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황제는 3일씩 시간을 못 낸다고요2022.01.19.
한참을 망설이던 기르골은 가게 주인에게 꽃 다발을 가리키며 요구했다.
“두 개 포장해줘요.”
자기 품보다 더 큰 망토로 온몸을 덮어 햇빛을 피하고 있던 자이오르는, 그 요구가 이상한지 가게 주인이 꽃을 포장하는 사이 물었다.
“왜 두 개를 사십니까? 하나는 곧 만날 제자에게 준다 하시더니.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 주시려고요?”
가게 주인이 여러 송이의 꽃을 하나로 모으고 끝을 다듬고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종이로 포장하는 모습을 보며, 기르골은 흐뭇하게 대답했다.
“로드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그게 누군데? 자이오르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다. 대신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말했다.
“곧 대적자와 대결하러 가실 거죠? 그동안 저는 제가 무사하단 소식을 마법사 관리 부서에 전하고 오겠습니다. 전 2등급이라 위치를 주기적으로 보고해야 하거든요,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난리가 났을 겁니다.”
“안 돌아와도 돼.”
“전 뱀파이어가 되고 싶습니다.”
“…….”
“제가 따른 황자는 황제가 되지 못했죠. 권력욕은 그때 틀어졌습니다. 권력을 가질 수 없다면, 기르골 님을 따라서 강한 힘과 영생이라도 얻을 겁니다.”
자이오르가 현실적인 계산을 대놓고 드러내는 사이. 가게 주인이 꽃다발 두 개를 완성해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 또 오세요.”
계산을 마친 가게 주인이 들어가자 기르골은 꽃다발을 들고 궁전 쪽으로 걸어갔다. 하나는 황제의 창문에 놓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제자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걸어가다 보니 뒤에서 자이오르가 계속 따라오지 않는가.
“왜 따라와? 어디 갈 거라며?”
데이트를 방해받은 기르골이 미간을 찌푸리고서 묻자, 자이오르는 갈 거라고 웅얼거리고서는 좀 걱정된단 듯 물었다.
“근데 대적자라면 무척 강한 거 아닙니까? 기르골 님이 지면 어쩌죠?”
기르골을 걱정한다기보다는, 기르골이 졌을 시 자신의 새로운 야망이 꺾일까 염려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기르골은 조금도 걱정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로드는 절대적으로 강하지만 대적자는 상대적으로 강하거든.”
“?”
“로드를 죽일 수 있는 건 대적자뿐이지만, 그 상대가 서로가 아니라면 더 강한 건 로드 쪽이지.”
* * * 남몰래 궁전에 들러 창틀에 꽃다발을 두고 온 기르골은 예비 제자에게 줄 꽃다발도 잘 챙겨서 약속 장소인 언덕으로 갔다. 기르골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꽃을 뜯어 먹으면서 ‘사디’가 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꽃봉오리가 많이 남아 있을 때 ‘사디’가 나타났고, 기르골은 아직 풍성한 꽃다발을 건넬 수 있었다.
“사디 양. 내 제자가 될 준비는 하고 왔어?”
질문을 던진 그는 사디의 꼭 쥔 주먹과 딱 다물린 입술, 결연한 눈동자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귀여워라. 그는 역대의 모든 대적자들을 다 싫어했으나, 사디는 제법 느낌이 좋았다. 임무를 마치더라도 ‘이 대적자 하나 정도는’ 고통 없이 죽여주고 싶을 정도로. 사디가 불만스럽게 쳐다보는 것조차도 귀엽게 여겨질 정도였다. 원래 약하고 소중한 것들은 화를 내도 귀여운 법이니까.
“꽃다발은 뭐야. 그쪽 간식이야? 도시락?”
“미래의 제자에게 주는 선물인데.”
“그런 사람도 여기 왔어? 어딨어?”
사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기르골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픽 웃고서 제안했다.
“이렇게 할까?”
“일단 말해봐. 나한테 불리한 거라면 안 들을 거니까.”
“내가 우리 제자님 기를 좀 살려줄까 싶어.”
“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사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웬 기?”
“내가 너무 손쉽게 이기면 우리 제자님 자존감이 꺾일 거 아냐.”
“내 자존감은 그 정도로 안 꺾여.”
“그래도.”
기르골은 꽃다발을 사디에게 다시 한번 밀어냈다. 이번에는 사디도 거절하지 않고 꽃을 받아 안았다. 기르골은 사디가 안은 꽃다발에서 꽃잎 하나를 똑 떼어내면서 웃었다.
“세 번 봐줄게, 예비 제자님.”
그러고서 꽃잎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자, 사디는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 자존심이 상해서 저러는 걸 거라고, 기르골은 속으로 웃었다. 대적자들은 대대로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봐줄 필요 없다고 거절하겠지. 기르골은 ‘그래도 봐줘야지’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르골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좋아.”
“응?”
심지어 사디는 그걸로도 모자란지, 잠시 생각해보다가 부가적인 부분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봐준다고 해놓고서 안 봐줄 수도 있으니 조건을 하나 더 걸자. 그쪽이 세 번 봐주지 않으면 약속을 어긴 거니까, 내가 승리하는 거라고.”
“…….”
이번 대적자들은…… 하나여야 하는데 둘인 것도 이상하고, 정의감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자존심도 강하지 않네. 왜 이렇지? 사디의 야무진 제안에 기르골은 의아해졌으나, 곧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지.”
아주 오랜 시간. 몇 개의 나라들이 사라지고 없어지길 반복하는 동안 대적자들을 보아 왔기에 흔쾌히 허락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기르골은 훈련을 받지 않은 대적자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훈련받지 않은 대적자는 그가 방심을 할지언정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기르골은 자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나무둥치에서 눈을 떴다.
“어?”
* * * 라틸은 기절한 기르골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그가 준 꽃다발의 향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연신 기르골의 얼굴을 힐긋거렸다.
‘기르골은 왜 뱀파이어인데 대적자의 스승 같은 일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칼라인과 틀어진 건가?’
게다가 서넛은 자기가 한 번밖에 안 물려서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라 했는데. 왜 만나는 뱀파이어들은 죄다 낮에도 멀쩡한 건지. 그때. 기르골이 눈꺼풀을 한 번에 들어 올리더니 옆을 보았다. 라틸은 꽃잎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가 깨어나자 가슴 위에 꽃다발을 얹어 주었다.
“기절했으니까 내가 이긴 거네.”
미리 준비한 주장을 하면서.
“잠시, 아가씨.”
기르골은 꽃다발을 한 손으로 잡고 상체를 일으키면서 한쪽 눈만 찡그렸다.
“방심했어.”
알아. 라틸은 기르골이 변명처럼 하는 말에 속으로 대답했다. 라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기르골이 진짜로 방심해서 졌단 걸.
“다시 해 아가씨.”
하지만 애초에 라틸은 일부러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주위를 흐트러트리다가, 기르골이 방심한 것 같자 바로 공격한 거였다. 설마 저쪽에서 대놓고 봐주겠다고 나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굳이 다시 할 이유가 없었다.
“이긴 건 이긴 거지.”
라틸이 물러나지 않자 기르골이 입을 쩍 벌렸다. 그래도 라틸은 턱을 괴고서 웃기만 했다. 상황이 급했다면, 기르골은 내기건 뭐건 없던 거로 하자며, 무작정 대적자로서의 의무를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르골은 라틸과의 내기를 받아들였다. 물론 자기가 질 거란 생각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내기였겠지만. 어쨌든 시간 여유가 아예 없지는 않다는 뜻. 나중에 상황이 급해질 때까지는 내기를 받아들여 줄 것이다.
“아가씨 사기꾼이야.”
항의는 하겠지만.
“응, 근데 그쪽은 약골.”
“나한테 그런 말 한 사람 처음이야, 아가씨.”
‘그야 뱀파이어한테 약골이라 하는 미친 인간은 없을 테니까.’
“더 해봐. 꽤 듣기 좋은 거 같아.”
라틸은 꽃다발로 기르골의 손바닥을 퉁 치고서, 다시 그에게 맡긴 다음 쪼그렸던 다리를 일으켰다. 그러나 기르골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누운 자세로 꽃다발을 품 한쪽에 끼고서 잠시 생각에 잠겨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서 천사라도 내려오나? 덩달아 위를 쳐다보자니, 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라틸은 그가 약속을 엎을까 봐 염려했으나, 기르골은 그러는 대신 꽃다발을 도로 라틸에게 건네며 물었다.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래, 아가씨. 내가 무슨 소원을 들어주면 되지?”
‘이건 생각해 둔 게 있어.’
“내가 최근에 배신을 몇 번 당해서. 사람을 못 믿게 됐거든.”
“배신한 사람들을 대신 죽여줄까?”
“아니.”
“그럼?”
“그쪽은 어떤 상황이 와도 내 편이 돼줘.”
“!”
“이게 내 소원이야.”
혹시 내가 대적자가 아니라 로드이더라도 날 죽이려 들지 마. 사실 라틸이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말은 이쪽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가 오히려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이건 또 예상 못 한 소원인데.”
기르골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디 양은 이상한 소릴 자주 하네.”
“싫어?”
“싫진 않은데.”
“그럼 그걸로.”
“내가 약속을 깨면 어떡하려고?”
어떡하긴 어떡해. 화나겠지.
“못 지킬 약속이라면 지금 말해줘. 다른 소원으로 바꿀래.”
고민이 되는지 기르골이 팔짱을 끼고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이게 저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조만간 배신할 계획이라도 세우고 계셨나요? 라틸은 황당했지만, 기르골에겐 나름 진지한 일이었다. 기르골에겐 나름대로 자기만의 계획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디의 요구는 기르골의 계획 중 하나를 틀어버리는 것이었다. 의외로 상대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라틸은 괜히 초조해져서 그가 준 꽃잎을 뜯어 입에 넣어 보았다. 별생각은 없었다. 고민하는 걸 기다려야 하는데,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기르골이 하던 행동을 따라 해 보았을 뿐. 하지만 그 행동에 동질감이라도 느낀 걸까. 기르골이 이쪽을 희한하단 듯 쳐다보더니 곧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러자.”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우물우물 씹던 꽃잎을 퉤 뱉었다.
“!”
“아. 맛없어서…….”
* * * 이후 라틸은 언덕을 내려가 기르골과 함께 식사하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기르골에게 본격적인 수업은 받지 않겠지만 ‘강해지는 법’은 배우기로 했다. ‘강한 대적자가 되어서 로드를 무찔러야지’라는 각오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혹시 내가 대적자가 아니라 로드라면 기르골의 강함을 배워두는 게 방어할 때 유용할지도 몰라’ 하는 계산 때문이었다.
“우리 제자님한테 꿍꿍이가 보이네.”
기르골은 라틸이 머리 굴리는 걸 눈치챈 듯했으나, 다행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캐내려 들진 않았다. 대신 정확히 어느 정도 실력인지 기초 테스트를 해 보고 싶다며, 식사를 마치자 어딘가로 앞서 걸어갔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수도 외곽에 있는 평범한 저택이었는데, 놀랍게도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혀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 튀어나왔다.
‘꼬여 있어?’
착시 효과를 이용해서 어디가 위층이고 어디가 아래층이고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천장인지 알 수 없게 만든 그림처럼, 저택 내부가 꼬여 있었던 것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기르골이 라틸을 등 뒤에서 밀고 문을 쾅 닫았다.
“기르골!”
라틸이 놀라서 외치자, 문 바로 뒤에서 기르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재고 있을게. 길 찾아서 도로 나와봐. 참고로 알려주자면 바로 전 대적자는 3일 걸려서 올라왔어. 꽤 빠른 편이었지. 역대 최단 기록은…….”
라틸은 기르골의 말이 다 끝나기 전. 3일 소리에 기겁해서, 방금 들어온 문을 그대로 발로 걷어차 버렸다. 아주 세게. 문짝이 박살 나는 소리가 나며 실제로 문짝이 박살 나자, 그 앞에 서 있던 기르골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기르골은 부서진 문과 라틸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어정쩡하게 말을 마쳤다.
“아가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