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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뺏기지 않을 하나 (207/367)

208화. 뺏기지 않을 하나2022.02.23.

라틸은 그리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나중에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모두에게 들릴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다 툭 들려온 말.

16551126586907.jpg[그쪽 정체가 뭐긴. 인자한 척 굴지만, 황제가 만든 사탕조차 주지 않는 쪼잔하기 짝이 없는 밴댕이 소갈딱지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라틸은 순간 당황했다. 어? 라틸은 괜히 눈동자를 굴려 뒤를 보려 시도했으나, 뒤돌아 누운 자세로 창문 쪽이 보일 리 없었다. 라틸은 속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저게 끝은 아니겠지. 뒤에 뭐가 더 있겠지.

16551126586913.png“잘 아네.”

그러고서 없었다.

16551126586917.png‘진짜 저게 끝이야?’

라틸은 허탈해졌으나, 정말 그 뒤에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그때 게스타는 라틸 쪽을 힐긋 보고서, 그리핀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올려 속삭이는 중이었다.

16551126586913.png“잘 가.”

작별 인사를 뱉은 게스타는 ‘아이고 아이고’ 우는 그리핀을 창밖으로 달랑 던진 다음, 창문을 닫고 야무지게 걸쇠까지 걸었다. 게스타가 침대로 다가와 눕자 침대가 잠시 눌렸다가 위로 올라왔고, 라틸의 심장도 거기에 맞춰 마구잡이로 뛰어댔다. 그래도 내색하지 못하고 뒤돌아 있는 라틸을, 게스타는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팔을 뻗어 라틸의 허리를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라틸을 넣고 감싸듯 누운 게스타는, 라틸의 등에 이마를 대고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를 기분 좋게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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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시 도미스의 기억 속이었다. 도미스는 하녀 일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으나, 라틸은 게스타에 대해 생각하느라 주위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찬물의 감각까지도. 게스타는 대체 어떻게 그리핀과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할까? 혹시 게스타도 뱀파이어인가? 하지만 게스타는 혈색도 좋고 피부도 따뜻하잖아. 아니, 그래도 그리핀이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무언가 수상한 점이 있는데……. 혹시 게스타가 대신관의 부적을 판 그 내부의 적인가? 아니, 근데 클라인도 그리핀을 봤잖아.

16551126586917.png‘게다가 그리핀을 나를 두고 황제라고 했어. 로드가 아니라.’

그러면 로드 세력은 아니지 않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했는데……. 그런데 한참 라틸이 생각에 빠진 그때.

16551126586907.jpg“도미스! 큰일 났어! 지금 네 의붓동생이 네 방에서 난리 부리고 있어!”

같이 하녀로 들어온 안야가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왔다. 라틸은 게스타에 대해 생각하길 멈추고 꿈 내용에 집중했다. 도미스의 정체라거나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면, 이젠 이 꿈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해졌으니.

16551126586907.jpg“안야가?”

16551126586907.jpg“어. 안야가. 아, 씨! 이름 같으니까 이상하네. 하여튼 걔가.”

16551126586907.jpg“왜?”

도미스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우선 널던 빨래를 마저 빨랫줄에 건 다음 안야를 따라 자기 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동생 안야가 방 앞에 서 있고, 다른 하녀들이 주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생 안야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는데, 그러다 달려온 도미스와 눈이 마주치자 팔을 내리고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그녀는 도미스와 마주 보고서자 손바닥을 펼치며 물었다.

16551126586907.jpg“이게 뭐지?”

동생 안야의 손에는 양모가 도미스에게 준 보석이 들려 있었다.

16551126586907.jpg“보석이요.”

도미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동생 안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16551126586907.jpg“장난하니?”

16551126586907.jpg“아닌데요…….”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도미스가 뒤로 주춤 물러나는 찰나. 경멸조로 가득 찬 목소리가 도미스의 귀를 후려갈겼다.

16551126586907.jpg“도둑년.”

도미스가 놀라 쳐다보자, 안야는 자신이 든 보석을 도미스의 눈알에 가까이 가져다 대며 설명했다.

16551126586907.jpg“이건 내 열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보석이다.”

도미스는 그제야 당황해서 반박했다.

16551126586907.jpg“아니에요. 이건 제 거예요.”

동생 안야가 손짓하자, 안야의 개인 하녀가 도미스를 도둑 보듯 노려보며 들고 있던 주머니를 안야에게 건넸다. 안야가 주머니를 받아 뒤집자, 안에서 수많은 보석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걸 본 구경꾼들이 놀라서 수군대자, 도미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16551126586907.jpg“뭐 하는 거예요?”

16551126586907.jpg“눈에 띄는 보석이 여기저기 있더라. 내 어머니 거라던가. 왜 이걸 네가 가지고 있니?”

반면 동생 안야는 침착하게 설명하더니 비웃으며 조롱했다.

16551126586907.jpg“아. 도둑이라?”

도미스는 발끈해서 외쳤다.

16551126586907.jpg“제 거예요! 그쪽…… 엄마가 나한테 줬다고요!”

통하지 않았지만.

16551126586907.jpg“내 어머니가 왜 너한테? 말이 되는 소릴 하렴?”

16551126586907.jpg“정말이에요!”

도미스는 양모와 약속한 게 있다 보니, 자신과 양모 사이의 관계를 말하지도 못하고 억울해 얼굴만 붉어졌다. 안야가 데려온 하녀만이 아니라 원래 이 저택에서 일하는 다른 하녀들까지도 도미스를 쳐다보며 수군거리자, 라틸은 자신의 눈가에 열기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16551126586907.jpg“질질 짠다고 일이 다 해결되진 않아.”

16551126586907.jpg“그쪽 어머니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16551126586907.jpg“그럴까?”

그러다 동생 안야가 도미스를 퍽 밀치고 걸어가려는 찰나. 마침 양모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상황을 듣고 온 건지 당혹스러운 얼굴로. 도미스는 간절한 눈으로 양모를 보았다. 여기서 양모가 그녀를 모른 척하면, 순식간에 도미스는 도둑 누명을 쓰게 된다. 도미스는 울면서 양모를 보았으나, 동생을 위한답시고 정체를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한 양모가 이 상황에서 자기편을 들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지 벌써부터 낙담하고 있었다.

16551126644069.png“무슨 일이지?”

16551126586907.jpg“무슨 소란이냐.”

그러다 칼라인과 기르골까지 나타나자, 도미스는 얼굴에 열이 잔뜩 올라 주먹을 쥐었다. 칼라인의 눈빛을 받은 그녀가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 하는 기분을, 라틸은 절절히 같이 느낄 수 있었다. 두 남자까지 나타나자 동생 안야는 잘됐단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16551126586907.jpg“어머니. 이 하녀가 어머니 보석을 가지고 있어요. 제 보석도 하나 가지고 있고요. 그래서 왜 훔쳤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자기한테 줬대요. 정말인가요?”

어머니가 같이 화를 내주리라 확신한 모습. 그러나 도미스를 위하는 마음이 없진 않은지, 양모는 의외로 도미스를 편들어주었다.

16551126586907.jpg“그 보석은 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나한테 준 거잖니, 안야.”

16551126586907.jpg“이 하녀한테 준 건 아니잖아요.”

16551126586907.jpg“그 애에겐…… 내가 준 게 맞아.”

양모가 마지못해 말하자 동생 안야가 인상을 구겼다.

16551126586907.jpg“왜요?”

16551126586907.jpg“너희들은 나가라.”

양모는 대답하기에 앞서 사람들부터 물렸다. 그러고서 칼라인과 기르골 쪽으로도 자리를 비켜달란 신호를 보냈으나, 두 뱀파이어는 떠나지 않았다.

16551126586907.jpg“재밌네요. 계속해요.”

오히려 기르골은 웃으면서 이렇게 권했고, 양모는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덤덤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16551126586907.jpg“안야. 저 애는 예전에 내 의붓딸이었단다. 네 의붓언니였어.”

전혀 상상도 못 했는지 동생 안야의 표정이 살얼음처럼 굳었다.

16551126586907.jpg“그게 무슨…….”

16551126586907.jpg“정말이야. 너랑 함께 산 적도 있어. 넌 기억을 못 하겠지만.”

16551126586907.jpg“그런 얘기 처음 듣는데요.”

16551126586907.jpg“저 애가…… 가출했거든.”

양모는 도미스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16551126586907.jpg“주워 기른 아이여서 입양 절차를 밟은 게 아니다 보니 그걸로 인연도 끝이 났지.”

라틸은 도미스가 사실을 밝혀주길 원했으나, 도미스는 양모가 그래도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고 나서준 것만으로도 고마운지 우두커니 있기만 했다. 그러나 동생 안야는 이 정도만으로도 싫은지 치를 떨었다.

16551126586907.jpg“그럼 내 언니가 아니잖아요?”

그러고는 불쾌하다는 듯 도미스를 보며 학을 뗐다.

16551126586907.jpg“어쨌든 충격이네요. 평범한 하녀인 줄 알았더니, 어머니를 배신하고 떠난 은혜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16551126586907.jpg“…….”

16551126586907.jpg“어머니는 속이 너무 좋아요. 그런 사람한테 보석은 왜 챙겨 주는 거예요?”

도미스에게 이 소란을 알려주고 여기까지 데려와 준 하녀 안야는 가정사라 생각해서인지 지금까지 내내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고 도미스가 일방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발끈해서 도미스의 팔을 잡고 화를 냈다.

16551126586907.jpg“가자, 도미스. 넌 무슨 개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 넌 사람 말밖에 못 알아듣잖아.”

그 말에 동생 안야는 발끈해서 하녀 안야를 노려보았고, 도미스는 당황해서 그녀를 불렀다.

16551126586907.jpg“하지만…… 안야 씨…….”

그 순간.

16551126586907.jpg“안야 씨?”

동생 안야가 하하하 어이없어하며 웃더니, 아까보다 더욱 질색하며 도미스를 쳐다보았다.

16551126586907.jpg“뭐야. 내 이름을 다른 사람한테 붙여주고 자매 놀이까지 하고 있네.”

16551126586907.jpg“이보세요. 원래 내 이름이었거든?”

하녀 안야가 발끈해서 따지려 했으나, 이번에는 양모가 나섰다.

16551126586907.jpg“랑스터 백작가에선 하녀 교육을 똑바로 시키지 않는군.”

도미스에겐 죄책감과 애정이 있다 보니 잘 대해 주려 했으나, 다른 하녀가 자기 친딸에게 버릇없게 구는 건 용서할 마음이 없는 눈치였다. 사실 이들 사이의 관계를 제외한다면, 어느 귀족가 사람도 하녀에게서 개소리 운운하는 걸 듣고 참진 않을 터였다. 일이 커져서 하녀 안야에게 불똥이 튈 것 같자, 도미스는 황급히 나서서 양모에게서 하녀 안야를 가렸다.

16551126586907.jpg“됐어요, 안야 씨. ……가요.”

도미스는 동생 안야와 양모 쪽은 더 쳐다보지 않고 하녀 안야의 팔을 잡고 끌었다.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 기르골과 칼라인을 스쳐 지나갔으나, 그녀는 차마 두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만 숙였다.

16551126586907.jpg“죄송해요 어머니, 생각해보니 불쌍한 사람인데. 제가 욱했어요. 처음엔 도둑이란 생각에, 다음엔 어머니를 배신했단 생각에 화를 내 버렸어요.”

뒤에서 들려오는 동정심과 후회로 찬 안야의 목소리가 오히려 도미스를 더욱 괴롭게 했다. * * * 라틸이 대신 열 받아서 ‘후 하 후 하’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는 사이. 어느새 경치가 바뀌었고, 도미스는 빨래터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흘러가는 물을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옆에 털썩 앉았다. 도미스는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다가 놀라 옆을 보았다.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기르골이었다.

16551126586907.jpg“기, 기르골 씨.”

당황한 도미스는 일어서려 했으나, 기르골이 “가려고?” 하고 물어보며 웃자, 주저하며 쩔쩔맸다. 기르골이 붙잡지도 작별 인사를 하지도 않고 웃고만 있자, 도미스는 결국 주저하다가 도로 앉았다. 라틸은 기르골이 무슨 헛소리를 할까 생각했으나, 기르골은 별말 없이 물기 묻은 돌만 가지고 저글링을 하며 놀았다.

16551126586917.png‘아니, 쟤는 왜 여기서 굳이 저글링을?’

라틸은 황당했으나, 도미스는 오히려 그게 편한지 무릎을 끌어안고서 아까처럼 멍하게 있었다. 꽤 오랜 시간.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건 도미스 쪽이었다.

16551126586907.jpg“안야 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름이 안야였어요. 절대로 걔 이름을 따서 부르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기르골은 돌을 내려놓고 힐긋 도미스를 보더니 맞장구를 쳤다.

16551126586907.jpg“알아. 알아. 걔가 좀 그래. 자아가 비대해.”

그 태연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반응에, 도미스는 불안해서 입술을 깨물다가 얼결에 따라 웃었다. 그러고 나니 긴장이 좀 풀렸는지, 그녀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16551126586907.jpg“안야는요. 안야 씨 말고 안야요.”

16551126586907.jpg“자아가 비대한 애?”

도미스는 코를 훌쩍이면서 웃었다.

16551126586907.jpg“네. 걔요. 걔는…… 제가 원하던 걸 전부 다 갖고 있어요. 그 생각을 하면 좀 서글퍼지네요. 그래서 울고 있었어요.”

16551126586907.jpg“원하던 거라니?”

16551126586907.jpg“그냥 가지고 있으면 그냥 부럽고 말겠는데. 걔가 가진 모든 건 제가 가지고 싶던 것들이에요. 게다가 걔가 뭔가를 가질 때마다 저는 꼭 뭔가를 잃어요.”

16551126586907.jpg“예를 들면?”

16551126586907.jpg“가족들은 걔를 지키기 위해 절 버렸죠, 제가 죽도록 고생하는 동안 걔는 평화롭게 컸어요. 기르골 씨랑 칼라인 씨도…… 제가 따라가고 싶었는데. 절 두고 가서 걔를 만났잖아요.”

도미스는 말하다가 얼굴이 붉어져서는 황급히 덧붙였다.

16551126586907.jpg“물론 두 분도 가족도 사실 제 게 아니고, 원래 안야 게 맞긴 하지만요. 이상하게 듣진 마세요. 그냥 느낌이 그렇단 거예요.”

그러고서 웃는데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라틸은 볼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또렷하게 느꼈다. 그게 어떻게 보였는지, 기르골은 도미스의 얼굴을 빤히 보았고, 도미스는 그 눈길에 얼굴이 더 빨개져서 괜히 이런 말을 꺼냈다고 후회했다. 그 순간.

16551126586907.jpg“그럼 내가 해줄까?”

기르골이 갑자기 물었다.

16551126586907.jpg“뭐가요?”

16551126586907.jpg“아가씨가 동생한테 뺏기지 않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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