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라나문 라나문 라나문2021.12.22.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 건 라나문이 포도주에 목욕했기 때문일까? 라틸은 한 손은 라나문을 쥐고 한 손을 술병을 끌어안고서 재빨리 균형을 잡았다.
“고맙다.”
라틸은 손을 빼내려 했으나 라나문은 손에 힘을 준 채 라틸을 놓지 않았다. 사실 힘을 준다면 뿌리칠 수 있었고, 명령을 해도 물러나게 할 수 있었으나 라틸은 그러지 않았다. 노란 달빛과 백색 조명, 그 아래에 서 있는 라나문. 이 모든 게 라틸의 머리를 엉망으로 휘저었다. 라틸이 그를 거부하지 않고 서 있자 라나문은 손에 약간 힘을 주어 꽉 잡더니, 라틸을 자신 쪽으로 끌었다. 나란히 걸어가고 있자니 아까보다는 한결 안정이 찾아왔다. 반대로 심장은 더욱 거세게 뛰었지만. 바닥에 깔린 돌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간지럽다. 귀가 심장 안에 있고, 누군가 그 앞에 대고 머리카락을 바스락거리는 것처럼. 라틸은 흐트러진 라나문을 떠올리고, 자신이 그런 라나문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데 아찔해졌다. 방 안에 들어간 라틸은 한 번 더 술병을 꽉 끌어안았다. 식사 내내 덤덤하게 있던 게 신기할 정도로 이곳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따뜻한 주홍색으로 빛나는 은은한 조명은 평소보다 좀 덜 밝았고, 커튼은 꼼꼼하게 내려져 조금의 달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부드러운 캐노피가 침대를 잔 구름처럼 휘감고 있었다. 라틸은 술병을 더 꽉 끌어안았다. 라나문이 흐트러지기 전에 이쪽이 먼저 긴장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술. 술을 좀 마셔야겠다.’
라틸은 침대를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라나문이 자신을 그쪽으로 이끌자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끌어안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술부터 마시자.”
자연스러운 제안이었으나 라나문은 라틸을 꽤 많이 불신하고 있었다.
“설마 제가 술에 취해 흐트러지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럴 리가.”
라틸은 조금 골이 나서 퉁명스럽게 항의했다.
“넌 술에 취해도 안 흐트러지잖아.”
라나문의 입꼬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또렷하게 올라갔다. 라틸은 술병을 그에게 내밀고서 황급히 침대로 가 캐노피를 전투적으로 밀어내고 안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잔만 따라줘.”
라틸의 말뜻은 코르크 마개를 딴 다음 저쪽 테이블 위에 있는 길쭉한 유리잔에 술을 따라서 한 잔 가져다 달란 뜻이었다. 지금 마음이 좀 심란하니까. 아무래도 알코올이 뒤에서 뻥뻥 걷어차 주는 용기가 필요한 듯하니까. 하지만 라나문에겐 라틸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네.”
순순히 대답한 라나문은 코르크를 따더니, 병을 자신의 목 옆에 대고 기울였다.
“!”
라틸은 눈이 커다래졌다.
‘술을 왜 거기 따라?’
불그스름한 액체가 라나문의 목덜미를 따라 흘러가더니, 깔끔한 하얀 셔츠를 안에서부터 물들이기 시작했다. 술에 젖은 셔츠는 그의 몸에 완전히 달라붙어 근육의 형태를 남김없이 드러냈다.
내 술.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갈증이 심하게 났다. 용기를 줘야 할 술이 저기 가서 직접 용기를 부르고 있다니. 술이 더이상 나오지 않자 라나문은 병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카펫에 떨어진 빈 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으나, 라틸의 심장에선 굉음이 났다.
“라나문.”
이유도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른 라틸은 침을 삼키고 싶은 걸 꾹 참느라 손가락에 힘을 꽉 줬다. 라나문이 가까이 올수록 아찔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아름다운 라나문은 술에 젖으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나는…… 그냥 잔에 따라 달라고 한 건데. 술.”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라나문이 라틸의 앞으로 와 섰다. 바로 앞에 붉게 변한 셔츠와 그 아래로 반투명하게 보이는 그의 살결이 있었다. 그의 호흡마저 보이는 듯했다. 과일 향 섞인 술 냄새가 강하게 풍겨 왔으나, 라틸은 이게 술 냄새인지 라나문의 향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오늘 폐하의 잔은 저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구나, 라나문! 저런 말을 어떻게…… 어떻게 대놓고 하지? 민망하지만 또 잘 어울리긴 해서, 라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나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은 홀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잔이라 했지만, 라틸이 보기에 그는 술 그 자체였다.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풍겨 오는 향만으로도 취할 것 같아서 라틸은 다시 고개를 내렸다. 코앞에는 젖은 옷 탓에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의 복부. 포도 향이 나는 그곳은 딱 달라붙은 옷 때문에 적당히 자리 잡은 근육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만져도 될까? 만져도 되겠지. 내 남자니까. 그런데 만져도 될까? 만져도 되는 거 알잖아. 알면서 왜 그래? 그런데…… 진짜 만져도 되는 거야? 된다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얠 만진다고? 머릿속에서 야한 라틸과 겁 많은 라틸이 자꾸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천천히 라나문의 옷, 술에 젖어 축축해진 옷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혀를 내밀어 술에 흠뻑 젖은 셔츠를 슬쩍 핥아보자, 강한 주향에 코가 알싸해졌다. 순간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던 라나문의 복부가 크게 움직였다. 라틸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젠장, 폐하.”
무례한 말과 공손한 말을 동시에 뱉은 라나문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인내심이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서 견디기 힘들단 것처럼.
“어떻게 이런걸.”
먼저 술을 자기 몸에 들이부은 라나문이 할 말은 아니었다. 라틸은 라나문처럼 ‘젠장’ 하고 중얼거리고 싶어졌다. 솔직히 저런 얼굴은 반칙 아닌가? 그냥…… 그가 흐트러질 정도까지만 즐기다가 옆에 두고 한숨 자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시작부터 저렇게 술을 들이부어 버리다니.
“네가 먼저 했잖아.”
작게 항의하자마자 라나문이 라틸을 안아 들더니 곧장 입을 맞춰왔다. 무겁지 않나, 아주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뜨거운 숨결이 입술과 치아를 누르자마자 그런 고민은 싹 날아갔다. 안 무거우니 들겠지. 라틸은 두 다리로 라나문의 허리를 감싸고 두 팔로는 라나문의 목을 감싸고서 그의 입술로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먼저 라나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라틸은 그의 온몸에서 나는 달콤한 포도주 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입안에도 포도주를 머금고 있었나. 늘 차갑게 굴면서. 그의 혀와 그의 숨결은 제 주인과 달리 뜨거웠다. 아예 한 손으로 라틸을 받친 라나문이 다른 한 손을 라틸의 셔츠 안쪽으로 넣어 등을 쓸자, 라틸은 그의 입에서 자신의 입을 떼고 머리를 뒤로 올렸다. 손은 뜨겁고 커다랬으나 맨살에 닿자 순간 차갑게 여겨지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약간 뜨거운 물 안에 들어갔을 때 춥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곧 그런 감각이 가라앉으며 커다란 손의 온기가 완전히 느껴졌다. 그의 손은 라틸의 등을 한 번 크게 쓸고 가더니, 이번에는 라틸의 목덜미를 뒤에서부터 가볍게 쓸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라나문은 캐노피를 걷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 라틸이 자신의 위로 올라오도록 누웠다. 라틸은 그제야 그의 허리에서 다리를 풀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를 깔고 앉은 모양새가 되었단 걸 알아차리자, 다시 얼굴과 목덜미에 열이 올라왔다. 그의 단단한 배가 조금씩 꿈틀거리는 게 허벅지와 맞닿아 그대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라틸을 위로 보내고 누웠으면서, 라나문은 주도권을 넘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라틸이 진정할 새도 주지 않고 라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등과 허리를 쓸고는, 자연스럽게 얇은 재킷을 벗겨냈다.
“전 폐하의 등이 좋습니다.”
그가 재킷을 뒤로 젖혀 벗겨내며 속삭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등이 좋았습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처음 멜로시 영지에서 인사했을 때. 나도 기억하거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했잖아.”
“등이 참 곧네, 생각했습니다. 할 필요 없는 이야기니 안 했을 뿐.”
“취향…… 이상한데.”
재킷을 뒤로 넘겨 벗기는 바람에, 라틸은 라나문의 배에 대고 있던 손을 떼야 했다. 재킷이 뒤로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라틸의 팔도 조금 뒤로 넘어갔다.
“여기서 보는 폐하가 얼마나 자극적인지. 폐하는 평생 모르시겠죠.”
“난 나르시시즘은 없어.”
라나문은 재킷을 벗겨줄 것처럼 굴더니, 재킷이 라틸의 팔꿈치 부위까지 내려가자 손을 떼고서 짓궂게 웃었다. 어라, 생각하는 찰나 라나문의 손이……. * * *
“라나문 님과 폐하가 생일이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카르둔이 흐뭇하게 중얼거리자 라나문을 담당하는 다른 하인들도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 하나는 엄지 두 개를 치켜세우고서 자랑스럽게 춤을 췄다.
“우리 라나문 님 얼굴을 보세요. 생일이 달랐어도 결국 총애는 우리 라나문 님이 받았을 겁니다.”
“그럼요. 생일이 같아서 함께 밤을 지낸단 건 다 핑계죠.”
“폐하는 그냥 라나문 님과 함께 있고 싶으신 거예요.”
하인들이 연달아 퍼붓는 덕담에 카르둔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쩌면 저들은 아부를 하느라 빈말을 던지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 빈말이 죄다 진실인 걸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밝디밝은 이쪽과 달리 다른 후궁들의 방은 그리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스타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트리는 그 주위에서 마음 여린 도련님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연신 초조하게 왔다 갔다 이동했으나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후궁의 시종인 그가 다른 후궁을 데리고 자러 들어간 황제를 불러올 수는 없었으니까.
“도련님…….”
트리는 떨리는 등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서 다짐했다.
“도련님. 제가 진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나문 그자를 폐하 눈앞에서 치워드릴게요. 꼭 말입니다.”
게스타는 우느라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불에 머리를 파묻은 채 손만 뒤로 뻗더니,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트리. 내가 전에 만든 카드. 그거 좀 가져다줄래?”
그 엉성한 수제작 카드를 말씀하시는 건가? 왜 갑자기 그걸 가져오라 하는진 알 수 없으나, 트리는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게스타에게 위로가 된다면 모두 가져올 수 있었다.
“네, 잠시만요!”
트리가 카드를 찾기 위해 잠시 방을 나간 사이. 얼굴을 묻고 내내 훌쩍이던 게스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가가 젖어 있긴 했으나 그의 표정은 방금 막 갈아낸 검처럼 서늘했다.
“라나문.”
이전에도 라틸이 라나문 방에 몇 번 가긴 했지만,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눈앞에서 그를 데려가는 걸 본 건 기분이 전혀 달랐다.
“라나문.”
재차 라나문의 이름을 읊은 게스타의 입가에서 빠드득 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나문.”
세 번 그의 이름을 읊은 게스타는 ‘죽인다’고 말을 할 뻔했으나, 곧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아직. 아직은 안 된다. 아트락시 공작은 라틸의 황위에 도움이 되는 자였다. 아직 죽이는 건 안 된다. 하지만…….
“폐하를 본 눈, 폐하와 입 맞춘 혀, 폐하를 느낀 손, 폐하에게 닿은 피부, 전부 다 가만두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