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키스하라고 묻힌 건데2022.02.20.
“도련님? 왜 그러세요?”
게스타가 한 방향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자, 트리가 바구니에서 은색의 바삭거리는 포장지를 도로 꺼내면서 물었다. 트리는 힐긋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버린 건지 하얀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리고 있을 뿐.
“그건 도로 왜 빼?”
“아. 이 색상만 너무 많은 거 같아서요.”
게스타가 말을 돌렸지만 트리는 여전히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혹시 클라인 황자가 저기서 노려보고 있었던 건 아니죠?”
진실과는 전혀 먼 오해를 한 눈치였으나, 게스타는 자기가 왜 창문을 본 건지 설명해주는 대신 웃으면서 부탁했다.
“트리, 목이 말라서 그런데. 레몬이랑 자몽을 섞은 시원한 음료수 좀 가져다줄래?”
“네? 네. 그럴게요.”
트리가 포장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나자, 게스타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친절하게 덧붙였다.
“배도 좀 고픈데. 에클레르도 먹고 싶어.”
“그럴게요!”
트리는 평소 게스타가 지금보다 좀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엇이든 먹겠단 말이 기뻐서 얼른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게스타가 트리를 보낸 건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서가 아니었다.
[왜 그리 보시오?]
게스타가 팔짱을 끼고 빤히 쳐다보자, 창밖에서 그리핀은 새실새실 웃다가 알아서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좀 수수해지셨소?]
“시끄럽게 굴지 말고 바쁘니 나가.”
그리핀은 게스타가 쌀쌀맞게 말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바닥에 가득 늘어선 바구니들을 긴 목을 뻗어 요리조리 살폈다.
[같이 하면 안 되오?]
“나가.”
[나도 로드랑 놀고 싶소.]
“나가.”
[그러면 내게도 로드가 만든 사탕을 하나 주시오.]
“나가.”
게스타가 단호하고 차갑게 뚝뚝 말을 끊어대자, 그리핀은 날개를 축 떨구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게스타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자, 그리핀은 시무룩한 척하길 그만두고는 초록색 방울이 담긴 바구니를 퍽 걷어차며 협박했다.
[이리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내도 생각이 있소. 로드에게 그쪽 정체를 다 말해버릴 거요.]
“나가.”
게스타의 덤덤하면서도 일관적인 대답에 그리핀의 양 날개가 더욱 아래로 처졌고 사자 꼬리는 아예 힘을 잃고 대롱거렸다. 그리핀은 몹시 괴로운 척 머리까지 푹 숙이고 뒤돌아서 앙금앙금 창밖으로 나가려는 시늉을 했다.
“야. 새.”
그러다 게스타가 부르자, 그리핀은 ‘역시 이 모습을 보고는 못 보내겠지?’ 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리핀의 눈에 들어온 게스타는 조금도 동정하는 기색 없이 냉랭하게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 매정한 모습에 그리핀은 충격을 받아 부들거렸으나, 게스타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너. 폐하랑 얘기 나눠 봤지?”
그리핀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져 부리를 벌렸다.
[어째 알았소?]
“폐하가 뭐래?”
그리핀은 ‘내가 그걸 말할 것 같아?’ 하는 냉랭한 비웃음을 지었으나, 게스타가 설탕 가루를 꺼내 부리에 뿌려주자 얼른 털어놓았다.
[로드에게 로드라 불렀더니 로드가 로드가 아니라 하오. 우리 로드가 좀 멍충시러지셨소. 자기가 멍청해진 걸 알면 부끄러울까 봐 내 알았다고 해줬지요. 내 이리 배려가 좋소.]
게스타는 그리핀의 부리에 설탕 가루를 더 뿌려주면서 물었다.
“폐하 반응이 어땠어?”
[내 깃털을 줬더니 까르르 웃으면서 너무 좋아하셨소.]
“놀라진 않으셨나 보네.”
[좋아하셨다니까? 나보고 이러셨소. 얘, 너 참 꼬리가 예쁘다?]
게스타는 말없이 그리핀에게 설탕 가루를 먹이면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러다가 설탕 가루 한 봉을 다 먹였을 즈음. 게스타는 생각을 마치고 입꼬리를 올렸다.
* * * 라틸은 업무를 마치자마자 바로 게스타의 방으로 찾아갔다. 사실 아직도 게스타가 왜 운 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으나, 어쨌든 자신이 밤새 그가 만든 설탕을 다 깨부쉈으니 시간을 내어야 했다.
‘설탕 냄새.’
게스타의 방문을 열기 전 라틸은 이미 안쪽에서부터 풍겨오는 강한 설탕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젠 단 냄새만 맡으면 게스타가 생각나겠네.’
하지만 이런 냄새를 밤새 맡으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막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이 열려 있어 그렇지도 않았다. 맑은 밤공기와 설탕 냄새가 섞이자 짙기는커녕 묘하게 꿈결 같은 향이 되어서 라틸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트리는 게스타의 옆에 서 있다가 라틸을 보자 꾸벅 인사를 올리고는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트리가 나가자 라틸은 두 손을 모으고서 조용히 선 게스타 곁으로 다가갔다.
“이젠 안 우네.”
다가가 얼굴을 살피자, 게스타는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가 눈 맞추기도 부끄럽단 듯이 다시 발치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까도 사탕 때문에 운 게 아닌걸요.”
“사탕 깨지자마자 울었잖아.”
“……아닙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니라니까요.”
게스타가 항의하기 위해 내리깔았던 눈을 뜨자, 라틸은 연하고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드디어 날 쳐다보네.”
“!”
“쳐다도 안 보기에 많이 화났나 했다.”
“……놀리지 마세요.”
라틸은 트리가 준비해 두고 간 바구니들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이게 다 재료인가.”
빳빳한 은색 재질의 포장지부터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반짝거리는 장식, 다섯 종류의 색 설탕들, 설탕을 녹이고 모양을 뜨고 굳힐 재료들, 안에 첨가할 괴상한 소스들까지.
“난 해본 적 없어서 내가 잘 알려줘야 해.”
라틸이 혀를 내두르자 게스타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옷과 손 여기저기에 단내를 내는 끈적한 사탕이 말라붙을 지경이 되었을 즈음, 라틸은 어느 정도 사탕을 만드는 요령을 터득했다.
“이제 좀 옷에 덜 묻히고 할 수 있겠어.”
“폐하의 옷에 녹은 설탕이 많이 떨어져서…… 괜찮으실까요?”
“나는 괜찮아. 이걸 처리할 사람이 안 괜찮겠지.”
“아…….”
게스타가 얼결에 자기 입가를 손으로 가리자, 게스타의 입가에도 녹인 설탕이 달라붙었다. 게스타가 당황해서 손을 치우자 라틸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게스타는 얼굴이 붉어져서 입가를 소맷자락으로 문질렀지만,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순간 라틸과 게스타의 눈이 마주쳤다. 라틸은 게스타의 입술이 녹은 사탕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윤이 나고 단 내가 풍기는 걸 알아차렸다. 그걸 보자 라틸은 문득 ‘입을 맞춰서 설탕을 떼어 주면 어떨까’ 생각이 떠올랐다. 연인 사이라면 그런 일도 하겠지.
‘상대가 칼라인이나 라나문이라면…… 그리 했을지도.’
하지만 게스타를 상대로 그러자니 어쩐지 좀 더 쑥스러워서, 라틸은 자신이 떠올린 민망한 생각을 빠르게 털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정수리를, 게스타가 코앞까지 왔다가 사라진 햄스터를 보는 뱀처럼 바라보았으나, 라틸은 알 수 없었다. 게스타는 라틸이 다시 작업에 몰두할 것 같자 속으로 혀를 차면서 대충 손수건을 꺼내 입에 묻은 사탕을 닦고 치워버렸다. 이를 모르는 라틸은 별 모양의 틀에 녹인 설탕을 부으면서, 게스타에게 ‘그런데 어릴 때 내가 틀라랑 싸우던 거. 넌 대체 어디서 본 거야?’라고 물어볼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건 게스타의 회상 속에서 본 장면이기에, 라틸은 묻지 못하고 말없이 사탕 틀만 두드렸다. 그렇게 열심히 사탕만 만들다 보니, 라틸은 쓸데없이 사탕 만드는 요령만 생겨갔다. 그러자 사탕 만들기는 더이상 어렵지 않았고, 밤 열한 시 무렵이 되었을 즈음 라틸은 이 원인 모를 공예를 다 끝내고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라틸은 목욕을 하고 나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엎어져서 잠이 들어 버렸다. 목욕을 하면서는 ‘밤에 여기서 자고 가야 하나, 아니면 돌아가서 자야 하나. 내가 여기서 자고 가면 게스타가 잠자리를 하고 갈 거라고 오해하려나?’ 등등 고민이 깊었지만, 목욕을 마침 즈음이 되자 이미 눈꺼풀이 2/3쯤 내려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라틸이 잠이 든 지 30분쯤 뒤. 라틸 다음 차례로 목욕을 하고 나온 게스타는 커다란 목욕 가운을 걸치고 침대 가로 갔다가, 라틸이 잠든 걸 보자 꾸물꾸물 옆자리로 들어가 눕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잠든 라틸의 얼굴을 뚫어져라 구경하다가, 슬쩍 손을 뻗어서 코끝을 문질러 보다가, 입술에 손을 댈 듯 말 듯 하다가 결국 대지 못하고 치우면서 행복하게 웃었다.
‘라트라실.’
입 모양으로만 라틸의 이름을 불러본 게스타는 이불 밖으로 반쯤 나와 있는 라틸의 손을 꺼내다가 손바닥 위에 자신의 코를 묻고 한껏 냄새를 들이마셨다. 좋아하는 냄새를 맡자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온몸의 신경세포가 마구 날뛰었다.
‘라트라실.’
[아이고오. 변태 같아라.]
하지만 창문에서 들려오는 아니꼬워하는 목소리에 게스타의 행복한 시간은 ‘우드득’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게스타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창틀에 선 그리핀이 보였다. 그리핀이 날개로 입가를 가리고 낄낄 웃어댔다. 어딘가 얄미워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게스타는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이 붙어 있던 라틸을 보았다. 라틸은 많이 지친 모습으로 베개를 붙잡고 잠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게스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슬그머니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게스타가 다가오자 그리핀은 창틀에서 폴짝거리면서 신이 나 요구했다.
[자, 시키는 대로 닥치고 있었으니 사탕을 달라. 사탕을 주세요!]
게스타는 비구니에서 사탕을 한 움큼 꺼내 그리핀의 앞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리핀은 사탕을 앙상하고 조그만 다리로 퍽 차버리고서 재차 요구했다.
[황제가 만든 걸로 주시오.]
게스타는 그리핀의 부리를 꽁꽁 묶어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서 새가 걷어찬 사탕을 도로 바구니에 넣은 다음, 라틸 쪽을 힐긋 본 다음 그리핀의 머리 위에 바구니째 사탕을 부어버리며 웃었다.
“이러면 어때?”
그리핀은 사탕이 폭포처럼 머리에 쏟아지자 잠시 눈을 맹하게 깜빡이다가, 갈비뼈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씩씩거리며 항의했다.
[황제가 만든 걸로 달라니까!]
“맛은 똑같아.”
[만든 사람이 다르잖소! 사자 꼬리를 지닌 새는 황제가 만든 사탕을 먹어야 하는 법이오.]
“사자 꼬리를 떼면 내가 만든 것도 먹겠네…….”
[그럼…… 그럼…….]
눈꼬리가 삐죽 위로 올라간 그리핀은 게스타를 노려보며 무섭게 웅얼거렸다.
[황제가 만든 사탕을 안 주면, 내 황제를 깨워버릴 거요. 그리고 그쪽이 어떤 인간인지 죄다 말해버릴 거라오.]
게스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데?”
그리핀이 대답하기 전. 라틸은 침을 삼키지 않기 위해 눈을 뜨고 심장을 눌렀다. 혓바닥이 간지럽고 식도 부근이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온 것처럼 마구 꿈틀거렸다. 라틸은 깨어 있었다.
‘게스타가 왜 그리핀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지? 저렇게 친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