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대세는 귀여움이란 말이다!2022.02.27.
도미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자, 기르골이 그녀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내가 아가씨 친구가 돼줄게. 안야보다 아가씨랑 더 친한 친구.”
도미스가 멍하게 쳐다보자, 기르골이 새끼손가락을 몇 번 까딱였다. 안 잡을 거냐는 듯. 그러다 도미스가 그 손가락에 자기 손가락을 걸자, 기르골은 손수건을 꺼내어 도미스의 눈가를 닦아 주더니 과장되게 감탄했다.
“아가씨는 우는 모습도 웃기네.”
도미스가 민망해서 쳐다보자, 기르골은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달라고 건네더니 다리에 쥐가 날 거라며 도미스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나중에 언제 시간 나?”
“시간은 왜요?”
“아가씨는 친구들이랑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친구들이랑 보통 돌아다니면서 놀거든.”
“!”
“같이 놀러 가자.”
도미스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잠에서 깬 라틸은 눈을 반쯤 뜬 채 멍하게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착잡하고. 아마 도미스의 마지막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건 칼라인이고, 기르골은 오히려 그녀를 죽인 여자와 한패였단 게 떠올라서 그럴 것이다.
‘맞아. 대적자의 검을 들고 있던 여자!’
그러다가 문득 라틸은 대적자의 검을 가지고 있던 그 여자가 안야와 좀 비슷한 인상이었단 걸 떠올렸다. 안야란 애가 자라면 그런 느낌일 것 같다.
‘아닌가?’
하지만 그 부분은 꿈에서도 얼핏 보았을 뿐이라, 너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상관이야. 죽은 사람일 텐데.’
꿈도 착잡하고 게스타도 착잡하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 오히려 기분은 꿀꿀했다.
‘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기르골이 결국 대적자랑 한 팀을 먹어서 도미스가 열 받았나? 그래서 타락했나?’
영 이해가 가지 않아 꼬물거리던 라틸은 기우뚱 몸을 돌리다가, 단단한 어딘가에 머리를 탁 부딪치고 고개를 들었다.
“!”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건 게스타의 가슴이었다. 게스타가 아직 옆에서 자고 있던 것이다. 기겁한 라틸이 더욱 고개를 위로 들어 보니, 다행히 게스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전에 옆에서 잤을 때도 느꼈지만, 아침잠이 많은 건지, 라틸이 부딪쳤는지도 전혀 모르고 자고 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라틸은 이불을 들치고 슬그머니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래도 게스타가 새근새근 자고 있자, 라틸은 침대에 팔을 괴고 슬쩍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찔러 보았다.
‘넌 정체가 뭐냐, 대체.’
그 순간. 게스타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는 바람에, 라틸은 놀라서 뒤로 몸을 확 빼다가 이불 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윽.”
알싸한 통증에 라틸이 허우적거리자, 게스타가 얼른 달려와 일으켜 세워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다. 괜찮아.”
라틸은 민망해서 몸을 일으키고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아. 늦잠 잤네. 늦잠.”
그러고는 황급히 달아나버리자, 남겨진 게스타는 어리둥절해서 닫힌 문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올라오더니, 게스타는 떨어진 이불에 파묻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라틸이 남기고 간 냄새와 온기를 자신에게 묻히려는 듯.
[그짝 변태요?]
그러나 만족스러울 만큼 얼굴을 비비적거리기도 전에 창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게스타는 고개를 번쩍 들어야 했다. 소리 난 쪽에는 또 그리핀이 창틀에 앉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당하게 창문을 발로 퍽 차서 열고 들어오더니, 게스타의 코앞까지 날아와 발가락을 쫙 펴서 내밀고 요구했다.
[시키는 대로 했으니 주시오.]
게스타는 쫓아내는 대신 몸을 일으키고서 방 한쪽에 놓인 서랍으로 갔다. 그가 서랍 안에서 꺼낸 건 끄트머리가 뭉툭한 작은 청록색 상자였다.
[오오!]
그리핀은 뚜껑을 열기도 전부터 환호하다가, 게스타가 뚜껑을 열고 안에서 희미한 빛을 내는 사탕 여섯 개를 꺼내자 너무 기뻐 춤까지 주었다.
“자. 생명이 담긴 사탕.”
게스타가 사탕을 주자 그리핀은 두 날개로 사탕을 소중하게 받아들고는 껍질째 오독오독 먹기 시작했다. ‘와득 와득’ 하는 소리와 껍질을 씹는 바스락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섬뜩하게 울렸으나, 게스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옷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그리핀 역시 먹는 데 집중하느라 게스타가 옷을 벗건 도로 입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지막 사탕을 다 먹은 뒤에야 그리핀은 날개로 부리를 닦으며 물었다.
[근데 왜 그런 거요?]
“뭐가.”
[왜 스스로를 수상하게 몰아가시오? 우리 로드…… 멍충시러 졌던데, 그래도 괜찮겠소?]
게스타가 마지막 단추를 풀자 옷이 툭 떨어지며, 그 안에 감춰져 있던 근육으로 꽉 짜인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 섬세하게 공들여 빚은 근육은 대신관이 탐이 낼 정도로 완벽했다.
“괜찮아.”
하지만 게스타는 야생적인 몸과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러라고 알려드린 거니까. 내 생각만 하고 있으라고.”
* * * 방으로 돌아온 라틸은 씻고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업무에 복귀했지만, 게스타가 영 신경 쓰여서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황제가 된 후 이런 적이 여러 번 있긴 했으나 이번에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해서, 기르골과 게스타, 도미스가 서로 엎치락뒤치락 머릿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려 애썼다. 한쪽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면 다른 둘이 ‘그럼 내 생각하면 되겠네!’라면서 불쑥 나타날 지경이자, 라틸은 결국 괴로워하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아…… 집중. 제발 집중.”
하지만 집중한 건 라틸의 머리가 아니라 시종장이었다.
“폐하. 머리가 아프십니까?”
시종장이 놀라 묻자 라틸은 책상에서 이마를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집중이 안 돼서요.”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더 해보고…….”
그러다가 라틸이 갑자기 고개를 확 들자, 시종장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사블레 후작.”
“예, 폐하.”
“로르드 재상 좀 불러올래요?”
* * * 시종장이 ‘로르드 재상은 왜 부르시지?’ 하는 얼굴로 나가고 약 30분 정도 뒤. 로르드 재상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궁전 반대쪽에 가 있어서 온다고 바로 왔는데도 시간이…….”
로르드 재상은 오자마자 사과부터 했으나, 라틸은 괜찮다고 손을 내젓고서 얼른 본론을 꺼냈다.
“재상.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로르드 재상은 황제가 갑자기 시종장을 보내 찾은 건 물론 물어볼 것까지 있다고 하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라틸이 집무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죄다 물려버리자, 재상은 심각하다 못해 두려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음. 재상. 게스타 말이네.”
황제의 입에서 아들 이름까지 나오자 재상은 손바닥이 땀이 다 났다.
“예, 폐하. 게스타가 무슨 사고라도 쳤는지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남녀 간의 일이란 모르지 않는가.
“아니, 사고를 친 건 아닌데.”
‘수상해서.’
“어릴 때 얘기 좀 들려주겠나?”
하지만 라틸이 말을 계속 잇자, 재상은 곧 두려운 마음을 떨치고 얼굴이 환해져서 “예!”하고 외쳤다.
“그럼요!”
라틸이 질문하는 의도를 좋게 해석한 게 분명했다. 그 오해를 바로 알아차렸으나 라틸은 환상을 깨지 않고 웃으면서 로르드 재상의 말만 기다렸다. 로르드 재상은 황제가 기대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자 더욱 흐뭇해져서 괜히 바지 옆선을 손으로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아. 우리 게스타는 어릴 때부터 참 얌전하고 순하고 예뻤습니다, 폐하.”
“칭찬 빼고.”
“예?”
“객관적인 얘기를 듣고 싶다네. 뭐…… 특별한 사건이라던가. 유독 기억에 남을 일화라던가 그런 거.”
“아아. 그런 거요.”
여전히 황제의 의도를 좋게 해석한 로르드 재상은 생글생글 웃었으나 이번에는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라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원체 순해서 사고 없이 큰 애다 보니, 바로 생각나는 게 없군요.”
“그래?”
“네. 아아. 게스타는 어릴 때부터 폐하를 연모…… 아. 이 이야기를 해도 될지…….”
“알고 있으니 말해 보게.”
“아시는군요?”
로르드 재상은 황제가 게스타의 오랜 짝사랑도 이미 안다고 말해주자, 그때부터 안심해서 게스타가 옛날부터 얼마나 라틸을 흠모했는지, 그 애정이 얼마나 예쁘고 순수한지를 주절주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라틸 역시 혹시 그 옛날이야기 안에 게스타의 수상함에 대한 열쇠가 있을까 싶어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 * * 차를 석 잔이나 마시며 거의 두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라틸은 별 수확을 얻지 못했다. 로르드 재상의 입을 통한 게스타가 너무 미화된 탓이었다. 반면 로르드 재상은 ‘이제 황제가 우리 아들에게 관심이 가시나 보다’ 싶어서 뿌듯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서는 그의 어깨는 들어올 때보다 훨씬 펴져 있었고, 허리가 꼿꼿해져서 키도 좀 커져 있었다. 승전한 장군 같은 모양새에, 재상 측 관리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그래도 인내심을 발휘해 박수를 치진 않았으나, 재상은 사람들 앞에서 뒷짐을 지고 보란 듯이 자랑했다.
“폐하께선 게스타에게 관심이 많으시군. 하긴. 그리 순하고 착하니.”
그 모습은, 황제가 재상을 따로 불렀단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들어온 아트락시 공작의 눈에 똑똑하게 들어왔다. 재상도 공작을 발견하자 흐뭇하게 웃고는 턱을 치켜들고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빈정거렸다.
“라나문? 아무리 외모가 잘나면 뭐 하나. 인성이 되어야지.”
“맞는 말이지. 한데 그 이야긴 왜 꼭 외모가 못난 이들이 할까.”
“하하. 자네가 그렇게 말해도 아무렇지 않네. 폐하가 그랬거든. 우리 게스타가 귀엽다고.”
“!”
“라나문은…… 흠.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지.”
풋 소리 내어 비웃은 재상이 라나문의 이름을 말하면서 두 번이나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아트락시 공작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자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내 아들만큼 귀여운 생명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네.”
너무 화가 난 아트락시 공작은 무리해서 아들을 미화해 보았으나, 여유로워진 로르드 재상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거 어느 세상 얘긴가? 이 세상 얘긴 확실히 아닌데?”
“어, 어릴 땐 귀여웠네!”
“차가운 미남의 시대는 갔네, 아트락시. 이젠 우리 게스타처럼 착하고 온화한 미남의 시대지.”
“!”
“꺼지게, 구시대의 유물 같으니라고.”
* * * 아무리 화가 나도 황제에게 ‘왜 우리 아들은 귀엽다고 안 해 주시냐’고 따질 수는 없다. 로르드 재상에게 한 방을 먹은 아트락시 공작의 화살은 아들인 라나문 본인에게 그대로 돌아갔다.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그는 일이 끝났는데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라나문부터 찾아간 것이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갑자기 씩씩거리며 들어오자 의아해 인상을 구기는 라나문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구겨진 이마를 찰싹 쳐버렸다.
“이 인상!”
“아버지?”
라나문은 물론 문을 열어준 카르둔까지 놀라서 공작을 보았으나, 공작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공작님. 제가 차를 가져다드릴게요.”
카르둔이 공작을 의자에 앉히고 차를 가져와 따라준 다음에서야, 공작은 조금 분노를 누르고서 사태를 설명했다.
“폐하께서 로르드 재상, 그 재수 없는 놈을 불러다가 게스타 이야기를 많이 하신 모양이다.”
“폐하께서요?”
“재상 그놈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갔어. 폐하가 게스타가 귀엽다고 하셨나 보더라.”
“그게 귀엽다고요?”
라나문이 인상을 다시 쓰자, 아트락시 공작은 차를 마시다 말고 또 아들의 이마를 찰싹 쳤다.
“이 인상!”
아프게 친 건 아니지만 라나문은 불쾌해서 서늘한 시선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그 눈빛을 받자, 아트락시 공작은 아들인데도 좀 무섭단 생각이 들어서 그제야 손을 내렸다. 하지만 곧 아버지로서의 체면을 차리고 단호하게 충고했다.
“라나문 폐하가 귀여운 걸 좋아하시는 모양이니, 너도 좀. 해봐라.”
“해보라니요?”
“왜, 그런 거 있잖으냐. 흠흠. 그거.”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충고를 하는데도 라나문이 이해하지 못하자, 그는 너무 답답해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커다랗게 뜬 다음 직접 시연해 주었다.
“왜, 이런 거 있잖느냐! 폐하아…… 흐으응…….”
아트락시 공작이 어깨를 떤 다음 윙크를 하자, 라나문은 순간 헛구역질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지켜보던 카르둔 역시 무례함을 잊고 같이 헛구역질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트락시 공작은 얼굴에 열이 올랐으나, 아들을 국서로 이끌어야 한단 사명을 품고 굳건하게 다그쳤다.
“폐하가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다. 이런걸. 왜, 재상 그놈 아들이 맨날 하는 거 있잖으냐. 눈 커다랗게, 그 뭐야, 고양이 눈처럼 뜨는 그거!”
라나문은 아버지의 재촉에 한숨을 내쉬고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언가 착각하신 모양인데요.”
“정말이라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보단 제가 폐하를 더 잘 압니다.”
“눈 딱 감고 해봐라. 이거 한다고 안 죽어!”
라나문이 질색해 쳐다보자, 아트락시 공작이 이번에는 하소연하듯 “아드을!” 하고 외쳤다. 단단히 골이 난 공작을 빤히 보다가, 라나문은 읽던 책을 옆에 내려놓고서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지요. 국서가 되는 데는 폐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만, 폐하의 의견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냐?”
“폐하께서 절 품어주지 않으시니.”
“아직도?”
“……다른 수를 써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