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피가 흐르는 손가락2022.03.02.
“다른 수라니?”
아트락시 공작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라나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한테 계속 오는 그 편지. 기억하십니까.”
“그 헛소리 해대는 편지 말이냐.”
“예.”
아트락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기적으로 오는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네가 얼마 전에 카르둔을 시켜서 그랬지. 편지 가져오는 심부름꾼이 오면 말을 전해 달라고. 그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러나 라나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와는 또 달랐다.
“아닙니다. 그때완 상황이 또 바뀌었거든요.”
아트락시 공작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바뀌다니?”
“편지 보내던 사람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아트락시 공작은 얼결에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앉으며 물었다.
“정말이냐?”
“본인 말로는 제가 대적자가 확실하다더군요.”
“아니…… 말세인가.”
공작은 순간 진심으로 내뱉다가 아들의 눈치를 보고서 마지못해 말을 돌렸다.
“영광이지.”
하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의 아들이긴 했으나 라나문은 솔직히 너무 게을렀고 나태했다. 그 나태한 면조차 라나문의 나른한 외모를 돋보이게 하긴 했으나, 거기에 자기 목숨을 의탁하고 싶진 않았다. 아트락시 공작은 괜히 무릎을 두어 번 주무르다가 웃으면서 물었다.
“안 할 거지?”
질문이지만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투였다. 라나문은 그 기색을 눈치채고서 쌀쌀맞게 대답했다.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게 생겼군요. 해볼까, 관심이 갑니다.”
“아니…… 왜?”
아트락시 공작이 대놓고 싫은 얼굴을 하자, 라나문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귀찮습니다.”
“그래, 귀찮으면 하지 마라. 세상 구한다고 나섰다가, 도중에 귀찮다고 그만두면 그건 진짜 민폐다.”
라나문은 조금 발끈했으나 더 입씨름하기 귀찮은지 그냥 본론을 말해버렸다.
“제가 대적자가 되면 국서가 될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하지.”
아트락시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상을 구겼다.
“아닐 수도 있고. 사람들이 네가 후궁을 관두길 바랄 수도 있다.”
“당연히 대적자가 된다면 그냥 하진 않을 겁니다.”
“그냥 하지 않을 거라니?”
“공개적으로 말할 겁니다. 황제를 위해 할 거라고. 황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설마…… 여론전을 벌이겠단 거냐?”
“황제를 구하기 위해 대적자가 되어 싸우는데, 그 사이 황제는 다른 남자를 국서로 맞아들인다?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겠지요.”
아트락시 공작은 ‘아니, 얘가 웬일로 머리를 이렇게 굴리지?’ 싶어서 괜히 아들 머리를 노크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랬다간 난리가 날 게 뻔하기에, 그는 머리를 노크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적자 일이 위험하지만 않다면 해볼 만하지. 귀족 여론이야 우리 측 귀족들을 움직이면 되는 거고. 국민들이야 네가 그 얘기를 하면 네 편을 들 테니. 문제는…….”
“말씀하세요.”
“네가 위험해지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게 제일 큰 문제지.”
아트락시 공작의 말에 벤 걱정에 라나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아직 고민 중입니다. 귀찮기도 하고.”
“아. 아직 귀찮은 상태로구나.”
“네. 먼저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 최후의 선택도 있으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아트락시 공작은 카르둔을 향해 눈으로 라나문을 가리키며 괜히 소곤거렸다.
“얘가 국서 꼭 되고 싶은가보다.”
라나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카르둔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러네요.”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카르둔도 속으로는 ‘과연 그것뿐일까요……?’ 하고 되묻고 있었다. * * * 로르드 재상이 다녀가도 별 소용이 없자 라틸은 긴급한 업무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내일로 미룬 다음 기르골의 그 미로 저택으로 찾아갔다. 사실 오늘은 약속한 날짜는 아니었으나 일단 가 본 것이었다. 전에 기르골에게 그리핀에 관해 물으려다가 묻지 못했는데. 이참에 물어보려고. 그런데 뜻밖에도 기르골은 없고 낯선 사람이 집 안에서 나왔다.
“누구세요?”
남자는 흙만 담긴 화분을 안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이 집에 사는 모양새라 라틸은 ‘혹시 기르골 집이 아니었나?’ 의심스러워졌다.
“그쪽은 누군데요?”
라틸은 딱딱하게 되물으면서 남자를 위아래로 보았다.
“여기 기르골 집 아니에요?”
그러면서 묻자, 남자는 “기르골 님 맞는……” 하고 대답하다가 “아.” 하고 탄식했다.
“사디 님이시구나? 기르골 님 제자.”
라틸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누구세요?”
누군데 날 알지? 라틸이 재차 묻자, 남자는 화분을 옆에 내려놓고 한 손을 내밀면서 씩 웃었다.
“전 기르골 님의 종, 자이오르라고 합니다.”
“아아. 네.”
라틸은 얼결에 그 손을 같이 쥐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알현하러 온 적이 있나? 아니면 연회 때 얼핏 봤나? 지나가던 사람? 의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남자가 다시 화분을 들어 안으며 아까보다 좀 더 친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기르골 님 찾아오셨어요?”
“네.”
“기르골 님은…….”
그 순간.
“제자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이 돌아보니, 기르골이 마침 정문에서 현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웬일이야? 바쁘다더니.”
그렇게 묻는 기르골이야말로 두 손에 종이봉투가 가득 들려 있어서, 퍽 바쁘게 지낸 눈치였다. 라틸은 대답하려다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를 빤히 보았다. 기르골의 모습이, 순간 도미스의 눈으로 보았던 그와 겹쳐지면서 반갑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해진 탓이었다. 도미스에게 힘이 되어 주었지만 결국 배신한 자니까.
“왜 그렇게 사연 있는 시선으로 쳐다봐, 아가씨?”
“지금 시간 돼?”
“데이트하자고?”
“수업하자고.”
“왜 갑자기 열정적인 학생이 됐데?”
“물어볼 것도 있고.”
“우리 제자님을 내가 제일 좋아해.”
“딴 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자이오르가 눈치만 보고 있자, 기르골은 라틸에게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하며 자이오르에게는 따로 지시를 했다.
“나는 커피. 우리 제자님은 꽃차.”
씩 웃은 기르골이 라틸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 제자님은 꽃 못 먹으니까.”
* * * 응접실 비슷한 곳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이오르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기르골의 시종이라더니, 용케 혼자서도 이 미로 저택 안을 잘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여기 기르골 님은 커피. 제자님은 꽃차입니다. 장미꽃으로 만든 차라 향이 좋을 거예요.”
자이오르가 센스 있게 웃고 나가자, 기르골은 애가 눈치가 좋다고 중얼거리며 차를 들라고 권했다.
“고마워.”
라틸은 인사를 하면서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문밖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지 한 번 확인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저기, 황궁에 말이야.“
”황궁?“
”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리핀이 나타났단 소문이 돌아.“
라틸이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기르골이 먼저 되물었다.
”그리핀? 아가씨도 봤어?“
대번에 알아듣는 눈치. 역시 얘한테 물어보길 잘했어, 생각하며 라틸은 거짓말했다.
”아니. 소문만 들었어.“
”하긴. 아가씨는 황제 특사니까 정보가 많이 들어오겠네.“
”어.“
라틸은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리핀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 그런데 기르골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죽 웃고 있었다.
”왜? 왜 갑자기 웃어?“
너무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온 미소라 라틸이 의아해 묻자, 그는 뜻밖에도 호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핀 귀엽지.“
그리핀이 귀엽다고? 물론 귀엽긴 했다. 아주 작고 사랑스럽게 생겼으니. 목소리는 굵었지만. 하지만 이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핀은 로드가 타고 다닌단 새 아니었나? 실제로 그렇게 작은 그리핀에 탑승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라도, 어쨌든 로드의 편이니 그런 소문이 난 걸 텐데. 대적자의 스승인 기르골이 저렇게 말하니 의아했다. 라틸이 멍하게 보자, 기르골은 그 표정을 멋대로 해석하고서 윙크하며 속삭였다.
“아. 아가씨는 못 봤다 했지. 실제로 보면 알 거야. 걔 진짜 귀여워.”
‘못 봐서 이러는 게 아닌데.’
“그리핀은 뭘 하는 새야?”
“음?”
“혹시 모르니까 알아두려고. 내가 듣기론 로드가 타고 다니는 새라 했거든. 그러면 혹시 만났을 때 내가 없애야 할 수도 있잖아.”
기르골은 커피를 한 모금 쭉 마신 다음 태연히 대답했다.
“그럴 것도 없어. 그냥 별거 아닌 새야. 춤 잘 추는 새.”
“춤. 춤?”
“응. 춤.”
기르골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그리핀을 귀엽지만 아주 하찮게 보는 눈치였다. 그리핀은 별거 아닌 괴물인가? 라틸이 덩달아 혹할 정도로.
“그보다 잘됐네, 나도 아가씨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할 말이라니?”
“아가씨, 일주일 정도 휴가 못 가?”
“휴가? 왜?”
“쇼드 폴리에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거든. 훈련하기 딱 좋은 거 같아서. 같이 갔다 오자.”
쇼드 폴리에 나타난 공동? 라틸은 며칠 전 자신에게 올라온 안건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건가? 대체 무슨 공동일까, 회의실에서 몇 시간이나 의논해도 직접 가 본 게 아니라 결론을 내지 못했는데. 괴물들과 관련이 있는 공동이었나?
‘하지만 일주일이라니.’
“안 돼.”
이런 시기에 황제가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최근에 이미 두어 번 다른 영지에 다녀오면서 자리를 비웠지 않던가. 또 일주일간 이동은 무리다.
“절대 안 돼.”
라틸이 재차 거절하자 기르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주일도 안 돼?”
“어. 난 폐하의 특사잖아.”
“황제가 융통성이 없나 봐?”
“있거든? 근데 난 특사라 안 돼.”
“특사한테 일주일 휴가도 못 주는 황제라면 융통성이 없는 거지.”
“!”
“고생하는구나, 제자님.”
어쩐지 기르골이 자기 욕을 하는 것 같아 발끈한 라틸이 얼굴을 두껍게 하고 자기 칭찬을 하려는 찰나. 기르골이 갑자기 커피잔을 내려놓더니 긴 다리를 꼬아 앉으면서 불렀다.
“제자님. 괜찮다면 나한테 황제 이야기 좀 들려줄래?”
라틸은 스스로를 칭찬하려다가 좀 불안해서 물었다.
“황제는 왜?”
“황제 오빠가 나한테 말해줬거든.”
황제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라틸은 더욱 불안해졌다. 기르골이 말하는 ‘황제 오빠’가 레안을 말하는 것이든 틀라를 말하는 것이든, 둘 다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 둘은 언제 기르골을 만난 거야?’
“뭐를?”
그래도 애써 태연하게 질문한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꽃차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차에서는 아직 장미 향이 났으나, 찻물이 애매하게 식어서 맛이 텁텁했다.
“황제가 로드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기르골의 대답을 듣는 순간. 라틸은 손가락에 힘이 쭉 빠져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자, 라틸은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른 허리를 굽혀 조각을 집었다.
“내가 치울게.”
하지만 급하게 움직이다 보니 조각에 손가락이 그이며 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으.”
라틸은 인상을 구기고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서 고개를 드니, 눈 깜짝할 사이 기르골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려는데. 기르골은 라틸의 안위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