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어디부터 어디까지 짚어야 할지 모르겠다2021.12.05.
“그게 무슨 소리야?”
“말 못 알아듣니?”
“어?”
“너 좀 멍청하구나.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느 귀족이 하녀 일을 주겠어?”
“그럼…….”
“배에 태운 다음 팔아치우려는 거야. 노예로.”
“!”
도미스가 당황했는지 몇 번이나 손을 움찔거렸다.
“그, 그럴 사람 같지 않았는데.”
“그럼 난 뭐 거짓말할 사람 같단 거야?”
처음 보는 여자애가 화를 내자 도미스는 쩔쩔매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두서없이 변명해댔다. 여자애는 혀를 차다가 도미스가 목에 건 목걸이를 보더니 깜짝 놀라 외쳤다.
“거봐. 맞네. 맞아. 그 목걸이가 그거야.”
“그거?”
“표적이라고 확인해두는 목걸이. 그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을 납치하라고 미리 말해둔 다음, 네게 목걸이를 준 거야.”
도미스는 목걸이를 손으로 꼭 움켜쥐면서 더듬거렸다.
“아니, 이거 분명 배표라고…….”
“무슨 배표를 목걸이로 주는데? 이게 배표야.”
여자애가 주머니에서 날카롭고 빳빳한 종이를 꺼내 보여주자, 도미스는 아까보다 더욱 허둥거렸다.
“그럼 어떡해야 해?”
“어떡하긴. 목걸이 빼서 버려. 그러면 되잖아.”
여자아이는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도미스는 주저하다가 결국 목걸이를 빼더니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를 달아나버렸다. 그리고는 납치당할 게 무서운지 골목길 사이로 가 쪼그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어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배가 출발하기 전 내는 소음과 몰려드는 승객들로 항구가 시끄러워지자,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드는지, 도미스가 골목길 사이에서 빠져나와 항구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미스의 시선은 그 귀부인을 찾아 사방을 헤매었으나, 라틸은 그러는 동안 이곳 사람들의 차림새며 물품을 예리하게 살폈다. 도미스가 하도 시선을 한곳에 두지 않아 제대로 보긴 어려웠으나, 확실히. 이렇게 옷차림을 유의해서 보고 있으려니, 라틸이 살던 때와 머리며 복장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
“아!”
도미스가 탄식하면서 어딘가를 확 쳐다보는 바람에 라틸도 덩달아 그쪽을 보게 되었다.
[저 애!]
도미스가 보는 건 배와 항구 사이의 다리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는 그 여자아이와 그 앞에 서서 가는 귀부인이었다.
[저 애가 왜?]
‘왜긴 왜겠냐, 네가 속았잖아!’
라틸은 보자마자 상황을 알아차렸으나 도미스는 상황을 보면서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황급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잠시만!”
사람들에게 마구 떠밀리는 사이. 귀부인은 이미 배 안에 들어간 후였다. 하지만 짐을 더 옮기기 위해서인지 그 여자아이는 다시 배에서 내렸는데, 다행히 도미스도 이번에는 힘을 내어서 그 애의 팔을 움켜잡았다.
“너!”
도미스가 버럭 외치자, 여자아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가 싶더니 곧 빙그레 웃었다.
“야, 안녕.”
그 여자아이의 목에는 ‘납치 목표물을 알리는 패’라고 말했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너, 네가 왜-.”
도미스가 당황해서 덜덜 떨자, 여자아이는 힘을 주어 도미스의 팔을 뿌리치고는, ‘뱃멀미가 심한 귀부인의 하녀’에게서 짐가방을 하나 더 받아든 다음 두 손으로 밀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 일자리는 내가 잘 받을게. 그분 무척 친절한 분이더라.”
그제야 도미스는 속았단 걸 알아차렸는지, 여자아이가 운반하려는 가방을 움켜잡고서 외쳤다.
“나한테 사기를 친 거야? 일부러 거짓말을 했어?”
여자아이는 도미스에게서 가방을 도로 뺏으려 했으나 생각보다 도미스가 힘이 센지 잘 되지 않자 날카롭게 협박했다.
“당장 안 놔? 이거 그분 짐이야. 안 놓으면 도둑이라고 소리 지를 거야.”
그 말에 도미스가 놀라서 손을 놓자, 여자아이는 턱을 올리더니 거들먹거리며 비웃었다.
“속은 게 멍청이지.”
“패, 패 돌려줘! 내 자리잖아!”
“네가 버리고 내가 주웠어. 그럼 내 거야.”
“아니야!”
“내가 돌려주면? 네가 그 귀부인을 납치범이라 의심했단 거, 내가 이미 다 말씀드렸는데. 자기를 납치범 사기꾼으로 의심한 사람을 누가 다시 써주겠냐?”
그 말이 정말인지, ‘뱃멀미가 심한 귀부인의 하녀’가 실제로 다가오더니 차갑게 도미스를 쳐다보면서 꾸짖었다.
“배은망덕한 것. 당장 꺼지지 못해?”
여자아이가 도미스를 향해 혀를 빼꼼 내밀고 짐가방을 다시 옮기기 시작하자, 도미스는 허망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도미스가 다시 쫓아갔으나, 여자아이는 도망치지도 않고 태연히 짐을 실었다.
“넌 사기꾼이야!”
거기에 화가 난 도미스가 울면서 버럭 외쳤으나 여자아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웃었다.
“사람을 제대로 못 본 건 너야, 멍청이야. 네가 무지해서 당한 거야.”
그리고는 도미스를 향해 세 번째 손가락을 내밀면서 다시 혀를 내밀었다. 라틸은 도미스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미스의 꿈을 꾸며 그녀의 감각을 공유한 이래, 이렇게 빠르게 심장이 뛰는 건 ‘주워온 자식’이란 소리를 들으며 쫓겨날 때 이후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슬픔과 공포가 강했다면 이번에는 순수한 분노로 가득했다.
‘이러다 타락하는 건가? 이러다 뱀파이어가 되나?’
라틸은 도미스가 이제 뱀파이어 로드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미스는 또 골목길로 가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그만 울고 쌍욕이라도 퍼부어! 신발이라도 던지라고! 아, 미치겠네!’
라틸은 슬슬 짜증이 났다. 어차피 이 모든 건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도미스는 결국 뱀파이어든 로드든 뭐로든 변하게 된다. 도미스가 그런 존재로 안 변한다면 좋겠지만, 변하는 게 확실시된 거라면 제발, 제발, 제발 자신이 보는 앞에서 복수를 해주었으면 싶었다. 뱀파이어가 된 다음,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쫓아낸 그 상인 남자와 사기를 쳐서 하녀 일을 뺏어간 저 여자애 둘만에게라도 좀. 아니, 도끼를 내리쳐 양딸을 죽이려 한 그 의붓아버지까지 포함해서 세 명 다. 아니면 이쪽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아니, 칼라인 그 새끼는 자기 미래 애인이 이 꼴을 당하는데 어디 처박혀서 뭐 하는 거야?’
* * * 라틸이 도미스의 과거를 꿈으로 체험하며 씩씩거리는 그 시각. 영문도 모른 채 라틸에게 ‘그 새끼’ 소리를 들은 칼라인은 어느 영지의 관리소 기록실 책상에 앉아, 커다란 책을 펼친 다음 거기에 작은 종이를 대고서 무언가를 빠르게 옮겨적는 중이었다. 원래 그는 신전에 몰래 숨어들어 대적자 후보로 불려왔던 아이들의 신상을 알아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신전 깊숙한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탓에 결국 각 신전이 있는 곳 영주 관리소 기록실을 하나하나 뒤지고 다니면서, 예언된 날짜에 태어난 아이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옮겨 적는 것이다.
‘라나문?’
그 과정에서 칼라인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으나, 서넛이 라나문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던 걸 떠올리고서 곧 크게 개의치 않고 이름만 적고 넘어갔다. 게다가 라나문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신전에서 퇴소했다고 되어 있어서, 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단을 다 옮겨 적은 칼라인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은 다음, 두꺼운 책을 가장 위쪽 원래 자리에 꽂아 놓고 그곳을 은밀히 빠져나왔다. 이후 그는 흑사신단 지부로 향했다. 그곳 용병들에게 명단을 보여준 다음 여기 실린 아이들의 근황을 살피라 지시할 작정이었다.
“칼라인 님.”
그런데 지부로 가 보니, 뜻밖에도 수도에 있어야 할 용병 하나가 빈약한 의자에 걸터앉아 그를 기다리다 벌떡 일어났다.
“네가 여긴 왜 왔지?”
칼라인이 명단을 꺼내며 묻자, 용병이 다급히 말했다.
“대적자를 찾았습니다.”
“대적자를? 누구냐?”
정말이라면 이건 좋은 일이었다. 기르골이 대적자를 찾기 전에 먼저 찾아내 죽일 수 있단 거니까. 칼라인이 황급히 묻자 용병이 빠르게 대답했다.
“라트라실 황제의 특사인 사디란 인간 여자입니다.”
“?”
“기르골이 그 여자와 같이 있는 걸 도미스가 보았습니다. 확실합니다.”
칼라인은 입을 벌리고서 용병을 쳐다보았다. 너무 황당해서. 총체적 난국이어서. 하도 엉망이라 어디부터 어디까지 짚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칼라인 님?”
그런 기색을 눈치챈 용병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불렀다. 이 소식을 전하면 칼라인이 당장 그 여자를 죽이러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저러고 있으니, 소식을 전한 용병이 덩달아 당황스러웠다.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용병이 얼마나 당황스럽다 한들, ‘사디’가 ‘라트라실 황제’ 본인이란 걸 알고 있는 칼라인만큼은 아닐 것이다. 칼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입을 꾹 닫고 서 있다가 한심해하는 기색을 강제로 누르며 대답했다.
“사디는 대적자가 아니다.”
“예? 하지만 기르골이-.”
“난 그녀와 며칠간 함께 지낸 적도 있어서 확실히 안다. 사디는 절대로 대적자가 아니다.”
“하지만 칼라인 님, 도미스가 분명-.”
“그 여잔 ‘주인’이 아냐. 도미스의 기억과 외양을 가지고 있다 해서 무조건 믿지 마라.”
“도미스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도미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이미 도미스가 아닌가요?”
“아니다.”
그러나 기르골이 사디와 함께 있던 건 확실히 신경이 쓰여서, 칼라인도 그 부분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이건 허튼소리라고 넘길 수가 없는 게, 실제로 그는 기르골이 사디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장면을 보긴 했던 것이다. 왜 꽃다발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고민에 잠겼던 칼라인의 눈썹이 갑자기 위로 치켜올라갔다.
‘기르골 그자도 사디가 대적자라 생각하나? 그래서 사디를 꾀기 위해 접근하는 건가?’
칼라인이 이를 갈자 용병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건가 걱정했다.
“괜한 오해로 허튼 행동을 하지 마라.”
그 탓에 칼라인이 차갑게 지시했을 때 용병은 지체 없이 바로 대답했다.
“네. 다른 단원들에게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도미스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너희가 함께 지내는 그 여자는 도미스가 아니니 말에 휩쓸리지도 말고.”
“……예.”
지시를 내리자마자 칼라인은 휙 몸을 돌렸다.
“나도 수도로 돌아가겠다.”
지금 확실히 충고해 두었으니 흑사신단의 용병 뱀파이어들은 허튼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말을 잘 따라온 이들이니. 하지만 기르골. 그자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졌다. 아니, 복잡해지다 못해 대체 어떤 방향으로 일이 튀어 갈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르골이 지금은 오해를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사디가 라트라실 황제라는 걸, 라트라실 황제가 로드라는 걸 알게 될 수도 있지 않던가. 칼라인은 황급히 지부 문을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녀에게 돌아가야 했다. 최대한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