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지독히 단 그대2022.02.16.
아이니는 흔들리는 눈으로 칼라인을 보다가 곧 화가 나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칼라인. 넌…… 내가 이렇게 힘들어할 때 그런 말을 하고 싶어?”
칼라인은 눈을 반쯤 감고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유감입니다, 아이니 황후.”
말을 돌리는 것 같지만, ’당신은 도미스가 아니니 힘들어해도 나와 상관없다‘는 걸 돌려서 표현하고 있었다. 아이니는 헛웃음을 내뱉다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물었다.
“내가 도미스가 아니라고…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
“…….”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왜 내가 도미스가 아니라고 계속 부인해!”
아이니가 그의 팔을 움켜쥐고 흔들자 칼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짧게 대답했다.
“영혼.”
“영혼?”
아이니는 허탈하게 웃었다.
“네 말대로 내가 도미스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치자.”
“?”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도미스의 기억도 외관도 없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 사람. 도미스의 모습과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영혼이 다른 사람. 둘 중 누가 도미스에 더 가까울까?”
“!”
칼라인이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자 아이니는 다시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차갑게 물었다.
“도미스와 같은 점이 하나도 없는데 도미스라고 철석같이 믿는 거. 그 사람이 도미스라고 우기고 보는 거. 그건 그냥 네 만족 아냐? 그 사람은. 네가 도미스라고 믿는 그 사람은. 자기가 도미스래?”
칼라인은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상자를 아이니에게 내밀었다.
“죽은 게 아니니 잘 간직하십시오.”
그 말에 아이니가 상자 뚜껑을 벗겨 보자, 그 안에는 헤움의 목이 있었다. 아이니는 놀라서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이건…… 네가 왜 이걸……?”
“식시귀라 목만 있어도 살아 있습니다. 죽은 게 아니니 잘 간직하십시오. 로드가 각성한다면 몸까지 되살려 줄 수 있을 테니.”
말을 마친 칼라인은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일말의 미련도 없이 돌아서 버렸다. 아이니는 헤움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몇 가지 고통이 동시에 한곳을 파고들고 있어서 너무나 괴로웠다. 헤움이 죽은 고통, 전생의 연인인 칼라인이 자신을 무시하는 고통, 이 목의 주인이 헤움이라는 걸 알면서, 몸을 없애버린 라트라실 황제에 대한 증오까지. 칼라인은 말없이 걸어가려 했으나 뒤에서 자꾸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무겁게 한숨을 내뱉고 돌아섰다. 고개를 돌리자 도미스의 모습을 한 아이니가 울고 있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자신이 괴롭게 했던 그 모습으로, 그녀가 또다시 울고 있다. 그 괴로워하는 모습이 칼라인에게도 알싸한 통증을 주었다. 상대가 그녀가 아니란 걸 알지만, 저 가짜의 주장처럼 그녀의 모습을 하고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보니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칼라인은 망설이다가 충고를 던져 주었다.
“그쪽은 절대로 도미스일 수가 없어. 로드가 환생을 거듭한단 전설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내가 말한 거다. 그쪽이 로드가 아니란 게 도미스가 아니란 이유라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니가 자기가 도미스의 환생이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좀 충격적이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지 현실을 받아들일 테니. 아이니는 상자를 꽉 끌어안고서 처연하게 물었다.
“그럼 내게 왜 도미스의 기억이 있는 건데? 이렇게 생생하게?”
그쪽이 아마 도미스의 적이었을 테니까. 칼라인은 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그녀가 도미스에게, 정확히는 도미스의 환생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릴까 봐. 대신 그는 돌아서서 그대로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칼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이니는 비틀비틀 움직이다가 그가 기대어 서 있던 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 밖으로 허망한 울음이 웃음과 섞여 흘러나왔다.
“나는 널 위해 대적자인 걸 포기하려고까지 했는데. 너는…….”
한참을 흐느낀 그녀는 태양이 멀리 가버리고, 대신 노란 달빛이 높은 나무 사이로 비쳐 들어올 때에야 눈물을 그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노란 달이 담겼고, 곧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칼라인. 네가 날 배신한다면…… 나도 대적자로서 사명을 다하겠다. 네 말대로 내가 도미스가 아니라면, 너도 날 원망할 필요 없겠지.”
중얼거린 그녀는 반지를 벗어 헤움의 목이 담긴 상자에 넣었다. 달이 담겨 있던 초록색의 눈동자가 노란 달이 사라지며 멜론색으로 변했으나, 이를 본 건 가슴이 너무나 시려 말도 못 하는 헤움뿐이었다.
“신이 나를 돕는다면 내가 대적자가 맞겠지.”
중얼거린 아이니는 성수에 담겨 흔들리는 헤움의 겉옷을 챙겨 자신이 걸쳤다. 물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으나 아이니는 그 옷을 벗지 않은 채 헤움의 목을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나 그렇게 걸어갔을까. 풀벌레 소리와 부엉이 소리, 정체 모를 야생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사이로 헤움이 조용히 아이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니.”
목 위 얼굴만 남아도 살아 있단 이야기는 들었으나 말도 할 줄은 몰랐던지라, 아이니는 놀라서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헤움?”
헤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니는 근처의 커다란 바위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물었다.
“누구야? 누가 널 이렇게 했어? 라트라실 황제야?”
헤움 황자의 몸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없앤 게 라트라실 황제이고, 칼라인 역시 황제의 명령을 받아 그녀에게 왔었다. 아이니로서는 라트라실 황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헤움 황자는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목만 남아 있어 그게 잘되지 않자 소리 내어 대답했다.
“기르골.”
“기르골?”
“날 이렇게 만든 건 기르골이야, 아이니.”
“그 하얀 머리…… 대적자의 스승이라는…….”
“기르골이 사디에게 날 죽이라 했다. 대적자로서 훈련을 시킬 거라고. 하지만 사디가 날 죽이길 거부하고 풀어주자, 그가 홀로 날 쫓아와 이렇게 만들었지.”
“사디가 널 구해주었고 기르골이 널 죽였다고.”
적이 아닌 이와 적을 분류해 낸 아이니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다시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니는 우선 생각을 멈추고 헤움의 머리가 담긴 상자부터 들어 안았다. 우선은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였다. 헤움은 그런 아이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언을 해주었다.
“다가 공작이 네가 가출했단 사실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단 소문을 냈어. 너도 적당히 말을 맞추는 게 좋을 거다.”
헤움의 말대로, 아이니는 근처의 공관으로 간 다음 자신이 카리센의 황후이며, 납치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단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청했다. 공관 사람들은 아이니의 말을 바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아해했으나, 카리센의 황후가 납치되었단 사실은 이미 소문이 나 있었기에 우선 도움은 주기로 했다. 카리센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아이니는 헤움의 목이 담긴 상자를 꽉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복수할 대상. 기르골. 라트라실 황제. * * *
‘아. 그리핀 얘기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자신을 아이니 황후라 주장하는 여자에게 도움을 주라는 허락을 보낸 라틸은 한 시종의 머리 장식을 보고서야 뒤늦게 그리핀이 떠올라 자기 이마를 쳤다.
‘젠장. 갑자기 식시귀를 죽이니 어쩌니 하니까 까먹었어.’
게다가 마지막에 기르골의 분위기도 좀 이상해서. 라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묻는 수밖에. * * *
“이거 수제작 한 거니까,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조심하셔야 해요.”
트리가 신신당부하면서 바구니를 내밀었고, 게스타는 “나도 알아.” 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걸 받아들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바구니 안에 가득 찬 사탕들은 게스타 본인이 트리와 함께 밤새 쪼그리고 앉아 만든 사탕들인 것을. 둘 다 그리 솜씨가 좋지 못하다 보니, 조금만 툭 건드려도 사탕이 부서져 버린단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만든 덕에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다.
“알았어.”
“직접 만들었다고 꼭 말씀하시고요.”
“으응.”
“한숨도 못 자고 만들었다고 하세요. 꼭 말입니다.”
“알았다니까.”
트리는 그래도 못 미더운지 잔소리를 계속 퍼붓고서 게스타의 어깨에 붉은색의 보송보송하고 짧은 망토를 둘러두었다. 클라인 황자가 최근에 게스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자, 트리가 ‘언제까지 제자리에서 황제만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짜낸 계책이었다.
“요즘 사탕 만들기가 취미인데, 만들다 보니 너무 많이 만들어서 주는 거라고 하세요.”
트리는 온 정성을 들여서 게스타를 치장한 다음, 얼른 본궁 회랑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게스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쪽부터는 경비병이 많은 데다 갑자기 달려와 시비를 걸 클라인도 없기에, 따라가지 않고 일부러 이쯤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시종인 자신이 곁에 있으면 둘 사이 분위기가 깊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이런 배려 속에서, 게스타는 눈에 띄는 사탕 바구니를 들고 주춤주춤 걸어갔다.
궁인들의 시선이 게스타에게 쏠렸지만 모두들 붉은 망토를 걸치고 소심하게 걸어가는 이 잘생긴 후궁을 귀엽게 본 것뿐. 인상 쓰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라틸을 발견한 게스타는 바로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하고 황급히 낮은 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황제가 이동하는 소리가 나면, 다시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몇 번 입만 달싹일 뿐. 또 부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황제가 돌아보자 이번에는 기둥 뒤에 숨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을 쏙쏙 숨으면서 황제를 따라가던 게스타는, 저 먼발치에서 트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걸 발견하고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심각한 얼굴로 바쁘게 걸어가는 황제에게 갑자기 시뻘건 망토를 입고 다가가서 사탕 바구니를 건네자니 몹시 민망했다. 좀 더 의젓하고 근엄하고 멋진 그런 선물을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아니면 망토 색이라도 바꾸던지. 주저하고 있자니 다시 황제가 이동하는 소리가 났고, 게스타는 슬그머니 숙였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머리를 든 순간. 바로 머리 위. 게스타가 몸을 움츠리고 있던 그 낮은 담벼락 위쪽에서 게스타는 황제를 발견했다. 그녀가 담벼락에 팔을 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 순간 게스타는 너무 놀라 들고 온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트리가 신신당부했으나 얼결에 손에 힘이 빠져들고 있을 수 없었다. 조금만 세게 쳐도 바스러지던 사탕은 바닥에 떨어지자 전부 엎어지며 가루가 되었고, 얇은 포장지 사이로 단내가 확 풍겨왔다. 달콤한 향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황제가 눈을 감고 냄새를 들이켜는 순간. 게스타는 자기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그녀와 마주 보는 이 순간이 지독할 정도로 달게 느껴져서. 그저 이렇게 바라볼 뿐인데도. * * *
‘왜 우는 거지?’
뒤에서 졸졸 따라오다가 티 나게 숨어대는 게 귀여워서 이쪽도 깜짝 놀라게 해 주었을 뿐인데. 들고 온 바구니 속 사탕까지 다 깨부순 게스타가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지자, 라틸은 당황했다. 혹시 사탕이 다 깨져서 우는 건가? 라틸은 당황해서 짙은 단내를 풍기는 사탕들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새로 사줄까?”
게스타는 그 말에 잠깐 울음을 멈추는 것 같았으나 다시 처연하게 울었고, 라틸은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그러고 있자니 어디선가 게스타의 시종 트리가 달려와서는, 바닥에 엎어진 사탕들을 보다 아이구 아이구 소리를 내며 하소연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우리 도련님께서 밤새도록 혼자 이걸 만드셨는데. 실수로 떨어뜨리고 나니 아쉬워서 우시나 봅니다.”
내가 떨어뜨린 거 아닌데…… 아닌가, 나 때문인가? 내가 놀라게 해서 그런 건가? 밤새 혼자 이걸 만들었단 소리에 라틸은 당황해하다가 손수건을 꺼내 게스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울지 마라, 게스타. 오늘 다시 새로 만들자. 나와 같이. 어때? 그러면 될까?”
그 말에 게스타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라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라틸은 안도해서 부하들에게 바구니와 사탕을 치우란 눈짓을 보냈다. * * *
“도련님이 울보라 다행이네요.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화위복이 되었네요.”
그날 저녁. 트리는 사탕 재료를 알록달록한 바구니에 담아 준비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사탕이 다 깨진 게 그렇게 서운하셨어요?”
트리는 뭔가 단단히 오해한 눈치였으나, 게스타는 자신이 왜 운 건지 설명하는 대신 그저 쑥스럽게 웃기만 했다. 어쨌든 황제와 밤새 둘이 있을 수 있단 거니까. 하지만 그 행복해하던 미소는 창밖에 부리를 벌리고 선 그리핀을 보는 순간 굳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리핀이 반갑게 웃으면서 외쳤다.
[사탕 만드시오? 같이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