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생각은 늘 변하기 마련2022.01.26.
말 한마디로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가져간 라나문은 손을 깍지낀 채 테이블 위에 올리고서 다른 후궁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있나?”
말이 끝나자마자 게스타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얼핏 클라인에게 듣긴 했지만 역시 아직 부족했다. 난데없이 윌랑에서 후궁이 올 거란 얘기 외엔 아는 게 없으니. 혹시 설레발일 수도 있지 않던가.
“난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가요……?”
게스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묻자, 라나문은 평소와 달리 그를 무시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주었다.
“왕이 직접 편지를 보냈다. 폐하께.”
그러고서 말을 멈추자, 타시르가 삼단으로 쌓은 붉은색 체리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면서 재밌다는 듯 말을 이었다.
“윌랑에선 최근 후계자 다툼이 치열했답니다. 일시적으로 승기를 잡은 쪽이 아마 패배한 쪽을 멀리 보내려 하는 거겠지요. 거기 왕이 자식들 사랑이 상당한지라,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는 없는 상황이거든요.”
“아…….”
왕이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건,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당장 큰 벌을 받을 일은 없단 뜻. 승자 쪽으로서는 벌을 내릴 수도, 언제 또 힘을 길러 뒤를 칠지도 모르는데 곁에 둘 수도 없으니, 차라리 먼 나라에 후궁으로 보내버리려는 계산을 충분히 할 수도 있었다. 국서라면 모를까 후궁이지 않은가. 그 왕자보다 더욱 신분 높고 유리한 후궁들이 수두룩하게 있는 곳.
“사실상 볼모를 받아달란 거네요.”
중얼거린 게스타는 배시시 웃으면서 클라인을 보았다.
“그럼 클라인 님처럼 ‘임시 후궁’으로 오겠지요?”
“무말랭이. 남은 물기까지 쪽 빨리고 싶구나, 네가?”
클라인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이를 드러내자, 게스타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웅얼거리면서 앞에 놓인 연한 녹색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일이 해결될 때까진 우리끼리 싸워선 안 된다. 나중에 싸워라.”
라나문은 그런 두 사람에게 차갑게 경고를 하고서, 다시 타시르에게 ‘마저 설명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타시르는 ‘왜 내가 이걸 설명하고 있지?’ 생각하면서도 일단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다들 후궁 하나가 더 늘어나는 것도 싫으시겠지만. 문제는 그쪽에서 들이밀려는 왕자가 절대로 폐하께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란 데 있습니다.”
“타시르 님은 누가 올 지 알고 있어요……?”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난 쪽 파벌에 미혼인 왕자는 하나뿐이거든요. 설마 이혼한 왕자를 후궁으로 보내진 않을 테니, 온다면 그 왕자뿐이겠죠.”
말을 마친 타시르는 히죽 웃더니 케이크를 떠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다시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문제는 그 왕자에게도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녀가 있단 거고요.”
“그럼……?”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억지로 후궁 자리로 떠밀려 오는 왕자. 딱 봐도 도움 안 되겠지요.”
사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오더라도 다들 반대했을 것이지만, 도움 안 되는 사람이 올 것 같으니 반대할 명분까지 있었다. 라나문은 타시르가 설명을 마치자 고개를 끄덕인 다음 게스타 쪽을 보며 지시했다.
“게스타. 우리 가문과 네 가문, 그리고 우리와 친한 귀족들을 움직여 폐하께 반대하는 의견을 넣지. 무조건 반대하면 폐하께서 기분이 상하실 테니, 타시르가 말해준 점을 핑계로 삼아라.”
대놓고 왕자의 약혼을 반대할 ‘핑계’라고 표현한 라나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직 기존 후궁들도 화목하지 못하는데, 새 후궁을 받아들일 때가 아니란 말도 덧붙이게 해.”
클라인이 “아직? 그럼 나중엔 된단 거냐?” 하고 중간에 항의를 하자, 라나문은 “일단 그렇게 말해두는 거다.” 하고 차갑게 그를 누르고서 말했다.
“클라인 황자. 그쪽은…….”
클라인은 라나문의 지시를 받는 게 기분이 나쁜지,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나서서 말을 이어버렸다.
“카리센을 통해 윌랑 쪽에 대놓고 말하지. 내가 여기 후궁으로 와 있는데, 윌랑 왕자가 지금 나랑 같은 자리에 오려는 게 기분이 나쁘다고.”
대놓고 저런 식으로 말했다간 카리센과 윌랑의 사이가 멀어질 텐데. 라나문은 클라인의 표현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했으나,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비슷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클라인이 저렇게 말해서 카리센과 윌랑의 사이가 멀어지건 말건 타리움과는 관련 없는 일이기도 하고. 앞에 차려진 음식이며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칼라인은, 잠시 대화가 끊어지자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흑사신단 쪽에, 윌랑에서 들어오는 의뢰를 한시적으로 받지 말라고 하겠다.”
이제 말을 하지 않은 건 대신관과 타시르뿐이었다. 그러나 다들 대신관은 이런 데 힘을 보탤 것 같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타시르만 쳐다보았다. 넌 어떻게 할 건데, 라는 눈으로. 타시르는 케이크를 먹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화사하게 웃으면서 당당히 말했다.
“사실 난 후궁이 하나 더 들어와도 상관없는데요.”
그러나 말을 꺼내자마자 후궁들의 눈빛이 서늘해졌고, 눈칫밥을 먹은 타시르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전 미남계를 펼쳐서 폐하를 설득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타시르가 말을 끝내자마자 또 칼라인이 나섰다.
“아니. 그건 내가 한다.”
요즘 가장 총애받는 후궁인 칼라인이 나서자 다른 후궁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지만, 일단 라나문의 말처럼 ‘지금’은 그걸로 서운한 기색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내가 들어왔을 때도 다들 이랬으려나. 대신관만이 그가 입궁한 후 얼마 동안 계속되었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떠올라 머쓱하게 웃었다. 물론 그는 의논할 새도 없이 들어왔으니 이런 회의까지 열리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배척하던 분위기였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신관은 이들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 역시…… 새로운 후궁이 더 들어오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제가 뭔가 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래도 혼자 가만히 있긴 뭐해서 대신관이 묻자, 클라인이 대번에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후궁을 더 받지 말란 신탁이 내려왔다고 해. 사실 그게 제일 좋아.”
“신 이름을 팔라고요? 그건 좀…….”
“그거 말고 네가 뭘 할 건데. 고지식해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
“!”
클라인의 날 선 소리에 대신관이 움찔했고, 대신관의 뒤에 선 수행사제 구벨도 덩달아 움찔했다.
* * * 칼라인은 자신이 나설 거라 했지만, 타시르는 긴급회의가 끝나자마자 지체 없이 하렘을 나가 본궁으로 걸어갔다.
“칼라인 님이 나설 거라 했는데. 직접 가도 괜찮을까요?”
히얼란은 그 뒤를 쫓아가며 걱정했지만, 타시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하게 웃었다.
“칼라인 님은 폐하가 후궁을 맞지 못하게 미남계를 펼친다 했고. 나는 한 명 더 들어와도 좋다고 찬성하러 가는 거고. 목적이 다른 데 무슨 상관이겠어?”
히얼란은 “아. 그러네요.” 하고 수긍하다가, 뒤늦게 타시르가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눈을 희번덕거렸다.
“네? 찬성하러 가신다고요? 왜요?”
히얼란은 자기가 뭘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의 소단주가 황제를 진심으로 연모하지 않는다지만, 후궁 숫자가 많아 봐야 타시르에게도 좋을 건 없으니까. 연모하건 않건 어쨌든 후궁 아니던가.
“모두가 반대를 외칠 때 홀로 찬성하는 후궁. 폐하가 원하면 뭐든 따르겠다는 후궁. 눈에 띄잖아.”
그러나 타시르가 아주 뻔뻔하게 대답하자 히얼란은 더욱 입이 벌어졌다. 그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의견이 하나로 안 모이는구나. 아무리 눈에 띄는 게 중요해도 이런 심각한 일에 혼자 반대표를 내고서 눈에 띌 거라 하다니. 타시르는 제 시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는지, 힐긋 쳐다보는 히죽 웃으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농담이다.”
“아아. 놀랐어요. 역시 반대하러 가시는 거죠?”
“아니. 찬성하러 가는 건 맞는데.”
“왜, 왜요?”
히얼란은 타시르가 기분이 상할 걸 알면서도 충격을 주기 위해 진심으로 물었다.
“소단주님은 폐하와 동침 한 번 해본 적 없으면서, 대체 무슨 배짱이세요?”
일반적인 시종과 도련님 관계라면 하기 어려운 말일 수도 있으나, 히얼란은 원래는 앙제스 상단에 고용된 사람. 상단에서 꽤 밀어주던 인재였기에 이 정도의 자극적인 말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타시르부터가 히얼란이 무슨 말을 하건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면서 넘어가는 성격이기도 했고.
“게스타, 라나문, 클라인 이 셋이 수시로 싸워대잖아. 여기에 하나 더 끼면 딱 짝이 맞지 않을까? 게스타랑 라나문이 싸우고. 클라인 황자와 왕자가 싸우고.”
“와…… 이상해요. 그럼 대신관님이랑 용병왕은요?”
“대신관은 누가 오든 안 싸울 거고. 용병왕은 무섭잖아. 누가 오든 용병왕하고는 무서워서 안 싸우려 드니 예외.”
너, ‘그’ 라나문이 고고하게 굴면서도 용병왕이랑은 최대한 안 부딪히는 거 보면 모르겠냐? 타시르가 짓궂게 속삭이는 말에도 히얼란은 여전히 눈이 팽팽 돌아갔다. 진짜로 우리 소단주는 황제를 황제로만 보는구나 싶어서.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긴 했다. 원래 사랑이 섞이면 쉽게 이성을 잃지 않던가. 하지만 이 정도로 선을 확실하게 긋는다면, 나중에 후궁들끼리 싸우게 되어도 타시르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도착했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황제의 공개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타시르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아치문 너머를 보았다. 황제가 커다란 책상 앞에 꼿꼿한 자세로 앉은 채 눈을 내리깔고 서류에 몰두해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자니, 타시르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가 꾸벅 인사를 하고서 알려주었다.
“폐하를 뵈러 오신 거라면 나중에 오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타시르 님. 바쁘셔서 점심도 거르셨거든요.”
“아아. 기다리지.”
하지만 타시르는 순순히 그렇게 말하고는 아치문 틀에 기대어 서서 황제를 계속 쳐다보았다. 공개 집무실이기에 그 안에는 각자의 안건을 가져온 이들부터 다른 비서들까지 그 수가 많았다. 이 때문에 가장 뒤쪽에 타시르가 끼어 있어도 황제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업무에만 몰두해 있었다. 덕분에 타시르는 마음을 놓고 황제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고서 고개를 기울이다가 서류를 뒤적이는 모습, 시종장을 불러서 뭔가를 묻는 모습,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까 옆으로 치워둔 서류를 도로 가져와 살피는 모습, 한 번씩 한숨을 내쉬기도 웃기도 하는 모습……. 그러다가 눈이 아픈지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가 타시르를 발견하고는 씩 웃으면서 허공에 키스를 날리는 시늉을 해주었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시종과 비서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더니, 타시르를 알아보고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리를 비켜주었다고 해도 집무실에서 나간 건 아니고, 주위에 다들 물러서서 그가 들어올 수 있게 길을 터준 정도였지만. 타시르는 씩 웃고서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왔느냐, 타시르?”
황제가 펜을 내려놓으며 묻는 사이. 히얼란은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타시르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우리 도련님이 후궁을 하나 더 받으란 말을 하시겠구나. 자기도 후궁이면서! 사람들이 우리 도련님을 보고 깜짝 놀라겠지. 후궁인데 후궁을 받으라 하는 모습을 보고 계산적이라고 생각할까 대범하다 생각할까. 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히얼란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손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히얼란만큼 많은 걸 알진 못했으나, 새 후궁 이야기가 도는 와중에 황제의 기존 후궁이 집무실에 찾아온 상황에 흥미가 도는지, 모두 타시르를 쳐다보긴 했다. 그래도 타시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황제를 감싸 안으며 입을 열었다.
‘으악, 말씀하신다!’
히얼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폐하. 타시르는 폐하 옆에 일곱 번째 남자가 오지 않길 바랍니다.”
‘이 냉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히얼란은 눈을 도로 떴다. 후궁을 받으라 권할 거라며 들어온 그의 도련님이, 황제를 자기 품에 감싸고서 살갑게 웃고 있었다.
‘아니…… 소단주, 말이 완전히 달라졌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