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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도미스와 칼라인 (185/367)

186화. 도미스와 칼라인2021.12.08.

기절한 건지, 아니면 울다가 지쳐서 잠든 건지.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배가 쥐어짜이듯 고통스러웠고 도미스는 길거리를 가까스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다니고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다란 빵을 발견한 도미스가 입가에 반사적으로 흘러내리려는 침을 닦을 때까지, 라틸은 이게 굶주림이란 것조차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16551121072401.jpg[배고파. 배고파서 죽을 거 같아. 진짜로 죽을 거 같아.]

다리에 힘이 빠져서인지 도미스는 결국 쪼그리고 앉아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도와주기는커녕 다들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정면만 쳐다보며 걸었다. 도미스가 있는 부근을 지날 때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1655112107241.png‘사람들은 생각보다 냉정하구나.’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거라곤 어린아이들 몇 명뿐. 하지만 그 어린아이들조차도 몇몇은 동정심을 품고 보았으나, 몇몇은 잔인한 호기심을 띠고 있었다. 도미스가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을 먹고서 분수대에서 허겁지겁 목을 축이는 동안 라틸은 걱정이 되었다. 기르골의 말처럼 그 검이 ‘대적자의 검’이라면 도미스는 500년 전 사람이긴 한데……. 지금의 타리움은 괜찮은 걸까. 라틸이 자주 오가는 수도는 치안이 좋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데다 경치도 좋고 화려했다. 최신 과학 기술들이 적용되어 수로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적어도 라틸은 ‘사디’로 돌아다니는 내내 이 정도로 힘들어 보이는 아이들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다른 곳은? 다른 곳은 괜찮은가?

16551121072401.jpg“이봐, 흉하게 뭐 하는 거야! 누가 이걸 마시래!”

그 사이 도미스는 분수대 근처를 지나가던 경비들에게 창의 뭉툭한 끝으로 마구 찔리는 중이었다. 라틸은 멍하게 생각하던 걸 멈추고서 욕설을 퍼부었다. 애가 굶어 죽어갈 때는 쳐다도 안 보더니, 분수대 물을 마시자마자 기가 막히게 나타나서 창을 휘두르다니. 물론 날카로운 창끝으로 휘두르는 건 아니었으나 며칠을 굶은 건지 모를 도미스에게는 이 정도도 치명적이었다.

16551121072401.jpg“목이, 목이 말라서…….”

16551121072401.jpg“꺼지지 못해?”

도미스를 밀어대던 경비병이 호통을 치자 도미스는 배를 부여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람들이 이쪽을 힐긋거리는 걸 느끼며 라틸은 다시 괜히 칼라인을 탓했다.

1655112107241.png‘칼라인! 네 애인 지금 죽어간다! 빨리 와!’

그런데 도미스가 척추가 없는 것처럼 흐물흐물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뒤에서 불렀다.

16551121072401.jpg“거기. 너!”

돌아보자 아까 분수대에서 물을 마시지 말라고 화를 내던 경비 중 하나였다. 창으로 찔러댄 쪽은 아니고, 그 옆에 우두커니 서서 노려보던 쪽. 도미스가 움찔해서 발걸음을 더 빨리하자 경비병은 황급히 쫓아오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16551121072401.jpg“이거 가져가.”

도미스는 때리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실눈을 떴다. 경비병이 내민 건 물병이었다. 도미스가 얼결에 물병을 받아 들고 쳐다보자, 경비병은 큼큼 괜히 헛기침하며 둘러댔다.

16551121072401.jpg“흑마법사들이 어떻게 위장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인심이 각박해.”

라틸은 그 말이 변명이라 생각했으나 도미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기쁜지 코가 찡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훨씬 낮은 온기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 같았다.

16551121072401.jpg“어차피 분수대 물은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지도 않아. 여기서 30분쯤 걸어가면 냇물이 나오는데…… 그걸 떠다 마셔라.”

도미스가 물병을 받고 꾸벅 인사를 하자, 경비병이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도미스는 물병을 끌어안고 뒤돌아 걸어갔다.

16551121072401.jpg“저런 애들이 하나둘이야? 신경 쓰지 마.”

16551121072401.jpg“그래, 저런 거 하나 챙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 챙기면 비슷한 애들이 죄다 몰려든다고.”

뒤에서 경비병의 동료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으나 그래도 도미스는 못 들은 척 꿋꿋하게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까 물병을 건넨 그 경비병이었다.

16551121072401.jpg“왜요?”

도미스가 묻자 경비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16551121072401.jpg“너 갈 데가 아예 없는 거지? 당장 일거리도 없고.”

경비병이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라틸은 ‘안 돼. 듣지 마. 무시해’라고 외쳤으나, 도미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틸은 조금 전 속아 놓고서 또다시 희미한 기대를 품는 도미스가 너무 답답해졌다. 바꿔 생각하자면 이렇게 여리고 착한 아이가 어쩌다가 뱀파이어 로드가 된 건지, 기가 막혔다.

16551121072401.jpg“실은 여기서 좀 떨어진 영지에서 말야. 영주의 성에서 일할 하녀를 찾고 있어.”

16551121072401.jpg“전 보증인이 없어서 그런 자리엔 들어갈 수 없어요…….”

16551121072401.jpg“그곳에 하녀로 하인으로 들어가서 연락 끊긴 사람이 많아.”

16551121072401.jpg“!”

16551121072401.jpg“흉흉하지. 그래서 사람이 잘 안 구해지나 봐. 하지만 넌…….”

경비병은 뒷말을 생략했으나 라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보통 사람은 안 갈 자리긴 한데. 넌 이런 자리라도 급해 보여서. 역시나. 도미스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21072401.jpg“괜찮아요.”

1655112107241.png‘안 괜찮아, 바보야!’

손을 움직일 수 있다면 라틸은 도미스의 이마를 딱 때렸을 것이다. 사람이 실종된다는 곳에 하녀로 가겠다니. 말을 꺼낸 경비병도 신경이 쓰이긴 하는지, 자기가 물어 놓고서 재차 물었다.

16551121072401.jpg“진짜 괜찮겠어?”

16551121072401.jpg“괜찮아요.”

도미스가 다시 대답하자 경비병은 한숨을 내쉬고서 눈으로 성문 근처에 선 여자를 가리켰다.

16551121072401.jpg“저 여자가 그쪽에 일하러 간대. 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볼게.”

  * * * 그 위험한 성에 하녀로 자원할 거라는 여자 ‘안야’는 도미스의 피 안 섞인 동생과 이름이 같았다. 또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는 그곳에 지원하면서도, 경비병이 도미스도 데려가 달라고 하자 ‘그런 위험한 데 저런 애를 데려가라고?’라며 성질을 냈다.

16551121072401.jpg“어차피 이대로 있어 봐야 전 굶어 죽어요.”

하지만 도미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여자는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책임 아냐!’라고 몇 번이나 외치면서도 결국 도미스를 자기가 빌린 마차에 태워 그 영지로 함께 데려가 주었다.

16551121072401.jpg“절대로 내 발목 잡지 마라. 응?”

중간중간 이렇게 협박조로 당부하긴 했으나 툴툴거리는 말투와 달리 꽤 착실하게 도미스를 챙겨주긴 했다. 두 사람은 그 소문 흉흉한 영지에 무사히 도착했고,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처럼 그곳 하녀장은 도미스의 신원을 묻지도 않고 하녀로 고용해 주었다.

1655112107241.png‘진짜 괜찮은가?’

아니, 오히려 하녀장은 신원이 확실한 안야 쪽을 더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래서 더 수상했고.

16551121072401.jpg“일 자체는 여기가 더 쉬워. 소문이 흉흉하지만 원래 남 말은 다들 쉽게 하지. 너희는 세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하녀장은 안야와 도미스를 거주할 방으로 데려가며 온기라고는 일절 없는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16551121072401.jpg“일 번. 해가 지면 돌아다니지 마라.”

1655112107241.png‘아…… 안 좋은데.’

16551121072401.jpg“이 번. 들어가지 말라는 방엔 절대 들어가지 마. 어느 방이 출입 금지인지는 따로 알려주겠다.”

1655112107241.png‘아…… 진짜로 안 좋은데. 수상한 점뿐이잖아.’

16551121072401.jpg“삼 번. 영주님이 지나갈 땐 절대로 얼굴을 보지 마라. 멈춰 서서 고개를 숙여.”

1655112107241.png‘영주가 사람이 아닌가 보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미스는 혹시 여기서 뱀파이어가 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여기 영주는 사람이 아닌 눈치인데, 저 규칙 중 하나를 어겨서?

16551121072401.jpg“이 규칙만 지키면 된다.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녀장이 눈을 빛내며 도미스가 아니라 안야를 쳐다보았다. * * * 도미스는 안야, 다른 하녀 두 명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많이 지쳤는지 도미스는 침대에 눕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바로 잠이 들었는데, 이후 까매졌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다음날이 아닌 것 같았다. 안야는 도미스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안야를 대하는 도미스의 목소리가 편안하고 친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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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야도 툴툴거리는 대신 솔직하게 도미스를 챙겨주는 눈치였다.

16551121072401.jpg“무시무시한 소문이 도는 곳에서 그래도 우린 오래 버텼지.”

16551121072401.jpg“켈리가 또 사라져서 분위기가 심각해요, 안야 씨.”

16551121072401.jpg“규칙을 어겼을 거야.”

안야가 잘게 찢은 고기를 입에 넣는 걸 보며 도미스가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16551121072401.jpg[그러는 안야 씨도 밤중에 자주 사라지면서…….]

아무래도 저 안야란 사람 역시 규칙을 잘 어기는 듯했으나, 라틸은 그것보다 다른 점이 신경 쓰였다.

1655112107241.png‘전에는 그냥 새로운 능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나?’

전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두 번이나 갑자기 훌쩍 지나가 버리자, 대체 자신은 어떤 기준으로 도미스의 기억을 꿈꾸는 건지 의아해졌다. 시간대가 그대로 흘러가서 모든 장면을 볼 수 있다거나, 아예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생략되며 흘러간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어떤 기억은 지금처럼 오랜 시간이 훌쩍 생략되어 버리고, 어떤 기억은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라틸은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온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미스에게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 그 순간만 꿈으로 보는 건가? 만약에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도미스에게 기억에 남는 순간’은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란 말인가. 라틸 자신이 도미스의 기억을 멋대로 보는 거라면, 뭐가 유독 기억에 남는지 아닌지 어떻게 안다고. 이건 마치…….

1655112107241.png‘도미스가 나한테 자기 기억을 골라서 보여주는 거 같잖아.’

이미 죽은 사람인데. 죽은 뱀파이어인가? 하여튼 죽은 존재인데도. 그게 가능한가? 소름이 돋으려는 순간.

16551121072401.jpg“다음 월급을 받으면 넌 목표한 금액이 다 모이는 거지?”

안야의 목소리가 라틸의 상념까지 함께 깨웠다.

16551121072401.jpg“어떻게 할 거야? 여기 계속 남아 있을 거야? 하녀장님은 네가 오래 있었으면 하는 눈치던데. 널 제일 좋아하시잖아.”

16551121072401.jpg“작은 가게를 내고 싶어.”

16551121072401.jpg“무슨 가게?”

16551121072401.jpg“아무거나 좋으니까 음식 파는 가게. 그래서 나 어릴 때처럼 배고픈 애들 있으면 먹을 것도 쥐여주고…… 그러고 싶어.”

1655112107241.png‘도미스으!’

라틸은 울컥했고, 안야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낀 눈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식사를 계속했고, 도미스는 하녀장에게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나가겠단 이야기를 실제로 전달했다. 안야의 말처럼 하녀장은 도미스가 계속 남아주길 바라는 눈치로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도미스가 나가겠단 뜻을 굽히지 않자 이렇게 부탁했다.

16551121072401.jpg“네가 나가겠단 날짜에 ‘귀한 손님’이 일주일 정도 머무를 텐데. 그러면 그동안만 도와주고 가면 안 될까?”

16551121072401.jpg“손님이요?”

16551121072401.jpg“일손 좋은 하녀 셋이 우르르 없어져서 손이 부족하거든.”

도미스는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서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달칵 문을 여는 순간, 복도가 아니라 밖이 나타났다.

1655112107241.png‘어?’

도미스는 하녀장의 방에서 복도로 나간 게 아니라 하녀장의 방에서 바로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하는 분위기를 보니, 도미스가 이상한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니라, 도미스의 기억이 다시 중간에 편집된 것 같았다.

1655112107241.png‘아아. 그 귀한 손님이 오는 날인가.’

금색과 아이보리색이 뒤섞인 화려한 마차 두 대가 연달아 들어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중간에 있던 기억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또 생략된 모양이다. 도미스가 다른 하녀들과 줄지어 선 채 마차가 가까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라틸은 옆에서 하녀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16551121072401.jpg“웬일로 여기에 손님이 오지?”

16551121072401.jpg“그러니까. 처음 아니야?”

16551121072401.jpg“내가 알기론 처음이야. 몇 년 동안 아무도 온 적이 없었잖아. 새로 일하러 오는 사람이랑 생필품을 날라오는 마부 외에는.”

16551121072401.jpg“여기 영주님이 손님이라고 맞이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좀…….”

그 사이 마차는 아홉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마부가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 문을 열어주자, 대기하던 하인과 하녀들이 짐을 받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르르 다가갔다. 도미스도 그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도미스는 마차 근처로 가지도 못하고 멈추어 섰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 때문에.

1655112107241.png‘칼라인이랑 기르골이다.’

뜻밖에도 칼라인과 도미스는 여기서 재회했다. 두 사람도 도미스의 얼굴을 알아본 눈치였다. 기르골이 손가락으로 ‘어?’하고 도미스를 가리키며 웃자, 도미스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폈다.

16551121072401.jpg“여기서 또 만나네, 아가씨?”

라틸은 칼라인에게 얼른 오라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고함을 또 질러댔다. 그러나 칼라인은 기르골과 달리 반갑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도미스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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