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혼란2022.02.02.
“거대한 공동?”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라틸은 ‘긴급/신속’과 ‘여유’ 사이에 끼어 들어온 보고서를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대한 공동이라니?”
보고서를 분류하면서 먼저 간단하게 한 차례 읽어본 시종장이 대답했다.
“말 그대로, 멀쩡한 땅에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답니다. 쇼드 플리에요.”
“이유는…… 모르겠다고 되어 있네요. 원인불명.”
“네. 게다가 깊이도 깊어서, 수색대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답니다. 이전이라면 보냈을 텐데, 혹시 그게 최근 벌어지는 좀비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시종장은 라틸이 펜을 손안에서 굴리면서 신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도움을 청한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심상치 않은 기미가 보인다면 분명 도움을 청할 겁니다.”
“그렇군요. 도움을 줄지 말지, 준다면 어느 정도로 줄지, 미리 정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고개를 끄덕인 라틸은 서류 끝에 ‘회의’라고 쓴 다음 다른 비서에게 건넸다. 그 비서가 라틸에게 받은 서류를 쨍한 노란색의 밝은 상자에 담는 사이, 라틸은 다음 서류를 위쪽에서 들춰냈다.
“…….”
곧 라틸의 표정은 종이 사이에 깔려 죽은 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변했다.
“하이신스.”
하이신스가 보낸 편지가 끼워져 있어서. 시종장은 라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폐하?”하고 불러보았다.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이별 당시보다는 하이신스를 대하는 게 한결 편해지긴 했는데. 그래도 한 번씩 그의 흔적이 나오면 이렇게 흠칫하게 된다. 잠시 표정이 굳은 건 그 때문에 나온 반응일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마음을 다독인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편지 봉투에 벌겋게 달라붙은 밀랍을 칼로 잘라내고 편지를 꺼냈다.
“응?”
그런데 봉투를 열자마자 안에서 아주 작은 무언가가 떨어져 서류 위에 안착했다. 라틸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눈 가까이 가져갔다. 반지였다. 작은 반지. 새끼손가락에도 안 맞을 것처럼 조그마한 반지.
“이게 뭐야.”
이걸로 뭐 하라고. 라틸은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면서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사이즈가 생각이 안 나서…… 내 기억을 되살려서 맞춰봤어. 너무 큰가? 생일 축하해, 라틸. 직접 얼굴 보고 축하해줬으면 좋겠는데. 이젠 그것도 어렵네. 이 자식이 장난하나? 라틸은 황당해서 다시 반지를 집어 들었다. 쓸쓸해 하는 문장으로 가득 찬 편지와 달리 반지는 너무나도 조그마했다. 옛 시절을 떠올리면서 만들었다고 해도 역시 조그마했다. 그때 이미 라틸은 키는 다 큰 후였고, 손가락 사이즈도 지금과 비슷하니까. 하지만 이 반지는 대여섯 살 정도나 되어야 맞을 크기.
“놀리는 거지, 이거?”
라틸이 시종장에게 오른손으로 편지를 흔들어 보이며 묻자, 시종장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런 거 같은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 순간. 왼손에 들고 있던 편지 봉투가 아래로 향하면서 안쪽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떨어진 ‘무언가’는 팽그르르 굴러가다가 한 비서의 발치에 부딪혀 멈추었다. 비서는 놀라서 얼른 그걸 잡아든 다음 손수건으로 삭삭 닦고서 라틸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폐하. 이게 떨어졌습니다.”
라틸은 비서가 건넨 ‘무언가’를 받아 들다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것도 반지였다. 지나치게 작은 반지가 아니라 제대로 라틸에게 맞을 것 같은 반지. 백금으로 세공된 반지는, 하이신스가 연애할 때 만들어 준 그 풀잎 반지 같은 정교한 모양새였고, 뭘 어떻게 한 건지 실제로 풀 향이 났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본 라틸은 그 크기가 자신의 손에 정확히 맞자 황급히 반지를 도로 빼버렸다. 라틸과 하이신스의 사이를 아는 시종장은 착잡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으나,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기에 서로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하는 눈짓만 주고받았다. 라틸은 반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서 사람들에게 다들 나가란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비서 하나가 유심히 바라보다가 얼른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자리를 빠져나간 비서가 향한 곳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동떨어진 정원 한구석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비서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낸 다음 품 안에 넣고 다니는 휴대용 펜을 꺼냈다. 그는 뚜껑을 입에 물고서 수첩을 손바닥에 들고 그 위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워낙 흔들리면서 쓴 터라 글씨는 갓 필기를 배운 아이들이 쓴 것인 양 삐뚤거렸지만, 그래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비서는 수첩 맨 위 종이를 뜯어서 바위 아래에 둔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40여 분 뒤. 그곳에 다른 사람이 다가와 그 종이를 가지고서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 사람이 달려간 곳은 하렘 안. 클라인의 방에 딸린 정원이었다. 그 사람이 나타나자 화단에 물을 주던 바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새 새로운 소식이 있어?”
“예. 여기요.”
심부름꾼이 쪽지를 내밀자 바닐은 품 안에서 오만 바르트를 꺼내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심부름꾼이 꾸벅 인사하고서 달려가자, 바닐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자님. 새 소식이 왔습니다.”
방 안에서는 클라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여기요.”
바닐이 가져온 쪽지를 내밀자 클라인은 검을 옆에 내려두고 그것을 받아 펼쳤다. 바닐은 쪽지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클라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는데.
“…….”
하지만 쪽지를 확인한 클라인의 표정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황자님?”
나쁜 소식인 걸까. 바닐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클라인은 대답 대신 쪽지를 찢어서 휴지통에 넣고는 검을 다시 벅벅 닦기 시작했다. 그 거친 손놀림에 천에 피가 묻어 나오자 바닐은 기겁해서 펄쩍 뛰었다.
“황자님! 손이! 그만 하세요!”
바닐이 매달리자 클라인은 바로 검을 놓았지만, 치료를 받는 대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감싸고 무릎에 팔을 괴었다. 그의 어깨가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하자 바닐은 슬그머니 쪽지 안을 보았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하이신스 폐하께서 편지와 선물을 보내심. 그걸 본 폐하께서 이상한 반응을 보이심.
“바닐.”
클라인이 그를 부르자 바닐은 쪽지에서 눈을 떼고 황급히 “네.” 하고 대답했다. 클라인은 여전히 머리를 손에 대고 있었고,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는 손목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네, 황자님.”
바닐이 재차 대답하자 클라인이 힘없이 물었다.
“역시 폐하는 아직 형님을 좋아하는 거지?”
“!”
* * * 그 시각. 아이니는 짙은 늪 색의 뻣뻣한 풀들이 커다란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는 황량한 무덤가에 서 있었다. 그 곁에는 어두운색 옷을 입은 헤움 황자가 회색 묘비에 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연락해줘서 고맙다.”
헤움 황자가 쓸쓸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말에 아이니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부탁할 게 있어서 한 거야.”
아이니는 사디가 대적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헤움 황자를 찾기로 마음을 먹긴 했으나, 막상 찾으려고 하니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사람도 아니고 ‘식시귀’를 대체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저쪽에서도 아이니를 찾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만나기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네가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니 좋다.”
일부러 뚱하게 말했는데도 헤움 황자가 웃으면서 받아들이자 아이니는 입술을 깨물고서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친구를 죽인 그를 냉대하고 싶은데, 자신이 사랑한 헤움과 저 괴물 헤움은 다른 존재라 생각하는데. 그가 자꾸 저런 식으로 나오니 ‘사랑한 헤움’이 떠올라 마음이 욱신거렸다. 아이니는 헤움과 더 말을 섞으면 그의 간교한 다정함에 더욱 마음이 쓰릴 것 같아서, 일부러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가 왜 자기를 찾은 건지, 어떻게 지낸 건지, 하나도 묻지 않기 위해서.
“전에 카리센에서 연회 때. ‘사디’란 여자랑 싸운 거 기억해?”
“기억나지 않을 리가. 그 많은 사람들…… 대부분 내 얼굴을 아는 귀족들 앞에서 그 망신을 당했는데.”
“거기서 싸운 게 망신인 건 아는구나.”
“!”
“식시귀가 되면 다 이렇게 변하는, 아니. 이런 얘기 하려는 게 아니지.”
“…….”
자신도 모르게 헤움 황자에게 ‘누가 봐도 위엄 있던 헤움이 왜 이렇게 평범한 괴물이 되어버렸냐’고 물으려던 아이니는 그와 이런 이야기도 섞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그 여자. 혹시…… 대적자야?”
헤움은 아이니의 질문에 곤란해졌다. 다가 공작이 한 말이 떠올라서. 아이니에게 자신이 느낀 그대로,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할지 다가 공작의 의견을 따라주어야 할지 판단이 빠르게 서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볼 땐 대적자 같은데. 이런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잖아.”
아이니가 재차 물었지만, 헤움은 고민하느라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니는 차가운 대리석 묘비를 손으로 몇 번 가볍게 두드리며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헤움은 다가 공작의 무서운 계획을 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대적자를 가려낼 능력은 없어.”
“정말이야? 하지만 그때 사디와 싸우다가 도망갔잖아. 무척 놀란 표정을 짓고서.”
“사실이다, 아이니.”
“…….”
“다만, 그 여자에게서 강렬한 느낌을 받긴 했어. 정체 모를 두려운 느낌을.”
“다른 사람한테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 없다면 그 여자가 역시 대적자가 아닐까?”
“다른 사람한테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서.”
“정말이야? 그게 누군데?”
그러면 정말로 사디는 대적자가 아니라는 건가? 누구라도 그런 힘이 있을 수 있는 건가? 타고나기만 한다면? 의아해서 묻는 아이니를, 그가 사랑한 맑은 눈동자를 보다가 헤움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말에 아이니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식시귀를 쫓을 힘은커녕 무술에 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강한 사디와 같은 힘이 느껴진다고?
“말 그대로. 그 사디란 여자와 정반대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 너한테.”
“그게 가능해?”
“나도 모르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이런 건 잘 모르니까.”
헤움은 아이니의 당황한 표정을 쳐다보다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다가 공작이 널 찾고 있다. 다가 공작은…… 오히려 네가 대적자라 확신하고 있거든. 그리고 이 점을 이용해 하이신스 황제에게서 널 지켜낼 생각인 거 같더라.”
아이니는 눈을 멍하게 깜짝이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비석에 몸을 기대고 말았다. 헤움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다가, 핏기없는 자신의 손을 보고는 감추듯 손을 도로 물렸다. 한 번 죽어 온기를 잃은 자신이 닿기에 그녀는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기에. 그는 아이니의 떨리는 속눈썹을 그저 마음 아프게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애타는 마음을 아이니는 같이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이니는 몹시 혼란스러워서 지금 제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로드였고, 그녀가 사랑한 칼라인은 대적자와 성기사들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다. 사실 대적자와 관련된 부분은 거의 직접적인 기억이 남아있지 않지만, 칼라인이 고생을 했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전생에 로드인 자신이 지금 대적자일지도 모른다고? 칼라인의 적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