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좋은 자리2021.12.15.
칼라인은 아직도 라틸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감싸고 있었다. 라틸은 자신이 조금만 신호를 보내도 그가 대번에 자신의 몸을 꽉 끌어당겨 밀착시키고, 종국엔 그보다 더 가까워지려 시도할 거란 걸 알았다. 그에게선 차가운 피부와 뜨거운 욕망이 함께했다. 그의 입술은 차가웠지만 구석구석 라틸을 헤집고 싶어 하는 숨결은 뜨거웠다. 너무 차가운 곳에 닿으면 화상 증세가 나타난다던데. 라틸에겐 칼라인이 그랬다. 그는 지독하게 차가워서 오히려 뜨겁게 여겨졌다. 라틸은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위험하단 데는 차이가 없을 테니. 사람인 후궁이어도 나쁜 마음을 먹으면 위험할 텐데, 뱀파이어 후궁이라. 그 위험성은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흥분해서 피를 마시려 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무의식중에 칼라인의 입술을 계속 매만지던 손길은, 그가 직접 손을 뻗어 라틸의 손을 내리는 바람에 가로막혔다. 라틸이 불만스럽게 쳐다보자 칼라인이 라틸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이젠 제가 주인을 무서워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작은데도 귓가에 솜방울처럼 기어들어 왔다. 반사적으로 등이 쭈뼛한 라틸은 괜히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그러나 손에 잡힌 건 단단하고 커다란 근육이었고, 라틸은 자신이 칼라인의 팔을 문질렀단 걸 문지른 후에야 알아차렸다.
“나를 왜?”
칼라인은 라틸의 허리를 좀 더 자신에게 붙이다가, 나중에는 라틸을 놓더니 베개에 이마를 대며 원망했다.
“이렇게 입 맞추시고. 이렇게 거두시고.”
“고작 이 정도로 무서워?”
라틸은 그의 맨살을 간지러울 정도로만 꼬집었다 풀었다.
“그럼 난 네가 뱀파이어란 걸 알고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해봤어?”
“주인의 ‘고작 이 정도’에 제가 얼마나 휘청이는지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라틸은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졌다. 이러고 있으려니 ‘이래도 되나? 얘 뱀파이어잖아’라는 자괴감도 들긴 했으나, 내내 빈방을 오가며 느낀 쓸쓸한 기분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칼라인이 차가워서 그렇다고, 라틸은 속으로 확신했다. 추우면 아무 생각도 안 드니까. 그런데 이렇게 차가우니, 칼라인과 키스를 하다가 감기에 걸리면 어쩌지? 그게 가능한 일일까? 거의 15분 정도를 그러고 있고 난 뒤에야 라틸은 몸을 일으키고서 그에게 물었다.
“넌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냐? 내가 안 무서워하면 오겠다더니. 안 무섭다고 네 방에 가서 허공에 말을 몇 번이나 한지 알아?”
“그러셨습니까?”
“당당하게 말하기에 나는 내 마음을 읽을 방도라도 있는 줄 알았다. 아니면 내 목소리를 들을 방도라거나. 근데 아냐. 아무것도 없더라.”
“제가 뱀파이어라고 해서 이상한 능력을 전부 다 부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라틸이 코웃음을 치자 칼라인은 라틸의 손을 가볍게 잡고, 엄지로 라틸의 손바닥을 문지르며 웃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주인의 마음부터 잡았을 겁니다.”
“말은 잘하는데.”
칼라인이 도미스에게 한 말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 걸까. 칼라인이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도미스를 사랑하는 걸 알아서? 아니면 도미스의 눈으로 본 칼라인의 차가운 말이 떠올라서? 이유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무언가 욱 치밀어 올라, 라틸은 칼라인의 입술을 손으로 쥐었다.
“?”
* * * 칼라인이 창문을 넘어 하렘으로 돌아가고 나자마자 라틸은 급격히 찾아온 후회에 시들시들해져서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거렸다.
“내가 거기서 좋다고 반가워할 게 아니었는데.”
왜 거기서 입을 맞춰 버린 거지? 칼라인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알았겠어? 자기 얼굴을 보면 그냥 스르르 화도 풀리고 손도 풀리고 응어리까지 풀리는 황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라틸은 자기 이마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반가운 마음이 가시자, 반갑다고 무작정 좋아할 게 아니었단 게 뒤늦게 떠올랐다. 라틸은 그에게 키스를 퍼붓고 좋아할 게 아니라, 몇 살이냐고 물어봐야 했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는 과정에서 기르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중간에 조금 오해가 있었단 걸 알리면 되지 않는가.
‘아닌가? 기르골 얘기를 하려면 내가 가짜 도미스를 조사했단 이야기도 해야 하나?’
그건 분명 부끄러울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에게 집착하는 것 같으니까. 라틸은 침대 가에 쪼그리고 앉아 발가락으로 카펫의 보풀을 움켜잡고 시근덕거렸다. 어쩌면 이건 도미스 탓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신체 변화에 몰입해서 나타난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를 내내 기다리다가 갑자기 보니까. 그래서 생각 이상으로 반가워한 건지도 몰랐다.
“아. 선인장.”
한참이 지나서야 라틸은 자신이 칼라인을 바로 방에 돌려보내선 안 된단 걸 깨닫고 발을 굴렀다.
‘선인장 화분에 멍청이라 써놨는데!’
* * * 며칠 동안 라틸은 칼라인의 주위를 슬금슬금 맴돌며 보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마자 칼라인을 찾아가서 그의 선인장에서 ‘멍청이’를 지우려 시도했고, 점심때가 되었을 땐 칼라인이 또 사라지진 않았나 슬그머니 또 노크를 했다. 저녁 식사를 하다 보니 ‘이러다 또 도망갔을지 몰라!’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찾아가게 되었다. 라틸이 연거푸 세 번씩 칼라인을 찾아가자 궁인들도 그 방향을 향해 촉각을 내세웠다. 용병왕이 며칠 동안 몸이 아파 두문불출하더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황제가 내내 용병왕을 찾아가니, 다들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용병왕이 겉은 듬직한데 잔병치레가 너무 많다 보니, 황제가 걱정이 되어서 더욱 잘해주는 것’이라 수군거렸다.
“요즘은 칼라인 님이 가장 좋으신가 봅니다, 폐하.”
이틀 뒤에는 시종장이 집무실에서 서류를 살피다가 대놓고 물어볼 정도였다.
“설마요.”
라틸은 단호하게 대답했으나, 말을 뱉고 나니 혹시 칼라인이 자신의 이 말을 어디선가 신묘한 수로 듣는 게 아닌가 불안해져서 슬그머니 덧붙였다.
“칼라인이 싫단 소리는 아닙니다.”
시종장은 라틸이 펜 뚜껑을 괜히 뺐다 끼웠다 손안에서 돌리길 반복하는 걸 지켜보다가, 조금 욕심을 담아 제안했다.
“라나문 님도 좀 챙겨 주세요, 폐하.”
* * *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새 라틸의 생일 전날이 되었다. 평소처럼 업무를 마친 라틸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생일에 대해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타시르는 이미 선물을 주었고, 타시르의 가족들도 타시르를 통해 선물을 보내왔다. 이틀 전에는 아트락시 공작과 재상이 경쟁하듯 가문에서 보내는 선물이라며 포장지까지 휘황찬란한 선물을 보냈다. 아직 게스타와 칼라인, 클라인, 대신관은 선물을 주지 않았지만, 사실 라틸은 선물에는 큰 기대가 없었다. 가지고 싶은 건 가지고 싶을 때 바로바로 가질 수 있었고, 달리 필요한 물건도 없었으니까. 이런 사실을 잘 아는 후궁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이었지 기대는 아니었다. 실제로 라틸은 그들이 무엇을 주든 군말 없이 받을 각오도 했다.
‘라나문!’
그러나 저녁 식사를 반쯤 마쳤을 즈음. 라틸은 빵 사이에 샐러드를 넣어 먹다가 라나문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라틸은 라나문을 흐트러지게 하기로 했고, 라나문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미쳤어. 어떻게 이걸 까먹고 있었지?”
라틸은 포크까지 내려놓고서 중얼거렸다.
‘아니, 까먹을 만했어. 어마어마한 일이 연달아 벌어졌잖아.’
기르골에게 ‘네가 대적자 같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와 결투를 약속했다. 떠났던 칼라인이 돌아왔고, 꿈속에서 도미스가 당하는 수모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렸다. 심지어 과거의 칼라인이 여기에 정점을 찍는 모습까지 보았다. 이후엔 칼라인이 또 하렘을 떠날까 봐 시시때때로 찾아가느라 바빴고, 아트락시 공작과 재상이 어전회의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바람에 귀족들이 두 개 패거리로 갈라질까 봐 중간에서 교묘하게 간섭해야 했다. 그러니 까먹을 수밖에. 하지만 막상 라나문과의 약속을 떠올리고 나자, 라틸은 금세 그 일로 머릿속이 가득해져 입맛이 뚝 떨어졌다. 빵을 씹어도 고소한 향과 부드러운 맛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말랑한 포장지를 씹는 느낌이라, 라틸은 먹던 걸 멈추고 침실로 돌아왔다. 입욕제를 풀어 파랗게 변한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으려니 내일이 너무 막막하게 여겨졌다. 어떻게 해야 라나문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그 말을 주고받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희미한 열기가 감돌았다. 라틸은 라나문과 자신이 말한 ‘흐트러진 모습’에는 성적인 함의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욱 곤란했다. 라나문은 쉽게 흐트러지지 않을 게 뻔하니까. 라틸은 라나문이 감정적으로 변한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는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면서도 차가울 것 같은 남자여서. 온도는 칼라인이 제일 차갑겠지만, 다른 의미로 말이다. 그런 라나문이 자신과 얽혀 흐트러진다고?
“덥네.”
괜히 목덜미부터 귀까지 열기가 올라와서 라틸은 손부채질을 하며 후 후 심호흡을 했다. 시간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느리게 가주었으면. * * *
‘와. 빠르다 빨라.’
시간이 느리게 가길 바라며 고개를 돌리자마자 한 시간이 지나가 있더니,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탄하고 일어났더니 아침이다. 게다가 라나문과 뭘 해야 할지 걱정하느라, 내내 꾸던 그 도미스 꿈도 꾸지 않았다. 연회는 없으나 라틸은 평소보다 좀 더 화려하고 반짝이는 옷을 입으면서, 뒤늦게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대신들은 공식적으로 모두가 놀고먹어야 할 황제의 생일날. 황제가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으니 덩달아 일을 해야 해서 시무룩해져 있었으나, 라틸은 그 부분은 모른 척 지나갔다. 대신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어쨌든 좀비가 나오고 괴물이 나오는 지금 같은 때 커다란 궁전 전체에 화려한 조명을 달고서 밤새워 놀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그날 저녁. 라틸은 마지막 업무까지 확실하게 끝낸 다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서 하렘으로 걸어갔다. ‘간단히 식사’만 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황제의 생일을 그냥 지나가긴 아쉬운지 하렘 내부는 평소보다 훨씬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수풀과 나무 사이사이에 노랗고 하얀 작은 조명이 걸려 있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돌길 양옆을 따라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조명을 심어서, 걷고 있으면 빛무리 사이를 걸어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빛으로 된 그 길을 따라 걸어가 보니 정원의 넓은 잔디밭에 긴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아름다운 여섯 후궁이 평소보다 잘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원래도 아름다운 이들이 특별히 각도까지 잘 설계된 조명을 받고 있으니 과장 없이 정말로 눈이 부셨다. 그러다 라틸을 발견한 여섯 남자가 웃으면서 일어나는데, 해가 저물어가는 그 시간대의 미묘한 바람까지 불어오자 라틸은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황제가 된 게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