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회의를 시작하지2022.01.23.
관리 부서에 들러 자신이 무사하단 사실을 알리고 그간의 행적을 거짓으로 적어 낸 자이오르는, 기르골이 머무는 숙소로 돌아왔다가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런 겁니까?”
분명 마지막에 보았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문짝이 박살 나 있었다. 아주 제대로 반쪽으로. 누군가 문의 중앙부에 강한 힘을 가해 내려친 게 분명했다.
“적인가요?”
“나한테 적이 어딨어. 없어.”
“그럼…… 스스로 하셨나요?”
“제자님이 하고 갔지.”
“제자님. 아. 그 대적자 후보!”
자이오르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제자님’이라 부르는 걸 보면 제자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그 제자가 왜 문짝을 부수고 갔단 거지?
“애가 세더라.”
하지만 기르골은 긴 설명을 해주는 대신 히죽 웃으면서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이미 강해. 더 강해지면 어떻게 될지 신경 쓰일 정도로.”
“좋은 거 아닌가요? 로드를 이길 수 있을 테니까요.”
“로드를 이길 만큼은 강해야 하는데. 내가 통제할 만큼은 덜 강해야 하거든.”
“아…….”
“그러면서, 요구한다고 요구하는 게 자기편이 되어 달란 거라니.”
걱정한다는 기르골이 안색이 환해져서 입가를 쓸자, 자이오르는 눈썹을 치켜올려 이마에 주름을 가득 만들어냈다.
“걱정하는 거 맞으시죠?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걱정하는 거 맞아. 근데 걔가 말을 너무 이쁘게 해.”
이쁘게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아부를 잘한단 건가. 아부 잘하는 사람이 문짝을 박살 낼 것 같진 않지만. 여전히 자이오르의 머리 위로는 물음표가 떠다녔다.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렇겠지만, 이전에 그는 뱀파이어니 뭐니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기르골이 하는 말의 반 이상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사전 정보가 없기에.
“걔는 나랑 입맛도 같아지고 싶은가 봐. 꽃도 따라서 먹어. 난 그런 애 진짜 처음 봤어.”
“저도 먹자면 먹을 수 있습니다, 기르골 님. 보여드릴까요?”
“네가 꽃 먹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기르골이 정색하고서 묻자, 자이오르는 시무룩해져서 쓰러진 문짝을 들어올렸다.
* * * 기르골이 사디가 박살 낸 문짝을 보며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궁전으로 돌아와 가면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라틸은 서둘러 공개 집무실로 걸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펜을 쥐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기도 전부터 심장 소리가 너무나 커서 손가락에 고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검은 펜촉이 검은 촛불처럼 보였다.
‘난 생각보다 더 강한가 봐.’
라틸은 괜히 쇄골 아래를 툭툭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는 사이, 시종장은 라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새로 들어온 서류를 정리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위쪽부터 보시면 됩니다, 폐하. 여기 갈피를 꼽아둔 부분까지는 꼭 오늘 내로 봐주셔야 하는 거고, 그 아래부터는 여유가 되실 때 보시면 되고요.”
“고마워요.”
라틸은 그중 맨 위에 있는 서류를 책상에 깔고 펜에 잉크를 묻히면서 입술을 연거푸 씹었다. 아니면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기르골에게 잘 배우면 여기서 더 강해질지도 몰라.’
기르골의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더 믿기 좋다. 기르골이 꼭 사디의 편이 되어주겠단 약속을 했다지만, 그런 약속은 어기려 들면 얼마든지 어길 수 있지 않은가. 어기면 욕하겠지만 뭐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없으니. 하지만 직접 길러낸 힘은 라틸을 무시하지 않을 터.
‘내 정체가 대적자든 로드든, 어마어마하게 강해져서 나쁠 건 없어. 안전을 도모하기 훨씬 나아.’
“아 참. 폐하.”
그러고 있자니 라틸의 옆에 서서 서류를 중요한 순서대로 쌓던 시종장이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왜 그럽니까?”
라틸은 자꾸만 자신이 부순 문짝과 미로 같던 저택으로 쏠리려는 신경을 억지로 회수해서 시종장에게 질문했다. 지금은 황제로서의 일이 먼저니까.
“사라졌다던 폭파 전문 마법사 말입니다.”
“아. 그래요. 뭐 다른 소식이라도 들어왔어요?”
“네. 한 명은 아직 연락이 없는데요. ‘자이오르’라는 마법사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다행이네요. 폭파 전문 마법사들은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나라도 행적이 파악되면 좋죠.”
“네. 본인이 직접 부서로 찾아왔다는군요. 수련을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났는데, 다쳐서 연락하지 못했답니다.”
“그럼 자이오르에 대한 수사는 거두고, 다른 한쪽으로 집중하는 게 낫겠네요.”
“예.”
시종장은 다시 서류를 정리해주기 시작했고, 라틸은 펜 끄트머리를 흔들면서 신중하게 글자를 한 자 한 자 살폈다. 그런데 한참 업무에 몰두해 있자니, 사이에서 아예 뜯어보지도 않은 서신이 나왔다.
‘뭐야?’
라틸은 뭔가 싶어 봉투를 집었다. 연한 파란색 봉투에 테두리에는 잔잔한 보석 알갱이까지 박아두고, 리본을 붙여 금색 잉크로 서명한 휘황찬란한 봉투였다.
“윌랑에서 온 거네요?”
게다가 그 봉투 뒷면에는, 타리움의 황제에게 바로 전달해 달란 기호와 왕의 인장이 함께 찍혀 있었다.
“급하단 표시가 없기에 따로 분류해두진 않았습니다, 폐하.”
“그쪽에서 나한에 이렇게 편지 보낼 일이 있나?”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사이 좋은 나라들과도 이런 편지는 잘 주고받지 않는다.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라틸이 황제 대 황제로 편지를 주고받는 건 하이신스뿐이었다.
“뭘까요.”
라틸은 중얼거리고서 칼로 밀랍 봉인을 뜯었다. 반으로 접힌 서신을 꺼내 펼치자 빳빳한 종이 안에 물 흐르듯 수려한 글씨체가 보였다.
“…….”
서신을 펼친 라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자, 시종장은 곁에 서 있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윌랑에서…… 특이한 제안을 했네요. 이러려고 전에 그 희한한 사절단을 보냈나?”
“특이한 제안이요?”
* * * 게스타는 도서관을 좋아했다. 그곳에서 나는 책의 냄새와 책장을 넘길 때 나는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고요한 가운데 조심조심 나는 책 꼽는 소리까지 모두다.
“게스타 님, 안녕하세요.”
하도 자주 오갔기에 사서 역시 게스타가 황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웃으면서 얼른 인사했다. 게스타는 고개를 끄덕여주고서 최근에 읽던 책을 빼낸 다음 자주 앉는 자리로 가 앉았다. 책을 펼치고서 몇 줄을 읽었을 무렵.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지만, 굳이 누가 온 건지 확인하진 않았다.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이야 많으니까. 문소리가 들릴 때마다 매번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자신의 바로 지척에서 멈추자, 게스타도 책에서 집중을 끊어야 했다.
“야, 무말랭.”
특히 저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아니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게스타는 책 모서리에 손가락을 대고 책장을 넘기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테이블 앞에 평소처럼 특이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클라인 황자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뒤편에서 사서가 걱정스럽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클라인 황자가 게스타를 잡아먹을 듯이 괴롭힌단 이야기를 이미 아는 듯했다. 게스타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으나 곧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절 부르셨어요?”
“긴급회의다. 빨리 와.”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아주 희한했다. 긴급회의라고. 게스타는 클라인 황자와 자신이 긴급하게 회의할 일이 뭐가 있던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클라인의 시체라면 자신과 회의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 와?”
하지만 빈말이 아닌지, 클라인은 앞서서 도서관 출구로 걸어가다가, 게스타가 따라오지 않자 다시 돌아서서 짜증스럽게 불렀다. 투덜대는 모습은 분명 장난질을 치는 건 아니었다. 클라인 본인도 게스타와 회의하기 싫어 죽겠단 얼굴이었으니.
“…….”
그럼 정말로 회의할 게 있단 건데. 게스타는 신중하게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책을 덮고 일어났다. 초조하게 입 모양으로 “괜찮을까요?”라고 묻는 사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게스타는, 읽던 책을 그녀에게 건네며 부탁했다.
“대신 꽂아주겠어요?”
클라인은 게스타가 따라오는 걸 확인하자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방향은 하렘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게스타는 말없이 그를 따라가다가 인적이 드문 회랑을 지나갈 때쯤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를 무시하고 말 거는 것도 싫어하는 클라인이 나서서 ‘긴급’ 회의를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주위에 아무도 없자, 클라인이 ‘게스타가 대신관의 부적을 팠을 거다. 저놈 창문에 그리핀이 붙어 있었다’고 주장한 일이 떠올라 잠시 섬뜩한 마음이 들긴 했으나, 게스타는 그런 충동을 간단하게 통제하며 발소리를 죽였다.
‘아직. 나중에.’
이를 모르는 클라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후궁들 다 모여 있다. 너 빼고.”
“왜요?”
“윌랑에서 편지가 와서.”
“편지요?”
윌랑에서 편지가 왔는데 왜 후궁들이 긴급회의를 해야 한단 거지?
“자기네 나라 왕자 하나를 후궁으로 받아 달라는 편지거든.”
“그게…… 왜 갑자기요?”
“후계자 싸움이 벌어져서 형제자매 몇끼리 편을 먹고 싸워댔나 봐. 그러다가 한 명이 여기로 튕겨오는 거지.”
“진짠가요?”
“아니. 편 먹고 싸워댄단 이야기까진 확실한데. 뒤는 내 추측.”
말을 뱉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지, 클라인은 이를 부득 갈았다.
“안 그래도 좁아 죽겠구만 뭘 또 더 보낸단 거야?”
“좁은 곳은 아니죠…… 방도 많이 남아 있고요.”
“그래서? 방 남으니까 남는 방에 다른 놈들도 다 채워 넣자고? 넌 그러고 싶으냐?”
“그건 아니에요…….”
“그건 아니어야지. 후궁이 여섯인데도 폐하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든데. 여기서 하나가 더 끼면…… 젠장, 어느 새끼야?”
일국의 왕자를 향해 거친 발언을 퍼부으면서도 클라인은 당당했다. 실제로 그는 어느 왕자든 후궁으로 오기만 하면 칼라인이나 타시르에게 망을 보라고 한 다음 제대로 협박해 쫓아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쪽.”
멈추지 않고 걸어간 덕택에 두 사람은 곧 하렘 내부에 있는 회의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커다란 타원형 탁자에 앉은 후궁들이 보였다. 상석은 비워두었고, 다른 자리에 다들 두 칸씩 띄어 앉았다. 타시르만이 실실 웃고 있을 뿐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데려왔다.”
클라인은 그들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타시르 옆에 자신도 두 칸을 띄우고 앉았다. 게스타도 우물우물 눈치를 보다가 칼라인 옆에 두 칸을 띄우고 앉았다. 칼라인은 힐긋 게스타를 보았지만 아는 체하지 않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모인 듯하자 입을 다문 채 오만하게 눈을 감고 있던 라나문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 모인 것 같군. 회의를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