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네 창문에도 있어2022.01.12.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라틸은 정신이 들었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라틸은 눈을 감고 칼라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고 그의 품은 느낌이 아주 좋았지만,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이 순간을 오래 누리고 싶단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아!’
라틸이 일어나고 싶지 않는 이유는 눈을 뜨고 칼라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왜 정신이 들자마자 어젯밤 생각부터 나는 걸까.
“주인.”
“…….”
“주인?”
“…….”
눈치 빠른 칼라인이 라틸이 깨어난 걸 눈치채고 라틸을 불렀지만, 라틸은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에게서 좋은 향이 납니다.”
하지만 칼라인이 라틸의 목덜미에 대고 입을 맞추는 순간. 라틸은 더 자는 척을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눈을 떠야 했다.
“내 목 좀 노리지 말라니까.”
“주인의 목을 노린 건 아닙니다.”
“누가 봐도 목만 노리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피를 노린 거죠.”
“!”
칼라인이 웃음을 터트리자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뱀파이어식 농담 같으니라고. 라틸이 째려보자 칼라인은 라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서 라틸을 자신의 품 안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내 피가 그렇게 탐이 나?”
“주인께서는 자신에게서 어떤 향이 나는지, 평생 모르시겠지요.”
“어떤 향이 나는데?”
“주인의 향이 납니다.”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 그게 무슨 향인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지 칼라인은 대답 대신 라틸의 머리카락에 코를 가져다댔다. 자고 일어나서 아직 씻지도 못했는데. 땀도 흘렸을 텐데. 라틸은 당황했으나 칼라인은 멀쩡해 보였다.
“제가 좋아하는 향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몰라.”
“안 가르쳐 줄 겁니다. 나만 알고 있을 겁니다.”
과연 너만 알고 있을 수 있을까. 라틸은 너무 완벽한데 차갑기까지 해서 조각 같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이 상황에 이런 말을 해서 칼라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진 않았다. 그보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어야 하지? 말도 나누었는데, 밤에 일어난 일은 생각나지 않는 척 얼굴을 두껍게 해볼까?
“주인. 제 수업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모른 척할 새를 안 주는구나.’
“모르겠어.”
“좀 더 분발해 보란 뜻일까요?”
거기서 어떻게 더 분발하려고. 라틸은 그의 가슴에 대고 이마를 비볐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즐거우셨습니까?”
“……안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라틸은 완전히 칼라인에게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귀도 가리고 싶었다. 그냥 밤의 일은 밤의 일로 넘기면 안 되는 걸까? 밤에 일어난 일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민망했으니까.
“별로였습니까?”
“아니…….”
아주 기분 좋기는 했다. 칼라인이 아니라 자신이 녹아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정도로. 눈앞이 핑글핑글 돌고 어떻게 이런 감각이 존재할 수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엔 그 감각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부끄러운 마음이 덜했는데. 자고 일어나 그 무시무시한 쾌락이 잦아들고 나니 이성이 연신 베개를 두드려댄다. 라틸이 자꾸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자, 칼라인은 라틸의 어깨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주인의 반응을 보고 어디를 좋아하는지, 어떤 걸 가장 기뻐하는지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 묻지 마. 알아서 짐작하고.”
“하지만 주인이 내게 말을 해주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대충하면 안 돼?”
“말했잖아요. 난 주인에게 좋은 것만 하고 싶습니다.”
라틸은 칼라인의 팔을 어루만지다가 주섬주섬 몸을 아래로 내려 이불 안에 파고들어 가버렸다.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하고 있자니, 칼라인은 기어코 따라 들어와 라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이불 속까지 따라 들어오지 마!”
라틸이 항의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나갔으나, 이불 안에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 몹시 답답한 일이었다. 라틸은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나오다가, 칼라인이 자신을 귀여워 죽겠단 눈으로 보고 있자 다시 그의 배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 * * 라틸의 요구에 따라 칼라인은 먼저 씻은 다음 라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그는 라틸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라틸은 어젯밤 내내 자신에게 붙어 있던 입으로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정말로 테이블을 뒤집고 달아나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칼라인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라틸은 아직도 칼라인이 남기고 간 냉기가 남은 이불에 괜히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남기고 간 온기도 아니고. 남기고 간 냉기라니.’
5년 전만 해도 ‘넌 커서 뱀파이어를 후궁으로 맞이할 거야’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미쳤냐고 되물었을 텐데. 라틸은 침대에서 몇 번을 더 뒹굴다가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다급히 일어섰다. 9시까지 공개 집무실로 가야 하는데. 어느새 8시 30분이었다. 식사를 할 시간도 없어 보이고, 어차피 입맛이 있지도 않기에 라틸은 빠르게 씻은 후 옷을 입고서 집무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을 땐 20분이나 늦은 상황이었다. 라틸이 안으로 걸어가자 대기하던 시종들이 품에 안고 있던 서류들을 차례로 내밀었다.
“어제의 그 폭파 전문 마법사 두 명이 행방불명된 건에 대한 서류입니다, 폐하.”
“풀로드 영주가 갑자기 죽으면서, 쌍둥이 간에 영주 자리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폐하.”
“밀로에서 왕의 폭정이 계속되어 반란이 일어났다 합니다. 반란을 일으킨 대공과 현재 도피해 있는 왕의 셋째가 동시에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라틸을 대신해 뒤를 따라가며 그 서류를 챙겼다가, 라틸이 책상 앞에 앉자 중요한 순서대로 쌓았다. 황제의 업무 대다수가 그렇듯 이번에 올라온 서류들 역시 뭐가 답이라고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사안들뿐이었다. 밀로 건만 해도 그랬다. 대공과 왕의 셋째는 둘 다 평판이 좋고 영민하단 평가를 받았으나, 라틸 입장에선 누가 등극하든 골치가 아팠다. 왕의 셋째가 집권한다면 복수극이 벌어질 확률이 높으니 그 나라에 피바람이 불 테고. 대공이 집권하면 라틸은 자신이 집권할 때 지지를 보내준 밀로 왕가를 팽개치는 모양새가 된다. 그래도 지지한 쪽이 등극하면 그나마 낫지. 지지하지 않은 쪽이 등극하면? 당장 나라 사이가 틀어진다. 그렇다고 군사를 보내 대놓고 도와주자니, 남의 나라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병사들이 중요하지 않는 일에 다치거나 죽는 건 싫었다. 그렇게 골치 아픈 일들을 의논하면서, 라틸은 이걸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지 보류할지, 국무회의로 가져갈지를 결정했다. 이후에는 회의실로 가 대신들과 전문가, 시종들이 모여 각 안건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받았다. 바쁜 오전 업무가 끝나자 라틸은 진이 빠져서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시종 하나가 “폐하. 클라인 님이요. 클라인 님.” 하고 입 모양으로 알려주자, 그제야 어제 클라인이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떠올렸다.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네. 바쁘다 바빠.’
“이거. 내 방에 가져다 두고, 이건 내 개인 집무실로.”
라틸은 식사를 하면서 따로 보기 위해 챙겼던 서류를 시종 두 명에게 나누어 맡기고서 하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 왜 이렇게 하렘을 먼 데 지었어?”
괜히 건축가 탓까지 하며 클라인의 방으로 찾아가니, 마침 하인들이 클라인 방으로 음식을 가득 담은 웨건을 끌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라틸을 발견한 하인들은 동시에 수레를 놓고 무릎을 굽혔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이미 하인 한 명이 들어가서 먼저 가져온 음식을 차리고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클라인은 라틸이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울 앞에 앉아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밝은색 없어? 이 색은 나랑 전혀 안 맞잖아. 난 뭘 해도 다 어울리는데 개중에서 안 어울리는 거만 찾아오다니. 그것도 재주다 재주.”
라틸을 먼저 발견한 클라인의 시종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라틸은 ‘쉿’ 하고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서 슬그머니 클라인의 옆으로 가 볼을 쿡 찔렀다. 클라인은 성질을 내려 돌아보다가 라틸을 발견하자 대번에 안색이 환해져서는 두 팔을 벌렸다.
“폐하!”
15년 만에 만난 대형견처럼 그가 기뻐하자, 라틸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그가 머리에 꽂은 얇은 관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잘 어울리는데 왜.”
“뭘 해도 영 마음에 안 차더니. 폐하가 오시려고 그랬나 봅니다.”
“같이 식사하자.”
클라인은 관을 아예 벗어서 바닐에게 건네고는 얼른 의자를 빼주었다. 그러고서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연회 때 타시르가 라틸의 의자를 빼주었던 장면을 나름대로 유심히 보았던 게 분명했다.
‘귀여워라.’
라틸은 해맑게 웃고 있는 클라인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나와서 마주 보고 같이 웃었다. 야하고 매력적인 칼라인이나 아찔하고 권태로운 라나문도 좋지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클라인도 좋았다. 하인들이 식사를 차리고 물러나자 바닐이 식사 시중을 들지 말지 고민되는 듯 라틸과 클라인의 눈치를 살폈다. 클라인은 손을 저어 바닐까지 나가게 하고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의자째 자리를 옮겨 라틸과 가까이 앉고서 또 웃었다.
“이렇게 둘이 붙어 있을까요, 폐하?”
“팔이 부딪히지 않을까.”
“제가 음식을 집어서 폐하 입으로 드리면 되지요. 그러면 팔이 부딪히지 않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내 손으로 먹고 싶다.”
“…….”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입이 두 개인데 손이 하나면 불편하잖아.”
“전 손이 두 개인데요.”
“포크 두 개 쥐고 동시에 휘두를 건 아니잖느냐.”
클라인이 시무룩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 라틸은 소리 죽여 웃고서 물었다.
“어제 날 찾아왔다면서? 회의가 늦게 끝나서 좀 늦게 들었다.”
클라인은 새콤한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샐러드 소스를 포크로 떠먹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제가 수상한 걸 봐서요. 폐하께 알려드리러 갔습니다.”
“수상한 거라니?”
“제가 걸어가고 있는데요. 게스타 방 창문에 이상한 게 보였습니다.”
“게스타 방?”
“네. 작은 독수리처럼 생겼는데, 사자 꼬리 같은 게 붙어 있었어요.”
“그게 뭐지?”
“그러니까요.”
클라인은 포크를 내려놓더니 눈을 빛내며 간교하게 속삭였다.
“창문에 그런 걸 붙여놓고 있다니. 참으로 수상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네. 그런 게 창문에 있다니. 어쩌면 게스타 그 무말랭이가 대신관 부적을 파낸 범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죠?”
“글쎄…….”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클라인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클라인의 뒤쪽 창문 창틀 위. 사자 꼬리가 달린 작은 독수리가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네 창문에도 있는 거 같은데, 클라인.”
라틸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클라인은 놀랐는지 확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클라인은 곧 고개를 기울이더니 라틸을 보며 물었다.
“날아갔습니까, 폐하?”
아니. 지금도 있다. 창틀 위에. 거기서 엉덩이를 씰룩이며 사자 꼬리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안 보여?”
다시 고개를 돌린 클라인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런데 무슨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