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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내 깃털을 주겠소 (202/367)

203화. 내 깃털을 주겠소2022.02.06.

아이니는 헤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대적자라니. 전생에 로드였고, 나이트의 연인이었던 자신이 지금에 와서 대적자라니. 게다가 현생의 자신은 강하지도 않은데?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16551125407158.png“그럼 대적자가 둘이란 거야?”

16551125407166.png“말했다시피, 난 이런 건 잘 몰라. 내가 느낀 대로 말한 거다.”

아이니는 무어라 더 물으려다가, 칼라인이 사디는 절대로 대적자가 아니라고 확신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럼 사디가 대적자가 아니라면…….

16551125407158.png‘진짜 내가 대적자인가?’

아이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16551125407158.png‘아니.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기르골도 날 죽이려 들었잖아. 기르골은 대적자를 가르친다며. 내가 대적자라면 그가…….’

젠장. 아이니는 어떻게든 자신이 대적자가 아닌 이유를 찾으려다가 생각을 멈추고 속으로 욕을 뱉었다. 기르골을 만날 때 그녀는 현생의 모습이 아니라 전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르골은 거기에 휩쓸려서 몰라본 걸지도 몰랐다.

16551125407158.png“말도 안 돼.”

말과 달리 아이니는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대적자일지도 모를 가능성만 올라가자 심란해져서 무덤가에 그대로 털썩 앉아버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16551125407158.png‘그래. 내가 대적자라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라.’

칼라인의 적은 대적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대적자라면, 자신은 절대로 칼라인의 적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이 칼라인을 노리지 않는다면, 그러면 되는 거니까. 마침내 생각을 마친 아이니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헤움은 그 표정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16551125407166.png“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니 다행이다.”

헤움이 자신을 보며 웃자 아이니는 반사적으로 다시 정색하고서 부탁했다.

16551125407158.png“아버지 부탁으로 날 찾았단 건, 아버지랑은 계속 연락하고 있다는 거야?”

16551125407166.png“그래.”

16551125407158.png“그러면 아버지한테 말 좀 전해줘.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16551125407166.png“네가 실종된 일로 카리센이 시끄럽던데.”

16551125407158.png“카리센은 황자님, 당신이 죽었다 깨어난 후로 내내 시끄러웠어.”

16551125407166.png“!”

헤움의 표정이 흔들리자 아이니의 마음도 덩달아 죄책감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아이니는 죽은 레들러의 시체를, 좀비가 되어 나타난 옛 친구를 떠올리고서 그 동정심을 옆으로 밀어내 버렸다. 다리에 힘을 준 아이니는 오랜 시간 쪼그리고 있던 탓에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내려두었던 등잔을 챙겨 돌아섰다. 헤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16551125407166.png“사디가 대적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에게 특별한 힘이 있는지 아닌지는 한 번 더 확인해 보겠다.”

아이니가 돌아보자, 그는 지나치게 간절해 보이지 않도록 파랗게 웃으며 물었다.

16551125407166.png“결과는 어디로 가져가면 좋을까, 레이디 아이니?”

자신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기뻐하고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 헤움은 최대한 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보려 노력했다. * * *

16551125436066.png“그리핀은? 그러고 나서는 더 안 나타났어?”

하렘에 들러 대신관과 식사를 한 다음 돌아가는 길, 라틸은 백화에게 물어보았다. 백화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16551125436071.jpg“말씀을 듣고 열심히 수색하고 있지만,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성기사들도 마찬가지고요.”

16551125436066.png“이상하네. 왜 그러지?”

16551125436071.jpg“혹시 클라인 님이 뭘 잘못 보신 건 아닐까요?”

백화가 차마 ‘폐하와 클라인 님이 뭘 잘못 보신 건 아닐까요?’라고 묻지 못하고 라틸에 대한 부분을 쏙 빼고서 묻자, 라틸은 어깨를 으쓱했다.

16551125436066.png“그럴 수도 있지.”

속으로는 ‘절대 아냐’라고 생각했으나 라틸은 우기는 대신 자연스럽게 넘겼다.

16551125436066.png“하지만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좀 더 신경 써서 살피게. 그리핀이 아니라도 다른 괴물이 보일 수도 있고.”

16551125436071.jpg“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하렘 출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라틸은 회랑을 따라 나가려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오늘은 평화로운 호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16551125436066.png“혹시 그리핀에 대해 내게 알려줄 말은 없나? 주의점이라던가.”

그리핀이 클라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라틸 자신의 눈에만 보인 적이 있기에 묻는 것이었다. 또 그때처럼 다른 사람들은 그리핀을 못 보는데 자신만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백화는 라틸의 질문에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16551125436071.jpg“전설처럼 전해지는 거라 저도 뭐가 사실인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16551125436066.png“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낫겠지. 감안하고 듣겠네.”

16551125436071.jpg“네.”

16551125436071.jpg“소문으로는, 그리핀이 뱉는 말 중 90%는 다 거짓말이라 합니다.”

16551125436066.png“아. 그래?”

16551125436071.jpg“네. 헛소리로 사람들을 꾀어낸다고 하지요.”

16551125436066.png“아, 그렇군. ……그런데 사람들을 발견하면 죄다 낚아채 던진다면서. 어떻게, 안 낚아채고 대화 나눈 사람들도 있긴 있나 보지?”

백화는 잠시 고개를 기웃하더니, 떨떠름하게 웃었다.

16551125436071.jpg“전설 같은 이야기라 그런 부분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16551125436066.png“아아. 그래. 뭐가 사실인지 모른다 했지.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라틸은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왜 맞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응접실을 지나 침실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끌릴 듯 말 듯 하는 망토를 벗고 시녀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 지시했다. 목욕물이 준비될 동안 라틸은 창가에 안락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최근에 내내 읽는 책을 꺼내 무릎에 펼쳤다.

16551125436071.jpg“폐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15분 정도가 지나자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알렸고, 라틸은 그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했다. 편하게 몸을 담그고 있을 거라 당장 목욕 시중을 받진 않을 생각이었다. 시녀들이 나가자 라틸은 읽던 책의 페이지 끝까지 마저 읽은 다음 아쉬워하며 눈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몸을 돌리다가 놀라서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16551125436066.png“!”

라틸은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전에 그…… 클라인 창문에 붙어 있던 그 쪼끄만 그리핀. 백화의 추측에 따르자면 새끼 그리핀. 그 그리핀이 지금 라틸의 창문에 있었다. 좀 서러운 표정으로.

16551125436066.png“아…….”

라틸은 사람을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온갖 흉흉한 소문을 다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사자 꼬리가 달린 새 같을 뿐이라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가장 위험한 방심일지도 모르지만. 라틸이 창문을 슬그머니 열자, 그리핀은 도망치는 대신 조용히 라틸을 지켜보았다. 라틸은 이상하게 그 새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너무 작아서 그런가. 그 순간. 라틸을 서럽게 바라보던 그리핀이 갑자기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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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25436066.png“왜, 왜 우니?”

라틸은 당황해서 상대가 그리핀인 것도 잠시 잊고 말을 걸었다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단 걸 바로 깨달았다. 그러나 질문을 듣자마자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16551125492701.jpg[아이구우 우리 로드.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요!]

새끼 새 입에서 나오기에는 꽤 구수한 목소리로. 라틸이 당황해서 눈썹을 치켜뜨자 새끼 그리핀은 라틸은 물끄러미 보더니, 궁뎅이에 달린 사자 꼬리로 창틀을 탁탁 두드리며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16551125492701.jpg[내 로드를 많이 기다렸습니다. 엉엉 울면서 기다리다가 목이 이리 쉬었습니다요.]

16551125436066.png“너, 목소리가 굵직…… 아니, 목소리가 아니라, 말을…… 하네?”

라틸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지금 그리핀이 말하는 게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 이게 문제가 아니라…….

16551125436066.png‘저 새가 지금 날 뭐라고 부른 거야? 로드?’

입을 몇 번 달싹이고 있자니 그리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16551125492701.jpg[내가 아직 몸땡이가 좀 작습니다, 로드. 하지만 250년만 기다려주면 이 몸도 곧 커질 테니, 아모 염려 마십시요.]

250년이면 죽고 없겠다. 아니, 250년이 문제가 아니라…….

16551125436066.png“로드라니? 나더러 로드라 한 거야?”

얼마나 당황했던지 라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그리핀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

16551125492701.jpg[로드가 아니세요?]

16551125436066.png“아닌데요.”

라틸은 대답을 하면서도 심장이 철렁했다. 로드일 수도 있단 가능성을 어렵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로드가 타고 다닌다는 새가 자신을 찾아와 로드라 부르다니. 라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야. 나 진짜 로드인가? 그러면 기르골이 뭘 잘못 안 건가?

16551125436071.jpg-소문으로는, 그리핀이 뱉는 말 중 90%는 다 거짓말이라 합니다.

백화가 한 말이 귓전을 어른거린다. 그러면 지금 저 그리핀은…… 거짓말을 하는 건가? 날 꾀기 위해서? 그런데 설마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려나? 로드의 부하라면서? 저 말이 10%의 진실이 아니란 건 어떻게 알고? 심장이 쿵 쿵 울릴 때마다 라틸은 자신의 몸이 푹신한 카펫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라틸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도달한 그 순간.

16551125492701.jpg[어라? 참으로 로드가 아니시오?]

그리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16551125436066.png“어? 어어. 아닌데.”

그러고는 라틸이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부리와 다리를 벌리더니 몹시 부끄러워하며 사과했다.

16551125492701.jpg[아이구우. 미안하오. 로드인 줄 알았소.]

16551125436066.png“어?”

사람을 긴장 속에 홀랑 빠뜨려 놓고서는. 그리핀은 사과 한마디를 찍 날리더니, 자기 깃털 하나를 똑 뽑아 내밀며 재차 사과했다.

16551125492701.jpg[미안하니 주겠소. 예쁘니 장식하면 좋을 거요.]

별 쓸모도 없어 보이는 깃털 하나만 남긴 채 그리핀이 휭 날아가 버리자 라틸은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멀어져가는 사자 꼬리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사자 꼬리는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남아 있는 건 예쁘니까 장식하라며 주고 간 깃털 하나뿐. 라틸은 멍하니 그 깃털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16551125436066.png“그럼 내가…… 대적자 쪽인가?”

로드 쪽이라면 아니란 말 한마디에 로드를 모신다는 새가 저렇게 가버릴 리는 없겠지? * * * 다음날. 라틸은 멍하게 앉아 어제 다녀간 그리핀에 대해 생각하다가 새벽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아침 식사까지 생략하고서 그리핀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다. 결국 라틸은 도서관에서 나와 평소처럼 업무를 보았다. 그러나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부터는 좀 달랐다.

16551125436066.png‘일단 기르골한테 강해지는 건 배워야지.’

그와 약속한 게 있으니까. 전에 그가 안내한 저택 미로를 간단하게 빠져나와 버린 후. 기르골은 ‘사디’가 생각보다 수준이 더 높다면서, 훈련 내용을 바꿀 테니 며칠 후에 보자고 했다. 그 날짜가 오늘. 그러니 가야 했다.

16551125436066.png‘가서 그리핀에 대해 물어봐도 괜찮겠지?’

생각을 마친 라틸은 우선 해야 할 업무를 마친 뒤. 자신의 비밀 장소로 가 가면을 쓰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궁전을 빠져나왔다. * * *

16551125436071.jpg“어, 우리 제자님.”

약속 장소는 그날의 그 미로 저택이었다. 기르골은 저택 안이 아니라 마당에 있었는데, 라틸이 다가오자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평소보다 좀 즐거워 보여서 라틸은 의아해졌다.

16551125436066.png“무슨 좋은 일 있어?”

평상시에도 즐거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유달리 재밌어하는 얼굴이라 라틸이 묻자, 기르골은 흐뭇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16551125436071.jpg“우리 제자님을 위한 스페셜 디저트를 찾았어.”

16551125436066.png“설마 또 꽃이야?”

16551125436071.jpg“그럴 리가. 제자님이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될 디저트지. 먹는 건 아냐.”

16551125436066.png“그게 뭔데?”

설마 미로를 더 복잡하게 꼬아 놨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수상쩍어하고 있자니 기르골이 일전의 그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또 뒤에서 가두는 거 아닐까…… 의심하면서 라틸은 철저하게 기르골의 뒤를 따라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의도는 아닌지 기르골은 들어가자마자 먼저 앞서 걸어갔다. 그래도 라틸은 조심조심 뒤를 따랐다.

16551125436066.png‘얼핏 보는 건데도 이전과 미로 배치가 바뀌었어.’

그러다 기르골이 어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멀쩡한 실내가 나타났다. 뒤틀리지 않은 공간. 그래도 경계를 풀지 않고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기르골이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

16551125436071.jpg“제자님, 식시귀와 싸워본 적 있다 했지?”

16551125436066.png“어? 아아. 어.”

라틸은 대답하다가 무언가를 눈치채고서 물었다.

16551125436066.png“혹시 식시귀를 붙잡아 둔 거야? 나더러 싸워보라고?”

16551125436071.jpg“눈치가 빠르네.”

기르골은 감탄하더니, 소파 뒤로 걸어가 그곳에 묶여 있는 무언가를 일으켜 세우며 웃었다.

16551125436071.jpg“식시귀부터 퇴치해 봐. ‘대적자의 검’으로.”

16551125436066.png“그러지 뭐.”

라틸은 별생각 없이 벽에 걸린 대적자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 들고 식시귀를 보고 서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1125436066.png“!”

기르골이 붙잡고 있는 그 식시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전에 카리센에서…….

16551125436066.png“헤움 황자?”

라틸이 중얼거리자, 기르골이 붙잡은 식시귀의 목을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

16551125436071.jpg“좀비나 하나 구해올까 했는데. 마침 앞을 지나가고 있더라고. 퇴치해봐, 제자님. 참고로 목은 잘라도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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