다가 옆길로 새자, 라틸은 홀로 공개 집무실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라틸이 잉크가 반쯤 담긴 유리병 뚜껑을 열고 펜촉에 잉크를 묻히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이 기다렸단 듯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라틸의 책상 부근에서 줄을 섰고, 라틸은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그들의 보고를 귀로 듣고 중요한 건 체크하거나 받아 적었다.
“…….”
그런데 어느 비서 하나가 유독 이상하게 굴었다. 책상에 긴 그림자만 드리울 뿐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 라틸은 빈 종이에 펜촉을 툭툭 두드리다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업무 흐름을 끊은 눈치 없는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타시르?”
놀랍게도 그곳에 선 건 생글생글 웃는 타시르였다. 어이없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소리 내 이름을 부르자, 타시르는 넉살 좋게 말했다.
“아침이 되니 폐하를 뵙고 싶어 왔습니다.”
“아부는.”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듣기 나쁜 말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웃고 말았다. 라틸은 타시르가 저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던져대는, 남이 하면 느끼할 말도 신기할 정도로 가볍게 전하는 저 말투가 좋았다.
“보고드릴 일도 있고요.”
하지만 타시르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허리를 굽혀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올라간 입꼬리가 자동으로 내려왔다.
‘보고할 일? 흑림?’
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모두 앞에서 얘기할 내용은 아닌 눈치라, 라틸은 짧게 명령했다.
“잠시 휴식.”
말이 끝나자마자 비서들은 황제가 후궁과 둘만 있고 싶다고 여겨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람들이 다 나가자, 라틸은 타시르에게 빈 의자에 앉으라 손짓하고서 물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왔지? 흑림 관련한 일이야?”
“폐하. 혹시 서넛 경이 여행 떠난 걸 아십니까?”
“뭐?”
라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리다가, 난데없이 서넛 이름이 등장하자 당황했다.
“모르셨나 보네요.”
“서넛이…… 여행을 갔어? 어디로?”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채비를 해서 국경을 나갔단 보고가 끝이라서요.”
라틸은 허탈해졌다. 서넛이 여행을 가? 이 와중에? 평생 옆에서 지켜줄 것처럼 말해대더니. 서넛이 진실을 얘기해주는 것조차 싫어서 떠나버렸다는 게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전해드린 건가 보군요. 폐하의 특명을 받고 간 걸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요.”
그 모습을 본 타시르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알려준 게 좋아.”
내려놓은 펜을 만지작거리다가 라틸은 힘없이 덧붙였다.
“언제까지 휴가 가 있을지 궁금하던 차였거든. ……오래 못 오겠네.”
* * * 며칠 후. 쇼드 폴리에 도착한 서넛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얼굴을 다 가리는 품이 넉넉한 망토 차림으로, 갑자기 나타났단 공동 부근으로 가보았다.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니, 공동 주위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선 게 보였다. 그리고 근처의 막사.
‘수색대인가.’
연구차 와 있는 이들 같았다. 공동 주위로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줄이 처져 있고 병사들이 서 있었으니 확실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인원으로는 서넛을 막기 힘들었다. 서넛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틈에 바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뭘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외부와 달리 내부는 공기만으로도 녹록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음습하고 끈적했으며, 안쪽은 축축한 공기에 습기가 더해져, 옷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더 나쁜 건 이런 감각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진해진단 거였다. 그러다가 서넛은 초기 탐사대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시신 두 구도 발견했다. 살아 있다면 입구까지는 데려다줬겠지만, 이미 죽은 이들에게 자신이 뭘 해줄 순 없기에 서넛은 시신을 내버려 둔 채 더 안으로 들어갔다.
‘피인어들이 폐하 측에 붙도록 해야 한다.’
이동하는 내내 속으로 중얼거리는 건 단 하나였다. 칼라인이 말하길, 피인어들은 수중에서의 전투 능력도 대단하지만, 빛을 먹는 습성 덕에 수중이 아니어도 단체전에서 큰 도움이 된다 했다. 그러니 꼭 아군으로 만들어야 했다.
‘폐하가 각성하지 않고 이대로 평화롭게 지낸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각성하게 된다면 이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을 향해 활짝 웃으면서 툭 건네는 그 장난스러운 말. 다시 그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당신의 남자가 될 순 없어도 당신의 검과 방패가 될 수 있기를.
* * *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을 즈음. 라틸은 쇼드 폴리 왕이 보내온 서신을 읽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라틸은 의아한 얼굴의 시종장에게 서신을 건네주면서 인상을 구겼다.
“안 도와줘도 된답니다. 우리나라 사태가 제일 심각할 텐데, 괜히 자기들까지 신경 쓰지 말랍니다.”
시종장은 눈으로 서신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누군 뭐 이뻐서 돕겠다고 했나. 이쪽까지 피해 끼칠까 봐 돕겠다고 했지.”
라틸이 왜 저렇게 툴툴거리는지, 시종장은 바로 알아차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서신에서는 어딘가 라틸을 얕잡아보는 기색이 드러났다.
“즉위한 지 일 년도 안 된 어린 황제에게 도움을 받으려니 싫었나 봅니다.”
“아니, 내가 즉위한 지 일 년이 안 된 거지 우리나라가 만들어진 지 일 년이 안 된 건가?”
“그럼요.”
시종장이 편을 들어주자, 라틸은 할 말이 넘치는지 다시 입을 반쯤 열었다.
[수색대를 보내도 효과가 없다면 폐하께 도움을 청할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단 건, 쇼드 폴리 왕은 폐하를 못마땅하게 여긴단 건가?]
그러나 라틸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시종장의 입은 안 움직이는데 목소리가 들려와서. 라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 마주치자 시종장이 “폐하?” 하고 의아해 불렀다.
[혹시 쇼드 폴리가 틀라 황자와 손을 잡았던 나라인가? ……조사해봐야겠군.]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시종장의 속마음은 다 들려왔고, 라틸은 당황해서 물었다.
“사블레 후작. 혹시 지금 마음이 막 혼란스러워요?”
보통 남들이 감정적으로 격해지거나 흥분하면 마음의 목소리가 잘 들려오니까.
“예? 아닙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나 마음이 혼란스러운 건 시종장이 아니라 오히려 이쪽이었다. 시종장은 태연해 보였다.
‘근데 왜 갑자기?’
그러고 있자니 뒤에서 ‘폐하께서 왜 저러시지?’ 하는 부단장의 목소리, 아마도 속마음일 것이 들려왔고, 라틸은 집무실에서 황급히 나가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시종장이 영문도 모르고 쫓아오며 물었으나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라틸은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는 주방으로 다짜고짜 갔다.
[폐하다.]
[깜짝이야. 폐하께서 갑자기 오셔서 놀랐네.]
[무슨 일로 오신 거지?]
라틸을 보자 주방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속으로 탄식해댔다. 라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주방 문 앞으로 가 섰다.
[아 뜨거워.]
[아니 저 인간은 왜 자꾸 내 쪽으로 칼을 떨어뜨려?]
[언제까지 설거지만 시킬 건지. 요리는 언제 할 수 있는 거야?]
[주방장이 날 질투하는 거 같아.]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그러지 않아도 이미 소리는 다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리가.
“폐하?”
라틸은 멍하게 서 있다가 고개를 젓고 돌아섰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전조 증상 없이 또 확 상승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자 초조했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슨 계기가 있으면 이렇게 되는지, 아니면 자신이 로드라 변해가는 건지. * * * 그래도 이렇게 되어 그나마 도움 되는 게 있다면 알현을 처리하기 쉬워졌단 것이었다. 전에 능력이 갑자기 확 올라갔을 때. 라틸은 후궁들의 속내를 듣고 싶어 그들부터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케줄 때문에 그러지 못했는데, 알현실에서 이 능력을 사용하고 있자니, 확실히. 좀 편하긴 했다. 사람들이 겸양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보니, 그들의 소원을 헤아리거나 마음을 짚어 말해줄 수 있었고, 국민들은 라틸이 족집게처럼 자기들 마음을 짚을 때마다 눈가가 그렁해져 감동하였다.
‘갑자기 능력이 강해져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런 데라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
그러다 알현이 끝났을 즈음. 아직도 능력이 그대로 쌩쌩하자, 라틸은 나타난 이유는 몰라도 생긴 능력은 알차게 써야 한단 생각에 하렘에 가기로 했다.
“폐하, 저녁 식사는 뭐로 준비하라 할까요?”
“하렘에 갈 겁니다. 사블레 후작?”
“네.”
“거기 후궁들이랑 궁인들. 전부 다 모이라 해줘요.”
“네? 다 말입니까?”
“네.”
라틸은 웃고서 옥좌에서 일어섰다. 지난번에는 후궁들 전부의 속마음을 읽으려 했지만 실패했지. 지금도 후궁들 개개인의 속마음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보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 * * 후궁들과 궁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넓은 홀에 집합해서 기다리다가, 황제가 갑자기 단상에 나타나자 놀라서 의아해졌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전에 게스타가 돌 맞았을 때 일을 떠올렸다. 모아놓고 경고하던 일을. 사람들은 곧 불안해졌다. 설마. 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나? 백 명 중 구십 명 정도는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가 빠르게 점검했다. 라틸은 그런 생각들까지 훤히 다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본론을 꺼냈다.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
다들 조용해져서 순식간에 라틸의 입을 주목했다.
“몇 달 전에 대신관을 계단에서 민 사람. 누구지?”
라틸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온갖 생각이 들어왔다.
[그거 몇 달 전 일이잖아?]
[왜 지금 물어보시는 거지?]
[범인이 아직 안 잡혔나 보네.]
[혹시 폐하께서 따로 들은 정보가 있으신가?]
다들 황제가 몇 달 전 일을 뜬금없이 꺼내는 게 이상한 눈치들이었다. 본인인 대신관도 마찬가지. 그래도 라틸은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 사건이어서 당시엔 그냥 넘어가게 됐지만, 부적 파낸 사건도 있고 하니 이참에 확실하게 알아두고 싶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머릿속을 한 장면이 지나갔다. 계단을 구르는 대신관의 모습이. 그리고 그 장면을 떠올린 이는……. 라틸은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