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오셨습니다.2022.01.05.
입을 막은 손바닥 위쪽으로 칼라인의 눈매가 휘어졌다.
“손을 치워줘야 대답을 할 텐데.”
“왜. 지금도 잘 하는 거 같은데.”
라틸이 중얼거리자마자 칼라인이 라틸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더니,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 닿는 간지러운 감촉과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라틸은 괜히 등이 간지러워졌다. 라틸이 손을 빼자 칼라인은 웃으면서 놓아주더니, 자신도 포크를 들면서 쓸데없을 정도로 우아하게 대답했다.
“거북이 열 살과 개 열 살이 같은 나이입니까.”
“나더러 개라고?”
“단순히 숫자로 계산하지 말란 겁니다.”
“숫자로 계산하면 불리하단 거네. 어마어마하게 나이가 많단 거야. 그치?”
칼라인은 예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무시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평소에는 음식을 앞에 두면 깨작거리던 그가 예법 선생이 시범으로 보일 때만큼이나 격식에 맞추어 식사를 시작하자, 라틸은 그 모습을 잠시 홀린 듯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도미스의 기억 속에서 칼라인은 귀족의 가신으로 위장하고 있었지. 기르골이랑 같이.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으나 실제로 당시의 영주에게 ‘귀한 손님’ 소리를 들으며 초대받을 정도였다. 숨겨둔 신분이라도 있는 걸까?
“500살…… 맞아?”
칼라인의 기품 있는 손짓은 라틸이 500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사라졌다.
“뭔가 알고 계시는군요.”
‘알고 있지. 네 생각보다 더 많이. 하지만 중요한 건 몰라.’
라틸은 칼라인에게 기르골에 관해 이야기해도 될지 망설였다.
“사실 네 친구를 만났다.”
하지만 ‘500살’이란 구체적인 수치를 알게 된 경위는 두루뭉술하게라도 털어놓아야 할 듯해서, 라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기르골이라고. 왜, 머리카락이 하얀.”
“…….”
“아, 이 모습으로는 아니고. ‘사디’ 모습으로 만났어.”
라틸은 칼라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네 친구가 맞지?”
칼라인은 포크를 내려놓고서 쓸쓸하게 웃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칼라인한테 대적자 이야기를 해도 되나? 근데 칼라인이 뱀파이어라면 대적자와도 반대편 아닌가? 말해도 되나?’
그는 뱀파이어인데, 뱀파이어 로드니 어쩌니 하는 거랑은 관련이 없는지도 묻고 싶다. 라틸은 이 질문들을 해도 될지 몰라 망설였다. 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하고 난 다음 대답이 돌아올까?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전부 물으십시오, 주인.”
다행히 칼라인이 먼저 눈치 좋게 알려주어서, 라틸은 그럼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무엇이든 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흑마법사들이랑 한패야? 다른 괴, 아니, 좀비라거나 그런 거랑도?”
“모두 그렇진 않습니다. 인간들이 상대가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한편이 아니듯이요.”
“아. 그럼 너는? 너는 어때?”
“저는 주인의 편입니다.”
“로드가 나타나서 자기편 하라 하면?”
라틸의 질문에 칼라인의 입술이 아주 웃긴 이야기를 들었단 것처럼 뒤틀렸다.
“그래도 저는 주인의 편입니다.”
라틸은 칼라인이 로드가 나타났을 때 진짜로 자신을 편들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선택은 그 상황이 되어 봐야 아는 거니까.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최소한 ‘지금’은 그가 로드보다 자신을 편드는 건 확실한 듯했다. 그러면 기르골 이야기도 좀 더 물어봐도 되겠지.
“기르골도 뱀파이어지?”
“네.”
“근데 기르골은 자기가 그거…… 로드를 무찌르는 대적자 있잖아. 자기가 그런 자들을 키워내는 스승이래. 맞아?”
“그런 역할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드나 대적자처럼 운명이 이끄는 역할은 아닙니다.”
“취미?”
“글쎄요.”
칼라인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워낙 이상한 자라. 취미일 수도 있겠네요.”
“저…….”
내내 잘 질문하던 라틸은 ‘기르골이 나더러 대적자래’라는 부분에서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칼라인은 로드 편이 아니라곤 하지만, ‘로드 편이 아니다’와 ‘대적자를 지지한다’는 전혀 다른 의미이지 않은가. 그래도 뱀파이어이니, 뱀파이어들을 없애려 드는 대적자는 좋아할 수 없지 않을까? 결국 라틸은 다른 질문을 했다.
“둘은 왜 싸운 거야?”
칼라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대답하기 싫단 얼굴. 말하고 싶지 않단 얼굴. 한참 만에야 태연한 척 대답을 해주긴 했다.
“그 일은 뱀파이어나 로드 같은 거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입니다. 꼭 말해야 할까요?”
거절로.
“됐어. 이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 * 라틸이 칼라인과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려는 그 시각. 라나문은 대적자가 될지 말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걸어가다가, 먼발치에 있는 클라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대적자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둔 건 맞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입조심을 시켜둬야 하니까. 클라인은 그가 하얀 머리와 대화 나누는 걸 다 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야.”
클라인은 제 시종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다가, 라나문을 발견하자마자 일단 표정부터 구겼다.
“네가 왜 여길 와.”
라나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쾌하단 내색이었으나, 라나문은 클라인이 불쾌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기에 코앞까지 다가가 본론을 꺼냈다.
“생각보다 입이 가볍지 않던데. 아직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클라인은 라나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며칠 전 그는 라나문이 벌거벗고 정원을 돌아다니는 걸 보았다. 그 일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다. 그걸 목격한 다음 날 클라인은 곧장 황제를 찾아가 이미 그 일을 털어놓았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수긍했다.
“내가 입이 무거운 편이란 데 감사해라.”
“다행이군. 장점이 하나라도 있어서.”
“그러게. 그쪽은 하나도 없잖아.”
“계속 그 입을 무겁게 하고 있어라.”
클라인과 라나문이 말다툼을 하자 덩달아 뒤에 선 시종들도 서로를 마땅치 않게 쳐다보았다. 클라인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입을 무겁게 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고 내 자유지. 왜 멋대로 명령질일까, 일개 귀족이?”
“그날 봤으니 알 텐데?”
“봤는데 모르겠던데.”
“그날 본 걸 잘 떠올려보지 그래?”
라나문이 차갑게 웃자 클라인은 그에게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날도 그렇지만 오늘도 그렇고. 저 새낀 홀딱 벗고 돌아다니던 놈이 뭐가 저리 당당해? 심지어 그걸 또 떠올려보라니?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 그날 봐서 알게 됐을 텐데. 내가 국서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러니 미리 입을 조심하란 거다.”
라나문의 말에 클라인은 더욱 기가 차서 헛웃음을 연달아 뱉었다. 자기 나체를 보았으면 자기가 국서가 될 거란 걸 알 수밖에 없다고? 참으로 오만하지 않은가.
“하. 자신감 하나는 넘치는구나.”
“현실이니까.”
“이봐, 족제비. 우물에서만 지내서 뭘 모르나 본데, 내가 당신보다 더 대단해. 그렇게 자신감 가지지 마.”
클라인이 이죽거리자, 이번에는 라나문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나보다 대단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하얀 머리는 라나문에게 대적자가 둘이란 소리는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서도 클라인이 자기가 더 대단하다고 큰소리를 쳐대니 의아했다. 그러나 클라인은 여전히 당당했다.
“왜 확신하지? 그쪽은 날 못 봤잖아? 나만 그쪽 걸 봤지.”
두 사람의 대화가 좀 이상하단 걸 먼저 알아차린 건 라나문이었다. 보다니? 뭘? 라나문은 눈살을 구기고서 클라인을 쳐다보다가, 혹시 클라인이 지금 다른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 ‘하얀 머리’라고 언급해보았다.
“내 머린 은발이다, 족제비야.”
예상대로 클라인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라나문은 그제야 클라인이 뭘 자꾸 봤니 못 봤니 해댔는지 떠올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못 봤군. 괜한 대화를 했어.”
“무슨 소리야?”
“멍청이와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한심하단 뜻이다.”
* * *
“아니, 그 족제비는 자기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다짜고짜 시비야?”
라나문이 자기 시종을 데리고 물러나자, 클라인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나 라나문은 이미 가버린 뒤였고 이곳엔 클라인과 그의 시종인 바닐, 호위인 악시안 뿐이었다. 클라인은 혼자서 계속 구시렁거리다가 곧 그것도 지루해졌는지 라나문과 정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걸어가는 그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뭐야 저건?”
“왜 그러십니까?”
클라인이 앞을 멍하게 보다가 눈을 비비고 재차 쳐다보자, 옆에 있던 악시안이 물었다.
“어?”
클라인은 눈을 깜빡이다가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아니, 방금 게스타 창문에 꼬리가 긴 독수리가 붙어 있었어.”
“공작새였습니까?”
“아니, 왜 그런 꼬리가 아니라 사자 꼬리 같은 거 말이다. 낙탄가? 그런 거.”
악시안은 클라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멀쩡한 창문만 있을 뿐.
“없는데요.”
“그러게. 지금은 없네. 근데 아깐 분명 있었어.”
클라인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괜히 몇 번이나 괴물을 뱉어낸 호수를 돌아보았다.
“혹시 모르니 폐하께 말씀드려야겠다. 가자.”
하지만 클라인이 본궁에 갔을 때 라틸은 회의에 들어간 후였다.
“언제 마치시지?”
기다릴까 싶어서 물어보았으나, 라틸의 시종은 잠시 생각하더니 사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폭파 전문 마법사 두 명이 행방불명됐다고 해서요.”
시종은 클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할 말이 있으며 대신 전해주겠다’고 했지만, 클라인은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섰다. * * * 라틸이 클라인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칼라인을 부른 다음 미리 와인을 조금 마시면서 용기를 다듬고 있을 때였다. 지난번 라나문 때는 라틸의 위장에 들어가 용기를 주어야 할 와인을 라나문이 자기에게 다 부어 버려서 엉뚱한 힘을 발휘했다. 설마 칼라인도 그런 행동을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미연에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마셔두는 것이다.
“클라인이 다녀갔다고? 그걸 왜 지금 말하느냐.”
“죄송합니다, 폐하. 회의가 길어진 데다, 그때쯤 다른 일이 있어서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시종이 다급히 사과하자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나가라고 손을 저었다. 그가 나가자, 라틸은 다시 방문을 닫으라 손짓한 다음 빈 잔에 와인을 더 채웠다. 차라리 자신이 하렘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중간에 클라인에게 들르기라도 하지. 칼라인을 방으로 불러 놓고서 클라인까지 오라 하는 건 좀…… 그랬다. 하나는 남고 하나는 가라 해야 할 테니.
‘클라인한텐 내일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야겠다. 그때 들으면 되겠지.’
그때. 침대 끄트머리에 달아둔 종이 맑게 울리는 소리가 나며 문 너머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칼라인 님께서 오셨습니다.”
라틸은 ‘들어와’라고 말하려다가 목소리가 턱 막혀 나가지 않자, 대신 테이블 위에 설치된 작은 종을 두드렸다. 화답하듯 안쪽에서도 맑은 종소리가 나자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칼라인이 들어왔다. 라틸은 지나치게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다음 그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