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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칼라인 (191/367)

192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칼라인2021.12.29.

카르둔은 어제 다른 후궁을 모시는 궁정인들 표정이 얼마나 별로였는지, 신이 나서 떠들다가 “네?” 하고 새된 목소리를 냈다.

16551122325649.jpg“안 하신다더니. 갑자기 왜요?”

이제 일이 잘 풀려가는데, 왜 갑자기 또 대적자인지 뭔지를 하셔야 하느냐…… 하는 불안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이윽고 카르둔의 표정이 알싸해졌다.

16551122325649.jpg“혹시 도련님, 오늘도 베개 하셨나요?”

라나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둔은 울먹이는 얼굴로 괜히 수건만 힘주어 퍽퍽 털어댔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저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을지 짐작이 가서 곤란했다. 아니, 폐하는 어떻게 저 얼굴을 보고 매번 구경만 하다 가시나. 연인이면 몰라 부부 아닌가 부부? 하지만 라나문은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태연했다.

16551122325657.png“베개까진 아니었다.”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카르둔이 감탄해 쳐다보자, 라나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뭔가 추억이 가득한 표정. 밤새 서사를 쌓은 표정. 뭐지. 말하는 베개 취급으로 상향되신 걸까? 아니면 폐하가 뭔가 미래가 기대되는 그런 약속을 해주셨나? 카르둔은 뒷말이 궁금했으나, 라나문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물기를 흠뻑 머금어 축축한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며 말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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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22325657.png“폐하께서 주무시는 모습을 보고 밤새 생각했는데.”

주무셨군요…… 폐하는 주무시고 도련님은 못 주무셨어요. 카르둔은 튀어나올 뻔한 말을 꾹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22325649.jpg“네.”

16551122325657.png“잘 주무시더라.”

16551122325649.jpg“네?”

16551122325657.png“하지만 세상이 여기서 더 어지러워지면 못 주무시겠지.”

16551122325649.jpg“!”

카르둔은 놀라서 라나문을 쳐다보았다.

16551122325649.jpg“그 말씀은 혹시…… 대적자가 되어서 폐하를 지키고 싶으시단 말씀이신가요?”

16551122325657.png“잘 모르겠다.”

눈살을 찌푸린 라나문은 침대로 걸어가 긴 다리를 꼬고 앉더니, 침대 안쪽 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적자가 되어서 라트라실 황제를 지켜야겠다’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기보다는, ‘절대로 대적자는 안 해야지’라던 생각이 약간 흐려진 눈치였다. 이게 좋은 건가? 그런데 대적자란 거, 위험한 거 아닌가? 막상 나태한 도련님이 영웅 놀이를 해본다고 하자, 카르둔은 덩달아 걱정이 되어 수려한 옆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16551122325657.png“생각을 좀 해보지.”

16551122325649.jpg“생각이 끝나더라도…… 저희 측에서는 먼저 그 하얀 머리를 만나자 청할 방도가 없지 않나요, 도련님?”

16551122325657.png“내가 진짜 대적자고. 그쪽이 진짜 대적자의 스승이라면 또 설득하러 오겠지. 네 말대로 내가 먼저 그자를 부를 수는 없으니 어차피 생각할 시간은 있어.”

16551122325649.jpg“도련님!”

16551122325657.png“그편이 국서 자리에 더 빠른 것도 같고.”

16551122325649.jpg“네?”

16551122325657.png“대적자가 되면 국민들이 좋아하겠지. 귀족들은 이미 상당수가 나를 지지하고. 국민들까지 나를 지지하게 되었을 때, 폐하께서 과연 다른 사람을 국서로 삼으실 수 있을까?”

16551122325649.jpg“!”

16551122325657.png“바삭하게 튀긴 빵. 크림 얹고 잼 빼서. 버터는 조금. 수프는 브로콜리.”

아침 메뉴를 고르듯 잔잔하게 중얼거린 라나문이 진짜로 아침 메뉴까지 즉석에서 골라 부르자, 카르둔은 조물거리던 수건을 내려놓고 후다닥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고 있었다. * * *

16551122385714.png“어제는 재밌게 보냈겠지.”

하이신스 황제가 갑자기 중얼거린 소리에, 맞은편에 선 비서가 “네?” 하고 어리둥절해 되묻다가 다급히 대답했다.

16551122325649.jpg“예, 예. 어제는 외삼촌의 생일이라 가문 사람들이 다 같이 모였습니다. 또 좀비 같은 게 나올까 봐 병사들이 손님보다 더 많았지만요.”

하이신스 황제는 ‘무슨 소리냐’는 듯 비서를 보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22385714.png“그래. 잘됐군.”

어제가 라틸의 생일이었다는 걸 떠올리다가 나간 혼잣말이지만, 굳이 이 사실을 비서에게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하이신스는 후궁 여섯 명 사이에 둘러싸여 행복해했을 라틸을 떠올리자 기분이 나빠져서 서류를 책상 위에 ‘탕’ 하는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별개로 서류 내용 자체도 좋은 소식이 아니긴 했다.

16551122385714.png“좀비들에겐 이성이 없다는군.”

이미 짐작한 소식이긴 했지만.

16551122325649.jpg“예. 전설이 정말이었습니다.”

비서는 심각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16551122325649.jpg“원래 상태로 돌릴 수 없다면 좋았을 텐데요.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지금 가둬둔 좀비 중엔 귀족들이 많다 보니 좀 그렇잖아요.”

처음으로 등장한 좀비 레들러부터가 귀족 영애였고, 두 번째 희생자 남자 역시 귀족이었다. 이후 희생자들 역시 평민 출신 관리와 귀족들이 섞여 있었다. 문제가 되는 건 귀족 좀비들이었다. 그들 가문 사람들은 좀비가 되어도 귀족은 귀족이라며, 좀비가 된 귀족들을 죽이지 않길 원했다. 데려가지도 않으면서.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하이신스도 학자들을 동원해 좀비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지, 혹시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진 않은지를 시험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 도착한 연구 결과는 좀비는 이성이 없단 사실을 확실하게 알리고 있었다. 하이신스는 새 종이를 꺼내 그 위에 지시서를 적고 사인을 한 다음, 기존에 올라온 서류와 클립으로 함께 집어 건넸다.

16551122385714.png“더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그들을 감옥에 둘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테니…… 모두 죽여라.”

16551122325649.jpg“예.”

16551122385714.png“하지만 그 전에.”

16551122325649.jpg“네.”

16551122385714.png“타리움에 사절을 보내 성기사를 보내 달라 청해라. 혹시 처리 과정에 실수가 생겼다간 일이 복잡해질 테니.”

말이 좋아 ‘실수’이지, 좀비를 죽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라면 평범한 실수가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좀비로 변한다는 건데.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 아니던가.

16551122325649.jpg“얼른 전하겠습니다.”

긴장한 비서가 얼른 돌아섰다.

16551122385714.png“잠시.”

하지만 하이신스는 비서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그를 다시 재차 불렀다. 비서가 돌아오자 하이신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품 안에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16551122385714.png“어제가 라트라실 황제의 생일이었지. 선물이라고…… 함께 보내라.”

비서는 어리둥절해서 작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라트라실 황제의 생일 선물은 이미 생일 전에 도착하도록 기한에 맞추어 사절단을 따로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하이신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비서는 ‘아, 클라인 황자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스스로 납득하고서 꾸벅 인사를 올리고 얼른 복도로 나갔다. 비서가 나가자 하이신스는 괜히 어색하게 책상을 두드리다가 서랍 문을 이유 없이 열었다가 도로 닫고서 헛기침을 했다. * * * 현재 감옥에 가둬둔 연회장 습격 사건 당시의 좀비들을 전부 죽일 거란 소식은 얼마 가지 않아 다가 공작의 귀로도 들어갔다. 사라진 딸의 행방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해 몹시 날카로워진 다가 공작은, 좀비들을 죽인단 소식에 또렷한 이유도 없으면서 화를 냈다.

16551122325649.jpg“뭐? 좀비를 죽이다니. 하이신스 그 황제가 드디어 미쳤군!”

하이신스 황제가 어떤 명령을 내리건, 다가 공작에겐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위였는데. 딸이 실종돼버리자 그에 대한 분노와 걱정까지 모두 다 하이신스에게로 향한 탓이었다.

16551122325649.jpg“그놈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측근 귀족은 어리둥절해 물었다.

16551122325649.jpg“하면 공작께선 좀비들을 살려둬야 한단 뜻이시오?”

다가 공작은 대답할 말이 없자 한 번 더 성질을 내고서 괜히 아이니에 관한 이야기로 화살을 돌렸다.

16551122325649.jpg“제 부인이 사라졌는데. 일국의 황후가 사라졌는데, 좀비나 죽이고 있다니!”

16551122325649.jpg“…….”

소식 없는 딸을 떠올리자 재차 괴로워져서, 다가 공작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서 힘없이 끙끙댔다. 하지만 곁에 있던 동료 귀족이 가버리자마자, 다가 공작은 손을 내리고서 집사에게 감옥에서 근무하는 ‘끈’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16551122325649.jpg“부르셨습니다, 공작님.”

몇 시간 뒤 ‘끈’이 찾아오자 다가 공작은 차갑게 물었다.

16551122325649.jpg“황제가 좀비들을 전부 처리할 거란 소식은 들었느냐.”

기밀이 아니기에 ‘끈’은 자신도 들었다고 바로 대답했다. 대답을 듣자마자 다가 공작은 소파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차갑게 지시했다.

16551122325649.jpg“만약을 대비해야겠다. 황제가 좀비들을 다 없애기 전에, 그 좀비들에게서 혈액을 빼내 가져와라.”

뜻밖의 지시에 ‘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16551122325649.jpg“좀비 혈액을요? 그걸 어디에 쓰시려고…….”

다가 공작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위험하게 비틀어 올렸다.

16551122325649.jpg“쓸 데야 많지.”

다른 곳에 유출한 다음 황제의 무능이라 해도 좋고. 유출했다 자체적으로 해결한 다음 아이니의 공으로 돌려도 좋고 아니면…….

16551122325649.jpg‘황제를 감염시킨 다음 아이니만 통제할 수 있다고 해도 괜찮고.’

  * * * 생일이 지난 라틸은 자신의 세상이 이전과 조금 달라졌단 걸 인정해야 했다. 잔을 보면 자신의 목덜미로 포도주를 붓던 라나문이 떠올랐고, 평범한 셔츠를 봐도 붉게 젖어 축축하던 라나문의 셔츠가 떠올랐다. 라틸은 남자의 살이 그렇게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하이신스와 키스는 했다. 데이트를 했고 가벼운 입맞춤부터 깊은 입맞춤까지 모두 나누었다. 손을 잡기도 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잠들기도 했다. 하지만 라틸은 하이신스의 온몸을 만져보진 못했다. 라틸이 건드려 본 하이신스의 몸은 손과 목덜미, 머리, 단단한 팔, 허벅지 정도였다. 그러나 라나문은…….

16551122445956.png“후.”

라틸은 라나문의 살짝 찡그린 이마와 부드러운 머리카락, 촉촉한 이마, 야한 눈동자를 떠올리고서 부채를 꺼내 빠르게 얼굴을 부쳤다. 그렇게 단단한 근육과 그렇게 부드러운 살결이 공존할 수 있다니. 물론 라나문도 온몸을 다 건드려 본 건 아니었다. 상체는 다 건드려 봤지만, 바지는 차마 벗기지 못하고 위로만 더듬거렸다. 용기를 가지고 손을 넣어 보았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도로 빼는 바람에. 게다가 라나문의 그 커다란 손.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심장 가까이 감싸던 손을 떠올린 라틸은 괜히 발가락이 오그라들어서 부채질을 더욱 빠르게 했다. 간만 봐도 이렇게 좋은데. 끝까지 가면 대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묘한 기대감과 흥분, 그리고 약간의 긴장에 눈앞의 글자가 어수선하다.

16551122325649.jpg“폐하?”

그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지 시종장이 어리둥절해 불렀지만, 평소와 달리 라틸은 후궁들에 관해 시종장에게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 없어서 그냥 씩 웃기만 했다.

16551122325649.jpg“얼굴이 붉으십니다. 열이 나는 게 아닐까요?”

그래도 얼굴색까지는 통제할 수 없었지만.

16551122445956.png“아닙니다.”

라틸은 얼른 고개를 저은 다음 시계를 확인하고서 부탁했다.

16551122445956.png“국무회의가 끝난 다음에 칼라인을 불러 줘요. 같이 식사하자고.”

16551122325649.jpg“예.”

그리고 오전의 업무를 모두 마친 뒤. 식당으로 가자 칼라인과 식사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라틸은 칼라인에게 웃으면서 다가가려다가, 단추 세 개를 풀어헤친 그의 셔츠를 보고 시선을 내리깐 채 상석으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16551122475345.png“주인?”

칼라인은 라틸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자 의아해서 상체를 라틸 쪽으로 숙였는데, 그 바람에 라틸은 아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야 했다. 칼라인은 대번에 라틸이 왜 저러는지를 눈치챘기에, 굳이 놀리거나 ‘왜 그러시냐’면서 장난스럽게 캐묻는 대신 라틸이 고개를 돌린 틈에 단추를 두 개 더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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