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 특히 엔딩을.2022.02.09.
이 사람, 아. 이제 사람은 아니구나. 하여튼 저 식시귀가 왜 하필 여기서 나온 거지? 라틸은 황당했다. 헤움 황자 식시귀 역시 라틸을 알아본 건지, 붙잡힌 사냥감 같은 눈길로 이쪽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저건 카리센 황자 식시귀잖아. 왜 여기 있어?”
라틸이 참지 못하고 묻자, 기르골은 눈썹을 씰룩였다.
“식시귀도 국경은 넘어갈 수 있는데, 아가씨.”
“그런가.”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카리센에 있던 식시귀가 왜 뜬금없이 기르골의 저택에서 나타났는지가 의아했을 뿐.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아는 얼굴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라틸은 곧 검을 위로 올려 자세를 잡았다. 만난 것도 두 번뿐이지만 만날 때마다 두 번 다 싸운 자였다. 첫 번째야 저쪽이 일방적으로 달아났다지만, 두 번째는 서로를 죽일 기세로 싸웠다. 게다가 헤움 황자 저놈이 반란을 일으켜서 하이신스와 라틸의 사이도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래저래 라틸에겐 봐줄 필요 없는 자였으니, 얼굴을 안다고 해서 굳이 놓아줄 필요는 없었다.
“목을 잘라도 죽지 않는다면…… 심장을 찌르면? 그럼 죽어?”
“해봐, 사디 양. 스스로 해보고 안 되면 알려줄 테니.”
헤움의 표정이 공포에 물들었으나 라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반대 상황이었어도 식시귀가 사람을 살펴주진 않을 테니. 그런데 라틸이 헤움의 심장을 찔러보기 직전. 혼자 여유롭게 찻잔을 꺼내 차 끓일 준비를 하던 기르골이 툭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아, 거기 식시귀. 사라졌다는 연인은? 찾으러 간다더니 찾았어?”
헤움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라틸은 그 말에 검을 찌르려다가 손을 급히 뒤로 물리며 허공에서 한 바퀴 돌렸다. 헤움의 연인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마침 ‘사라졌다’는 점까지 일치하는 사람이 하나 있지 않던가.
‘아이니.’
왜 카리센에 있던 헤움이 타리움에 와 있나 했더니. 아이니를 찾아서인가? 그럼 아이니가 타리움에 와 있단 건가? 라틸의 머릿속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가짜 도미스가 떠올랐다. 그 가짜도 지금 타리움에 와 있지. 최근엔 못 만났지만.
“혹시 그거 아이니 황후 이야기?”
라틸이 물어도 헤움이 대답하지 않자, 라틸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하고서 기르골에게 질문했다.
“기르골. 식시귀가 되어도 사람일 때 마음이 그대로 남아?”
기르골은 어깨를 으쓱했다.
“돼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맞는 말이긴 했다. 라틸은 수긍하고서 다시 검을 고쳐 쥐고 헤움을 쳐다보았다. 창백한 얼굴 파리한 입술. 겁먹은 눈동자. 반역을 일으켜서 하이신스가 날 떠나가게 한 놈. 덕택에 후궁이 여섯 명이나 생기긴 했지만, 하여튼 몇 년은 저놈 때문에…….
“내가 죽게 된걸.”
그 순간 헤움이 입을 열었고 라틸은 눈살을 찌푸렸다. 라틸은 식시귀와 눈이 마주쳤다. 공포로 질린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훗날에라도. 아이니가 모르게 해주세요.”
헤움은 그 말을 끝으로 죽음을 각오하듯 눈을 감았다.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자 기르골이 찻잔에 물을 붓고서 주전자를 내려놓고 있었다. 라틸은 다시 헤움을 보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떨고 있었다.
“…….”
그걸 보는 순간. 라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잠시 몇 가지를 생각해 본 라틸은 곧 슬픈 표정을 짓고서 검을 떨구었다. 검 끝이 ‘툭’ 하고 바닥에 닿자, 헤움이 실눈을 떴고 기르골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제자님?”
기르골이 물었다. 검으로 당장 찌를 것처럼 굴더니, 왜 그러고 있느냐는 표정. 라틸은 한숨을 섞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죽이려고 보니 마음이 약해졌어.”
마음이 약해졌다고? 기르골이 고개를 기울였다. 의심하는 얼굴로. 헤움 역시 살려준다는데 오히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라틸은 검을 아예 검집에 도로 꽂아 버리고서 한탄했다.
“이렇게 이지가 뚜렷한 데다 아직 누구를 해치지도 않았잖아. 죽이려니 가엾어. 기르골, 그냥 보내주자.”
기르골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라틸은 그쪽으로 다가가 팔을 잡고 슬쩍 흔들었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며. 연인을 찾아야 한다잖아.”
기르골은 그래도 영 의아한 눈빛이더니, 헤움을 곁눈질하며 충고했다.
“아가씨. 괴물들을 동정해선 제대로 된 대적자가 될 수 없는데.”
그러나 라틸은 생각해 둔 바가 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내 동정심은 상대가 식시귀란 이유만으로 죽여버리는 게 아니야.”
“?”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 식시귀는 식시귀라도 살려줄 거고.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사람은 사람이라도 처단할 거야. 이게 내 동정심이다, 기르골.”
헤움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눈치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기르골은 눈이 조금 가늘어져서 라틸은 생선 가시처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평소와 다른 빛이라, 라틸은 ‘혹시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차렸나?’ 하고 조금 찔끔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슬픈 척 기르골을 쳐다보자, 기르골은 찻잔을 작은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아가씨. 아가씨는 좀 이상해.”
라틸은 대답 대신 헤움을 묶은 끈을 풀어주었다. 헤움은 기르골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가 잡으러 올 것 같지 않자,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가 버렸다. 문이 쾅 닫혔다가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기르골은 헤움을 잡으러 가지 않았다. 라틸은 유심히 바라보기만 할 뿐.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기르골이 입을 오싹하게 양 가로 벌리더니, 천천히 라틸 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좀 더 이상한 느낌이라 라틸은 반사적으로 경계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대신 라틸은 그저 동정심에 넘어간 마음 좋은 대적자처럼 기르골을 응시하기만 했다. 라틸의 코앞으로 다가온 기르골은 머리카락으로 손을 느릿하게 올리더니, 그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두피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이마에 대고 속삭였다.
“넌 대적자인데. 왜 말을 꼭 그녀처럼 할까.”
* * * 커다란 테이블 앞. 여우 가면이 홀로 상석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른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다. 그러나 꼿꼿하게 앉아 있던 여우 가면이 앞에 놓인 종을 몇 번 두드리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 책상 주위를 다른 동물 가면들이 우르르 채워 앉았다. 어디서 누가 온 건지도 모를 정도로 빠른 속도여서, 아마 이 모습을 평범한 사람이 보았더라면 기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우 가면은 별다른 내색 없이 앉아 있다가, 모든 자리를 동물 가면들이 다 채우고 앉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새집은 어떤지.”
여우 가면의 질문에 동물 가면들은 ‘좋다’ ‘근데 좁다’ ‘그래도 괜찮다’ ‘여기는 햇볕이 잘 든다’ 등등의 말을 뱉었고, 순식간에 식당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런데 한참 새로운 거처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쥐 가면을 쓴 이가 손을 불쑥 들어 올렸고, 모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좌중이 고요해지자 쥐 가면은 여우 가면에게 물었다.
“대적자와 기르골을 막기 위해 대타를 세워서 그런 걸까. 로드 각성이 좀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에 몇몇 동물 가면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토끼 가면은 덤덤히 대답했다.
“저번 로드는 더 오래 걸렸지. 그땐 반쯤 세상이 어둠에 먹힌 후에야 로드가 각성했으니.”
그러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은밀한 메시지가 숨어 있어서, 쥐 가면은 납득이 간 척 손을 도로 내렸다. 하지만 다른 가면들은 토끼 가면의 설명을 듣고서도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수군거렸다.
“그래서 대적자랑 백화랑술이 로드가 각성하기도 전에 먼저 결집해 버렸으니 문제잖아.”
“그래. 그 때문에 실패했으니 이번엔 안 그래야지. 그들보단 우리가 먼저 뭉쳐야 해.”
“게다가 대신관 말이야. 로드 곁에 있어서 로드가 의심받지 않게 해주는 방어막이 되긴 하는데. 그자 때문에 이쪽도 로드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워.”
다른 동물 가면들이 맞다, 그렇다, 하나둘 수긍하기 시작하자 여우 가면이 다시 그들을 불러모은 종을 ‘댕 ’댕‘ 하고 두드려 이쪽으로 시선이 모이게 했다. 동물 가면들이 조용해져서 쳐다보자 여우 가면은 빙그레 웃으면서 당부했다.
“이번엔 괜찮습니다. 로드는 아직 각성하지 않았지만, 우리도 이번엔 미리 대비하고 있으니까. 여러분이 할 일은 뭐다? 좀비들이나 잘 관리하는 거다. 알았나요?”
“하지만 우리도 로드가 보고 싶은데.”
“로드가 내 얼굴을 까먹으면 어쩌지?”
“뭘 어째 당연히 까먹었을 건데.”
“로드한테 돈을 빌리고 아직 안 갚았는데. 그것도 까먹었겠지?”
“그건 내가 말해드릴게.”
동물 가면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여우 가면은 신경질이 나는지 또다시 종을 마구 눌러댔다. 그 ’댕댕댕댕댕‘ 하는 울림에 동물 가면들이 또 조용해지자, 여우 가면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재차 당부했다.
“좀비들은 이성이 없어 통제하기 어려우니 다들 관리에 신경 써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어수선한 회의가 끝나갈 무렵. 모두가 다 일어나려는데, 여우 가면이 이번에는 하나를 딱 집어 불렀다.
“사슴님.”
그 말에 사슴 가면을 쓴 이가 나가려다가 돌아오자, 여우 가면이 좀 걱정스럽게 물었다.
“쇼드 폴리에 공동이 하나 나타났다던데. 괜찮던가요?”
“아. 그렇지 않아도 안에 뭐가 있나 싶어서 들어가 봤는데-.”
* * * 기르골의 표정은 좀 섬뜩했다. 늘 친절해 보이는 꽃 뜯는 괴짜 같지 않게. 라틸은 대답하는 대신 질문했다.
“그녀가 누군데?”
“세 번 나를 배신해도 세 번 내게 왔음에 감사하게 되는 여자.”
“!”
“네 번 배신해도 좋으니 한 번 더 와주길 기다리게 되는 여자.”
그러나 섬뜩한 표정과 다르게 기르골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눈물이 배어 있어 축축했다. 게다가 저 절절한 말은 뭐고?
’혹시 그 여자가 도미스인가?‘
라틸은 자신이 본 기르골의 과거를 통해 추측해 보았으나, 도미스는 누군가를 배신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자신을 버린 양부모에게도 제대로 싫은 기색조차 드러내지 못하던 이였으니.
“…….”
잠시 기르골의 시선이 뜯어버릴 듯 라틸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기를 잠시. 곧 그의 입가에 평소 같은 미소가 돌아오더니, 기르골이 휙 돌아서며 아까 내려놓았던, 이미 다 식어버렸을 게 분명한 찻잔을 집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아가씨. 아가씨가 우리의 수업 교재를 탈출시켜 버렸으니.”
* * * 사디가 돌아가자 기르골은 정원으로 나가 쪼그리고 앉더니, 흙 위에 손가락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기를 3분여 정도. 기르골의 눈이 흉흉하게 변하더니, 그는 이름을 손으로 한 번에 지워 버리고 어딘가로 뛰쳐나갔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달아나는 헤움의 앞쪽이었다.
“네가!”
헤움이 대체 그쪽은 언제 온 거냐고 묻기도 전에, 기르골은 이번엔 장난치지 않는다는 듯 대번에 달려들더니 헤움의 목을 그대로 뜯어버렸다. 이윽고 목을 들어 올린 기르골은 두 손으로 그 머리를 받쳐 올려다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 도련님. 그래서 궁금하네. 도련님 연인은 도련님을 구해줄까?”
말을 마친 기르골은 머리를 나무 위에 던져두더니, 머리를 잃고 허우적 돌아다니는 몸을 힐긋 보고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섯 시간 뒤.
“잘린 몸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고?”
가면을 벗고 궁전에 돌아온 라틸에게 그 ’머리 없는 몸‘ 이야기는 바로 보고로 들어갔다.
“네. 사냥꾼이 보고 놀라 신고를 했고, 병사들이 달려가 잡았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식시귀이겠지요. 어찌할까요?”
라틸은 헤움을 떠올렸으나 곧 그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보내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는 머리가 온전히 몸에 붙어 있었으니…….
“죽여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