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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화. 티가 안 나는 사랑? (200/367)

201화. 티가 안 나는 사랑?2022.01.30.

타시르의 아양에 당황한 시종과 비서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단 한 명.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타시르를 보고 있는 시종장을 제외하고. 라틸은 얼결에 들어와서는 공개 집무실 안을 초토화시킨 타시르의 팔을 보듬으면서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얘는 왜 갑자기 여기 와서 이래. 요즘 너무 안 찾아갔나? 물론 귀엽긴 한데. 아니, 그보다 후궁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비밀리에 얘기 나눈 게 아니라지만 너무 빨리 퍼진 거 아닌가?

16551125035604.jpg“폐하?”

그러고 있자니 타시르가 꿀칠을 한 것 같은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로 부르며 라틸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비볐다. 마치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발톱을 감춘 채 작은 고양이를 흉내 내는 표범처럼. 용기를 내어 다시 이쪽을 보려던 비서들이 동시에 다른 방향을 쳐다보자, 라틸은 그게 너무 웃겼다.

1655112503561.jpg“타시르. 진정해라.”

어쨌든 오해는 풀어야 하기에 라틸은 웃음을 참느라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112503561.jpg“거절할 생각이니까.”

타시르는 책상에 걸터앉아 라틸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뜻밖인지 눈썹을 치켜올렸다.

16551125035604.jpg“거절하신다고요?”

1655112503561.jpg“어.”

카리센에 후궁을 보내라 요구한 건 하이신스를 물 먹이려는 의도가 큰 거였고.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면, 타리움에서는 굳이 외국 출신 후궁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정략적으로도. 우호적인 국가들과는 계속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흑마법사 건이 터지면서 타리움의 위상이 한층 더 올라갔기 때문이다. 라틸이 대신관을 후궁으로 두면서 성기사들이 덩달아 이쪽으로 와 버리는 바람에. 가만히 있어도 다른 나라들이 타리움에게 잘 보이고 싶어 눈치를 보는 상황인데, 굳이 외국에서 후궁을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 라틸이 온갖 미남이란 미남은 손안에 넣고 싶어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테지만, 아직은 여섯 명으로도 충분하고.

1655112503561.jpg“난 순애보야 순애보.”

16551125035604.jpg“순애보시군요.”

타시르가 영혼 없이 웃으면서 수긍하자, 라틸은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다. * * * 황제가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하고 타시르가 밖으로 나오자, 히얼란은 주위에 아무도 없어질 때까지 말없이 따라 걷다가 인적이 없어지자마자 얼른 물었다.

16551125035634.jpg“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소단주. 왜 갑자기 말을 바꾸셨어요?”

16551125035604.jpg“그냥.”

16551125035634.jpg“그냥이요? 소단주가 그냥 한 일에 저는 충격 받은 건가요?”

아까는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그냥 말을 바꾼 거라고? 히얼란이 좀 억울해서 항의하자, 타시르는 뒷짐을 지고 눈웃음을 지으며 소리 없이 미소했다.

16551125035604.jpg“막상 얼굴을 마주했는데. 차마 안 나가더라. 다른 남자를 후궁으로 들이시란 말이.”

16551125035634.jpg“왜일까요?”

16551125035604.jpg“그러게. 왜일까.”

소단주…… 혹시 폐하를 좋아하세요? 히얼란은 문득 치솟는 질문에 타시르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소단주는 항상 그렇듯 습관처럼 웃고만 있었다. 그 얼굴을 보아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변화가 왔는지 알아보기 힘들었기에 히얼란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잘 알 수 없었다. 소단주가 황제를 좋아하게 된다면, 이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하렘 안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지나가는 타시르를 클라인이 삐딱하게 붙잡았다,

165511250507.jpg“야, 상인.”

명백하게 시비를 거는 목소리. 히얼란이 걱정스레 쳐다보자, 클라인 황자가 팔짱을 끼더니 건들거리며 다가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165511250507.jpg“욕심 없는 척 굴더니. 너 아주 꼬리 치는 솜씨가 개 저리 가라더라?”

타시르가 황제를 찾아가 뭘 하고 왔는지 다 안다는 태도였다. 히얼란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아니, 조금 전에 꼬리 치고 왔는데 어떻게 그사이에 이 이야기가……? 누군가 타시르가 꼬리 치는 걸 보자마자 달려와서 클라인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속도 아니던가.

16551125035634.jpg‘폐하의 비서, 시종, 집무실 경비 중에 클라인 황자의 지지자가 있는 건가?’

놀란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클라인 황자의 흉흉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웃고는 있는데 절대로 웃는 게 아닌 표정. 이마에 파랗게 핏줄이 올라와 있어서, 이를 꽉 악물고 있단 게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

165511250507.jpg“친구? 우리가 친구라고? 넌 친구 아내한테 꼬리부터 치나 봐?”

하지만 클라인이 화를 내는데도 타시르는 평온했다.

16551125035604.jpg“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황자님. 다른 후궁이 안 온답니다.”

165511250507.jpg“뭐? 진짜야?”

아무래도 클라인 황제에게 타시르의 꼬리 치기를 알린 사람은, 결과는 보고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클라인이 후궁이 안 온단 소식에 좋아해야 할지, 그래도 내던 화를 마저 내야 할지 혼란에 빠진 사이. 타시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클라인 황자의 어깨를 감싸더니 방긋방긋 웃었다.

16551125035604.jpg“네.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쁘던지.”

165511250507.jpg“흠. 그건 다행이긴 한데.”

16551125035604.jpg“물론 그런 나라 왕자 따위, 와봐야 우리 클라인 황자님과는 비교도 안 됐겠지만요.”

165511250507.jpg“흠. 그건 그렇긴 한데.”

16551125035604.jpg“그래도 안 오는 게 좋으니까요. 위협적이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165511250507.jpg“그렇지. 귀찮지.”

클라인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고 있자니, 타시르가 히얼란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히얼란은 안도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어찌어찌 넘어갔나 봐. 그러면서 보니, 저만치 호숫가에 쪼그리고 앉은 대신관의 등판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운동을 하지도 신에게 야호를 하지도 않는, 어쩐지 좀 위축된 등판.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히얼란은 잠시 궁금해졌지만, 타시르와 클라인이 어느새 같이 체스를 두러 가고 있기에 얼른 호기심을 접고 그 뒤를 따라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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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얼란이 보았던 등판은 대신관의 등판이 맞았고, 그가 평소보다 좀 위축된 것도 맞았다.

16551125064574.jpg“구벨아.”

16551125035634.jpg“네, 대신관님.”

16551125064574.jpg“마음이 어지럽다.”

16551125035634.jpg“대신관님…….”

16551125064574.jpg“클라인 황자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구나. 신의 이름을 팔지 못하는 난…… 고지식한 건가?”

긴급회의 때 클라인이 ’그쪽은 고지식해서 도움이 안 된다‘면서 ’신의 이름을 파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던진 말 때문이었다. 말 자체는 사실 클라인이 다른 후궁들에게 던져대는 데 비하면 나름 순화된 버전이었으나, 대신관에겐 그조차 나름 충격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번 사건 때 혼자서만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니까. 구벨은 얼른 손을 저었다.

16551125035634.jpg“신경 쓰지 마세요, 대신관님. 이 시기에 폐하께 가장 도움 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대신관님입니다. 아시잖아요. 그리고 신의 이름을 파는 건 고지식한 게 아니라 사기인데요.”

16551125064574.jpg“폐하를 위해서는 신의 이름 정도는 팔아야 하는 걸까?”

16551125035634.jpg“안 되죠! 사기라니까요?”

구벨은 기겁해서 고함을 질렀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빠르게 했다.

16551125035634.jpg“그러고요, 자이신 님. 후궁이 더 안 들어오는 게 폐하를 위한 거예요? 그냥 후궁들 자기들을 위한 거죠?”

16551125064574.jpg“그런가.”

16551125035634.jpg“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평소처럼 운동이나…… 아. 새로 나온 덤벨 보실래요? 누가 선물로 보냈어요.”

16551125064574.jpg“중량이 몇이지?”

  * * * 새 후궁이 온단 소식이 돌았으니 아마 다른 후궁들도 기분이 좋지 않겠지. 타시르가 올 정도면 분명 다들 침울해 있을 거야. 괜찮다고 좀 달래주어야겠다. 급한 일 위주로 마무리한 라틸은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바로 하렘으로 들어섰다. 다른 후궁들을 한 번씩 돌아보면서, 새 후궁이 오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알려줄 셈이었다.

1655112503561.jpg’응?‘

그런데 걸어가고 있자니 호숫가에 대신관이 쪼그리고 앉은 게 보였다. 곁에서는 대신관의 시종이 쩔쩔매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평소와 전혀 달라 이상했다.

1655112503561.jpg’왜 저러고 있지?‘

라틸이 아는 대신관이라면 지금쯤 상체를 탈의하고 열심히 뛰어다녀야 하는데. 저렇게 시무룩하게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의아해서 다가가 보니, 대신관이 하염없이 털어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1125064574.jpg“난 쓸모가 많은 사람인데. 폐하께도 쓸모가 있는지 자신이 없다.”

아니, 쟤는 왜 갑자기 저렇게 우울해하고 있어? 새 후궁이 온단 소식 때문에 그런가? 자기가 쓸모가 없어서 새 후궁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나? 의아한 한편, 늘 밝은 대신관이 저렇게 움츠리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라틸은 뒤에서 대신 대답했다.

1655112503561.jpg“많은데.”

대신관과 구벨이 깜짝 놀라 동시에 몸을 돌리다가, 라틸을 발견하자 정반대의 행동을 보였다. 구벨은 꾸벅 인사를 했고 대신관은 벌떡 일어섰다.

1655112503561.jpg“우리 근육이가 오늘은 왜 이렇게 침울하지? 근손실이 왔느냐?”

라틸이 놀리면서 대신관의 팔을 잡자, 구벨은 옆으로 조금 비켜나고 대신관은 끌리듯 같이 앉았다. 라틸은 여전히 탄탄하고 두껍고 듬직한 그의 팔을 슬그머니 찔러보았다.

1655112503561.jpg“음. 내가 볼 땐 괜찮아 보이는데.”

16551125064574.jpg“근육 때문이 아닙니다, 폐하.”

1655112503561.jpg“그러면? 혹시 누가 괴롭히느냐?”

대번에 라틸이 “클라인?”하고 묻자, 구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대신관은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다. 구벨은 자기가 다 억울해져서 씩씩거렸으나 대신관은 재차 그런 건 아니라고 부정했다.

1655112503561.jpg“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해 있어? 네가 우울해 있으니 이상하다.”

16551125064574.jpg“저는…….”

대신관은 주저하다가 지금 하는 고민이 아니라 평소에 가끔 생각하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16551125064574.jpg“저는 늘 사랑받는 사람이어서 누구를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1655112503561.jpg“그래?”

16551125064574.jpg“네. 그렇다 보니 이 상황이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심란한 거지, 절대로 누가 절 괴롭힌 게 아닙니다.”

하긴. 널 괴롭힐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라틸은 주먹 한 번에 적을 기절시키던 대신관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면서 팔을 슬쩍 흔들었다.

1655112503561.jpg“우리가 만나고 있지 않을 때도 나는 늘 널 사랑해. 그러니 심란해하지 말거라.”

게다가 넌 보호 받기 위해 여기에 온 거지, 어차피 진짜로 후궁 역할을 하러 온 건 아니잖아. 라틸은 이 말은 삼켰다.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해하는데, 이런 말을 하면 대신관이 민망해할까 봐. 어쨌건 본인은 나름대로 큰 각오를 했는지, 첫날밤에 옷부터 벗어젖히지 않았던가.

16551125064574.jpg“사랑을 보내지만 제 눈엔 보이지 않는 겁니까. 제가 모시는 이들은 모두 같은 사랑을 주시는군요. 신도 폐하도.”

1655112503561.jpg“!”

16551125064574.jpg“제가 그런 사랑에 익숙해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대신관이 아까의 우울한 기색 없이 씩 웃으면서 라틸을 보자, 라틸은 문득 자신이 바쁘단 이유로 다른 후궁들을 너무 팽개친 건 아닌가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뱀파이어니 대적자니 하는 데 놀라서 거의 칼라인과만 만나지 않았던가. 게다가 한가해지면 하렘에 오는 대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 ’사디‘라는 가면을 쓰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만 했다. 라틸은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들었다. 단순히 함께 밤을 보내는 문제가 아니라, 후궁들과 소소하게라도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라틸이 조금 자책하면서 자리를 떠난 후. 대신관은 대신관대로 자기가 한 말에 실수가 있나 자책하면서 구벨에게 물었다.

16551125064574.jpg“구벨아! 내가 폐하를 비난하는 것 같았을까?”

16551125035634.jpg“화나신 것 같진 않던데요.”

16551125064574.jpg“웃으면서 왔다가 우울해서 가셨는데. 혹시 내 말을 오해하신 게 아닐까?”

16551125035634.jpg“오해할 부분이 어딨다고요.”

16551125064574.jpg“그래도…….”

고민하던 대신관은 신경이 쓰이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초조해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어느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16551125035634.jpg“자이신 님? 어디 가세요?”

16551125064574.jpg“폐하께 보여드려야겠다! 내가 절대로 폐하를 비난한 게 아니란 걸! 이- 옷에 가려진- 진심을!”

16551125035634.jpg“대, 대신관님! 옷 찢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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