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역시 칼라인에게 물어봐야겠다2021.12.26.
그 시각. 클라인은 카리센에서 가져온 독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닐은 클라인의 눈치를 보면서 몰래몰래 병에 물을 탔다. 평소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겠지만, 지금 클라인은 술에 취할 때가 아니었다. 술로 아픈 마음을 누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술에 취해 라나문 방으로 뛰어 들어가 해코지라도 하려 들면 어쩐단 말인가. 그랬다간 황제에게 밉보여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아무리 클라인이 카리센의 황자라지만, 잠자리에 쳐들어와 행패를 부렸단 이유라면 하이신스 황제도 항의할 수 없을 테니.
“폐하는…… 대체 그 족제비 같은 놈이 어디가 예쁜 거지?”
“족제비 같아서 예뻐하시는 게 아닐까요? 족제비는 정말로 예쁘니까요.”
눈치 없는 악시안이 옆에서 중얼거리자마자 바닐은 들고 있던 얼음통으로 그의 등을 쳐버렸다. 악시안이 ‘네가 날 쳤어?’ 하는 눈으로 보았으나, 바닐은 화가 나서 무섭지도 않았다.
“좀 닥치세요. 꼭 전하 앞에서 말을 고따위로 해야 합니까?”
바닐이 목소리를 낮추어 으르렁거리자 악시안은 불만스레 입을 닫았다. 바닐은 술에 얼른 얼음이랑 물이나 타라면서 악시안을 닦달하다가, 클라인이 재차 술을 또 한 병 비우자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전하. 차라리 하이신스 폐하께 부탁하면 어떨까요?”
클라인이 새 술병을 뜯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형님한테 뭘.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법을 전수해 달라 하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클라인은 곧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하긴. 라나문 그놈이 뭘 어째도 폐하의 진짜 사랑은 그자도 나도 아냐. 우리 형님이지.”
비웃음은 곧 슬프고 처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자신이 휘두른 창에 자신이 찔린 게 분명했다. 공격 상대인 라나문은 애초에 여기 있지도 않으니.
“…….”
잠시 멍하게 허공을 보던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술병을 마저 뜯은 다음 잔에 콸콸 쏟듯이 따르더니, 바닐이 물을 섞기도 전에 마셔버렸다. 바닐은 방금 뜯은 술병을 얼른 가져가 황급히 몸을 뒤로하고서 거기에 물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걸 부탁하잔 게 아니고요. 왜, 하이신스 폐하께서 라트라실 폐하께 ‘내 동생 좀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고 좀 언질을 해주십사 하는 거죠.”
악시안도 가만히 있다가 거기에 말을 보탰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카리센도 타리움만큼 강대한 나라입니다. ‘부탁’을 받으면 라트라실 황제도 무시할 순 없을 겁니다.”
“네, 전하. 하이신스 폐하도 타리움에서 온 후궁을 총애하진 않으시지만 예의는 갖추어서 대해요. 타리움 출신이니까요.”
귀가 솔깃한지 클라인이 술을 위장에 들이붓길 멈추고 잠시 컵을 내려놓았다. 이 틈을 타서 둘은 재차 클라인을 설득했다. 하이신스가 나서준다면 효과는 이럴 거다, 이건 절대로 이상한 게 아니다, 원래 강대국에서는 정략적으로 후궁을 보내더라도 애프터 케어는 확실하게 해준다, 클라인은 하이신스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니 부탁한다면 당연히 해줄 거다 등등.
“…….”
그러는 동안 클라인은 입을 다물고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멈추고 기대에 찬 눈으로 클라인을 보는 순간.
“별로.”
클라인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다시 술잔을 쥐었다.
이미 술에 취해 불그스름해진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평소엔 화가 나면 성질을 부릴 텐데. 지금은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제안을 한 부하들에게 성질도 부릴 수 없었다. 그는 바닐과 악시안의 멱살을 한쪽씩 잡고 묻고 싶었다. 형님은 폐하가 진짜로 사랑하는 남자인데. 어떻게 형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겠냐고. 그러면 자신이 너무…… 너무 비참해지지 않냐고. 그러다 밖에서 들려오는 “헛! 헛! 헛!” 하는 요상한 소리를 들은 클라인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창가로 다가갔다. * * * 소리를 낸 사람은 상의를 탈의한 대신관이었다. 그는 편한 바지 차림으로 산책로를 뛰고 있었는데, 뒤에는 성기사들이 다 비슷한 차림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구령을- 맞춰서- 하나!”
“위대한!”
“박자를- 맞춰- 둘!”
“신!”
“하나!”
“신을!”
“둘!”
“찬양한다!”
대신관은 성기사들을 지휘하면서 연무장을 향해 열심히 뛰어갔다. 이게 다 조금 전 본 것 때문이다. 황제가 눈앞에서 술병을 끌어안고 라나문을 데려가는 걸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것이 들어와 버렸다. 황제가 그자를 데려가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이. 자신이 황제를 세속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 또 그러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분명 황제를 좋아했지만 그건 세속적인 사랑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왜 황제가 눈앞에서 다른 남자를 데려가는 게 싫은 걸까? 이건 어떤 감정인 걸까?
‘질투를 없애야 한다. 좋지 않다.’
연무장에 도착한 그는 목각인형 앞으로 다가가, 거칠거칠한 천을 주먹에 대고서 자세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목각인형을 제대로 내려치기 전. 가장 뒤쪽에서 따라오던 백화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혼란스럽다. 질투란 게 생기고 있어.”
대신관은 솔직하게 털어놓고서 커다란 주먹을 쥐고 인형을 빠르게 내리쳤다. 주로 머리를 위주로 몇 번 공격하자 나무 인형은 맥없이 ‘빠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백화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재차 말을 걸었다.
“후궁에 들어온 이상 그런 감정도 각오를 해야죠. 질투는 사람이 가진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뭐 하러 그리 없애려 하십니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감정은 좋지 않다. 스스로에게도 상대에게도.”
“그 마음을 잘 간직해 두었다가 동력으로 쓰면 됩니다.”
“동력이라니?”
“명색이 대신관이신데. 설마 후궁 자리로 만족하실 건지요?”
“!”
* * *
“이젠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라틸에게 따로 생일 선물을 주려 했던 칼라인은, 결국 주지 못하고 가져오게 된 선물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 타시르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타시르는 자연스럽게 창문으로 걸어오더니, 창틀에 꽃받침을 하고서 활짝 웃었다.
“또 뵈니 기쁩니다, 칼라인 님.”
“내가 떠난 걸 알고 있었나?”
“칼라인 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폐하가 많이 속상해하셨거든요.”
“…….”
“폐하는 칼라인 님 방을 늘 쓸쓸한 얼굴로 다니시고. 저는 늘 폐하를 간절한 눈으로 좇고. 그러니 모를 수가 없지요.”
이윽고 타시르가 작게 ‘못 알아보면 바보들이죠’라고 덧붙이며 눈웃음을 짓자, 칼라인은 덩달아 헛웃음을 터트렸다. 돌려서 다른 후궁들은 모두 바보라 말한 게 아닌가.
“왜 떠나셨던 겁니까?”
“네게 말할 필요 없는 이유로.”
더 캐묻는 대신 타시르는 들고 온 까만 술병을 내밀었다.
“짠. 그럼 말하지 말고. 이거나 같이 마실까요?”
칼라인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타시르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넌 잘 웃고. 머리는 좋지. 그래서 속을 더 알기가 힘들어.”
“칭찬이죠?”
“내 친구가 너 같은 성격을 흉내 낸 적이 있었다.”
“애정이네요!”
“알고 보니 그냥 사이코였지. 널 보니 그자 생각이 나는군.”
“아. 애증.”
“‘애’자를 억지로 끼워 넣지 마라.”
칼라인은 차갑게 말했지만, 방 안을 눈으로 가리키며 허락해주었다.
“들어와.”
* * * 라틸은 어떤 게 자신의 머리카락이고 어떤 게 라나문의 머리카락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술에 젖은 라나문의 셔츠는 이미 침대 모서리 위로 올라가 있었고, 단정한 그의 바지도 지퍼가 풀려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었기에, 라틸은 라나문의 몸에도 포도주가 배어서, 그의 피부가 아주 촉촉하고 좋은 맛이 난단 걸 알 수 있었다. 라틸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그의 피부가 좋았다. 그리고 라나문 역시도 그런 게 분명했다.
“입술이 부은 거 같아.”
라틸은 라나문의 가슴에 뺨을 댄 채 숨을 죽여 쉬다가 중얼거렸다. 키스도 많이 하면 지치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나문은 말없이 라틸의 등을 감싸 몸이 자신에게 꽉 붙도록 했다. 라틸의 다리에 그가 몹시 흥분했단 증거가 닿았다.
“넌 괜찮아?”
“입술보다 다른 데가 더 신경 쓰입니다.”
라틸이 손을 올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팅팅 부은 라나문의 입술 가를 만지작거리자, 그가 쓰린지 눈썹을 찌푸렸다. 라틸은 그의 입술을 쓸다가 귓가를, 뺨을 쓸어보았다. 라나문의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어져 검은 비단실처럼 보였다. 그 머리 중간중간에는 라틸 자신의 머리카락도 섞여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어서, 라틸은 손빗으로 자신의 머리카락만 모은 다음에 돌돌 말아 옆으로 늘어뜨렸다. 그러나 라나문은 지금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 건지, 이런 사소한 동작에도 흥분했다. 그는 입술을 짓씹더니, ‘젠장’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대체 폐하는 왜-.”
그가 머리카락이 감싸지 않은 쪽 목덜미를 입에 머금자, 라틸은 간지러운 느낌과 말랑한 느낌을 동시에 받고서 어깨를 움츠려다. 목에서 다시 입술로 올라온 그가 이마를 붙인 채 라틸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이 이상 나가고 싶다고, 완전히 라틸의 남자가 되고 싶다고 온몸으로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폐하.”
그가 속삭이자 귓가에 대고 숨결을 불어 넣는 것처럼 목덜미가 간지러워졌다. 허락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라틸도 원했다. 그를. 하지만 라틸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의 위에서 내려와 물을 찾았다.
“목이 좀 마른데.”
“제가-.”
“직접 마실게.”
아니면 또 너한테 부을 거잖아? 라틸은 근처에서 길쭉한 손잡이를 가진 주전자와 작은 물잔을 찾은 다음 목을 축였다. 라나문이 자신의 몸에 와인을 부을 때부터 시작된 갈증은 지금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그 탓에 분위기가 아찔한 걸 알지만 물을 찾아 침대에서 나온 것이었다. 라틸은 다시 물 한 잔을 따라 마시면서 시계를 보았다. 들어온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와.’
속으로 탄식이 나왔다. 들어와서 두 시간 내내 라나문과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매만진 것이다. 입술이 아픈 게 당연했다. 물을 마시자 그래도 아까 한껏 달아올랐던 몸이 조금 괜찮아졌다.
“넌 목 안 말라?”
라틸은 두 시간이나 입을 맞출 수 있다는 걸 새삼 신기하게 여기며 라나문을 보았다. 라나문은 한쪽 팔로 상체를 받치고 옆으로 길게 누운 채 입을 꾹 다물고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라틸이 묻자 팔에 힘을 풀고 완전히 몸을 옆으로 뉘면서 차갑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여서, 라틸은 잔을 내려놓고 라나문의 곁으로 다가갔다.
“진짜 괜찮겠어?”
“제가 지금 원하는 건 물이 아니라 폐합니다.”
그가 눈동자 가득 열망을 품고서 바라보자, 라틸은 얼굴에 열이 올라와서 시선을 피했다. 실제로도 그의 온몸이 지금 얼마나 달아올라 있는지 내내 만지작거렸던 라틸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쟤는 진짜…… 안 그럴 것 같은데 저런 말을 은근히 잘한다니까. 게다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전 법으로 공인된 폐하의 남자인데. 왜 폐하께서 자발적으로 금욕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원해서 이러겠어? 라틸은 속으로 항의했다. 하지만…… 오늘 라나문과 만든 끈적한 분위기를 도로 거두어들여 말린 건 분명 라틸 본인이었다. 억울하긴 하지만 어쨌든. 라틸은 속으로 역시 칼라인에게 ‘아직 임신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걱정 없이 즐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칼라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데에도 아마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할 테지만, 어쨌든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라틸이 돌아간 후. 라나문 역시도 밤새 라틸을 끌어안고서 고민한 자신의 결심을 시종인 카르둔에게 알렸다.
“할까. 대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