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저게…… 아양인가.2022.03.06.
기르골이 손가락에 집중한 모습은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어서, 라틸은 얼른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나 손수건이 손가락을 감싸기 전. 기르골이 손을 뻗어 먼저 손수건을 잡았다. 라틸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기르골?”
왜 이러냐고 묻기 전. 그는 다른 손으로 라틸의 상처 난 손가락을 천천히 끌어당기더니, 흐르는 피에 혀를 대고 핥았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마치 맛을 보듯이. 라틸은 더욱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프진 않았으나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기르골은 핥은 피가 어떤 맛인지 음미하기라도 하듯 그 상태로 눈을 감고 몇 초를 있다가 천천히 다시 눈꺼풀을 올렸다. 길고 부드러운 하얀 속눈썹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가려졌다가 일출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치자 기르골은 우아하게 웃더니, 붙잡았던 손수건을 라틸의 다친 손가락에 세심하게 감아 주었다. 라틸은 그 행동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기르골도 뱀파이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적자 쪽이니 사람 피를 마시진 않을 거라 여겼는데. 완전히 착각이었던 걸까? 그 순간.
“안 놀라네, 아가씨.”
손수건을 모양 좋게 손가락에 묶어준 기르골이 손을 떼면서 중얼거렸다.
“어?”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내가 뱀파이어란 거. 알고 있었구나?”
“!”
뱀파이어들은 피를 보면 이성이 나갈 거란 편견이 있었는데. 아닌 걸까? 기르골은 눈앞에서 손가락 피를 핥아 먹었으면서, 이성이 멀쩡해 보였다. 제대로 사태까지 파악하고 있는 모습에, 라틸은 등골이 오싹해졌으나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놀랐어. 나름대로.”
“그 정도면 선방이지.”
“어렴풋하게 짐작은 했어. 대적자는 500년에 한 번 나타난다 했잖아. 근데 그쪽은 대적자‘들’을 가르쳤다며.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리 없으니까.”
“그렇다고 보통은 뱀파이어라 생각하지 않을 텐데.”
“나름 머리를 굴렸지. 똘똘하게.”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회수했으나, 기르골이 묶어준 손수건을 차마 손가락에서 떼진 못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대적자의 검 위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기르골이 허튼짓을 하려 들면 저 검을 뽑아서 기르골을 찔러야 하지 않을까?
‘거리가 멀어. 저기까지 한 번에 가는 데 몇 초쯤 되지?’
그러나 기르골은 더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태연히 몸을 일으키고서 라틸까지 일어나게 도와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게다가 먼저 이렇게 제안해주기까지 하자 라틸은 옳다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일부러 ‘대적자의 검’이 있는 벽을 통해 문가로 걸어갔다. 다행히 기르골은 쫓아오지 않았다. 소파에 그대로 앉아 버릴 뿐. 라틸이 문고리를 돌리면서 돌아보았을 때. 그는 라틸을 보고 있긴 했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더니 ‘절대로 안 따라갈게’라는 신호라도 보내듯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그 넉살 좋은 모습에 라틸은 긴장이 조금 풀려서, 주저하다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달아나는 길 아니었어?”
“!”
“물어봐, 아가씨.”
“……황제가 로드인 거. 확실해?”
기르골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제자님. 그냥 그런 말을 들었을 뿐인 거니까. 맞다 해도 당장 제자님이 황제를 죽이러 갈 수는 없어. 왜? 신경 쓰여?”
“어. 난 황제의 특사니까.”
“그렇지.”
그의 눈이 불안스레 가늘어졌으나, 라틸은 모른척하며 문고리를 돌린 다음 약간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는 잘 다듬은 새 나무의 향과 오래된 도자기의 향이 풍겨왔다. 금방이라도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상황에 안도하며 라틸은 다시 물었다.
“하나만 더 물어도 돼?”
“그래.”
“저기. 황제가 로드란 이야기를 했단 사람. 황제 오빠…… 누군데?”
“황제 오빠가 여러 명인가 봐?”
“응.”
“몇 번째 오빠인 줄은 모르겠고. 수도 별궁에 갇혀 있는 황자였어.”
기르골은 태연히 대답했으나 라틸은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허탈했다. 레안이구나. 그래도 이쪽은 동복오빠라고, 별궁에 가둬 놓고 그나마 잘 대접하고 있었는데. 그 인간이 진짜……. * * * 라틸은 너무 허탈해져서 궁전에 바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괜히 수도 여기저기만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미칠 것 같았다. 수시로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래?’란 생각이 들면서, 당장 별궁 앞으로 달려가 문에 계란을 던지고 싶었다. 그런데도 라틸이 꾹 참은 건 계란이 아깝기 때문이었다.
‘게스타 생각을 덜 하려고 나왔더니 이젠 오빠 때문에 미치겠네.’
그래도 안 돌아갈 수는 없기에, 라틸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쩔 수 없이 궁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자마자 라틸이 향한 곳은 집무실이 아니라 하렘이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몇 시간이고 밖에서 홀로 마음을 달랬겠지만, 전에 대신관과 대화한 후. 라틸은 조금 마음을 바꾼 상태였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며 혼자 풀 게 아니라, 후궁들과 어울리면서 풀어보는 쪽으로 습관을 바꿔 보자고.
‘누구에게 간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라틸이 정한 건 타시르의 방이었다. 타시르는 가볍고 실없는 말을 많이 하니, 이렇게 머리가 무거울 땐 함께 있기 좋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타시르의 방에 가 보니, 그곳에는 라나문이 함께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 어어. 그래.”
라틸은 타시르와 라나문의 인사를 받으면서 ‘라나문이 왜 여기 있지?’ 하고 생각했다.
‘전에 칼라인 방에 갔을 때도 라나문이 체스를 두고 있던 거 같은데. 타시르 방에서도…… 체스를 두고 있네.’
라나문이 체스판을 따라다니는 건가, 아니면 의외로 다른 후궁들과 잘 어울리는 건가. 라틸은 혼란스러워져서, 좀 언짢은 기색의 라나문을 힐긋거렸다.
“어젯밤 꿈이 좋더니. 폐하가 제게 오시려 그랬나 봅니다.”
그 사이. 타시르는 자연스럽게 라틸의 곁으로 와 팔짱까지 꼈다.
“무슨 꿈을 꿨는데?”
“가자미가…….”
라틸은 타시르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라나문의 눈치를 보다가, 튀어나온 가자미 이야기에 타시르가 잡지 않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타시르가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자, 라틸은 곧 민망해져서 손을 얼른 내렸다.
“더 두셔도 되는데요.”
타시르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웃었으나, 라틸은 괜히 라나문의 눈치가 보여서 얼른 소파로 가 앉았다. 그러면서 힐긋 보니 라나문은 놀라울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무서운 건 그런 얼굴로 라틸을 계속 쳐다보고 있단 거였고. 이 와중에도 타시르는 혼자 태연자약하게 체스판을 정리하기까지 하며 물었다.
“마침 이 경기가 끝나면 식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녁 식사, 하셨습니까? 같이 할까요?”
“아아. 그래. 나도 아직 안 먹었다.”
라틸은 재차 라나문의 눈치를 살폈다. 라나문은 의자로 걸어가 꼿꼿하게 앉았는데, 태연한 표정과 달리 의자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타시르를 찾아와서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저 자존심 덩어리.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가 기분을 풀었으면 싶어서 웃으면서 제안했다.
“라나문도 같이 먹자. 셋이 먹으면 더 좋지.”
타시르가 도움을 주지 않아 소용없었지만.
“아쉽습니다. 폐하가 오시기 5분 전에 라나문 님을 내보냈어야 하는데요.”
라나문은 씩 웃는 타시르를 기가 막힌단 눈으로 보았고, 라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식사하려 했단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타시르의 시종이 음식 수레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라틸은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렘 전담 주방이 저녁 식사용으로 만든 게 아니라 특별히 명령을 해서 요리한 음식인 듯, 수레에는 뚜껑을 씌워둔 커다란 접시가 하나뿐이었는데, 히얼란이 뚜껑을 벗기자 안쪽에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푸딩이 나타났다.
‘저녁? 이건 간식 같은데?’
라틸은 의아했으나, 타시르는 자연스럽게 큰 접시를 테이블 위로 직접 옮기고는 앞접시까지 세팅하며 라틸에게 권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폐하.”
라틸이 탁자 옆으로 다가가자, 생일 때처럼 자연스럽게 의자도 빼주었다.
“두 분이 식사하려 했는데. 제가 끼어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불쾌한 내색이긴 했으나 라나문 역시 라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히얼란은 얼른 수레를 끌고 다시 나갔다. 라틸은 타시르가 푸딩을 모양 좋게 잘라 자신의 앞접시에 놓아주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묘해졌다.
‘여기 오니 그리핀과 게스타에 대한 생각이 덜 나긴 하는데. 이 상황도 이 상황대로 편하진 않네.’
그래도 어찌어찌 식사를 시작했을 즈음. 라틸은 음식을 자르고 집는 타시르의 손동작이 영 이상하단 걸 알아차렸다. 용도에 따라 나이프와 포크를 바꾸어 가며 사용해야 하는데, 타시르는 큰 그릇에서 음식을 덜 때나 음식 더는 용도의 도구로 바꾸어 쥘 뿐. 그 외 자기가 식사를 할 때는 계속 같은 포크와 숟가락만 사용하고 있었다. 라틸이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자, 타시르는 주춤하더니 웃으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예법 같은 건 영 몰라서요.”
그 모습이 어쩐지 쑥스러워 보여서, 라틸은 얼른 대답했다.
“괜찮다. 이런 건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지키면 되지. 우리끼리 있을 땐 편하게 먹어라.”
그 말에 타시르는 스푼을 내려놓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제 예절이 보기 싫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폐하께서는 완벽하게 예법을 차리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실 것 같은데요.”
“남들 먹는 걸 계속 쳐다보진 않아.”
라틸은 타시르가 민망할까 봐 좋게 말한 다음 웃으면서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타시르는 라틸에게 한 번 지적을 당하고 나자 영 신경이 쓰이는지, 라틸의 옆으로 의자를 옮기고서 걱정스럽단 투로 말했다.
“그래도 좀 걱정이 됩니다. 귀족들 앞에서 실수했다가 혹시 흠이라도 잡히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폐하는 절 사랑하시니 그냥 넘어가 주실 테지만, 흠 잡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기에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타시르가 라틸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면서 아이스 타시르에 크림을 첨가한 것 같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니 폐하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제게 예법을 가르쳐 주시는 게 어떨까요?”
“나보다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뒤에서 제 얘길 하면 어떡합니까. 후궁이면서 예법도 몰라 이 나이에 배우고 있다고요.”
타시르가 아이스 타시르에 크림을 넣고 시럽까지 뿌린 목소리로 라틸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고 눈웃음을 짓자, 라틸은 끔뻑 넘어가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 * * 라나문은 그 일련의 과정을 어이가 없어 바라보다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라나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타시르와 몇 번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기에, 그가 얼마나 흠잡을 데 없이 귀족들의 식사 예절을 구사하는지 잘 알았다. 그뿐인가. 전에는 나라별로 조금씩 다른 궁중 예절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적도 있었다. 외국에 많이 나가봐서 잘 안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예절에 익숙하지 않은 척 굴더니, 자연스럽게 라틸과 함께 여러 번 식사할 기회를 만들어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 해서, 보고 있으면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황제는 저기에 또 그냥 넘어가 버린다. 예절을 모르겠다면 교육자를 하나 붙여 주면 될 것을. 마약상처럼 실실 웃으면서 손등에 키스 한 번 했다고 거기에 홀랑…….
-폐하가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다. 이런 걸!
그 순간. 라나문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주장이 떠올랐다. 황제는 귀여운 걸 좋아한단 주장. 라나문은 혼란에 빠졌다. 그가 보기에는 타시르가 한 행동이 조금도 귀엽지 않았으나, 중요한 건 황제의 안목이다. 황제의 눈엔 저게 귀여워 보였던 걸까.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다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목소리를 달콤하게 만들어내는 저런 것들이?
‘아양.’
라나문은 굳은 표정으로 타시르의 행동을 탐색했다.
‘저거다. 저게…… 아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