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500살 연상이라니2021.12.01.
옷을 갈아입고 정원을 산책하면서 라틸은 머리를 팽팽 굴려댔다.
‘근데 칼라인과 도미스가 500년 전 사람이라면…… 그들과 친구인 기르골도 500년 전 사람인건가?’
그럼 기르골도 사람은 아니겠네. 아니, 그보다 칼라인이 500년 묵은 뱀파이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하렘으로 향했다. 주인이 사라진 칼라인의 빈방으로 들어간 라틸은 창문 아래에 뎅그러니 놓여 있는 선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로드가 아닐지도 모른단 희망에 목을 축이자마자, 얼굴 보고 뽑은 후궁이 500년 연상일지도 모른단 걸 알게 되어 버리다니. 심지어 그 후궁의 전 애인은 뱀파이어. 그러면 둘은 뱀파이어 커플이었던 걸까? 이것보다 더 최악인 건…… 단순히 뱀파이어 커플이 아니라 로드와 뱀파이어 커플이었을지도 모른단 점이다. 라틸은 치를 떨고서 문밖으로 나와 복도를 달아나듯 빠르게 걸어갔다.
“폐하?”
만약 게스타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라틸은 아마 정신없이 성벽 끝으로 뛰어갔을지도 몰랐다.
“게스타.”
수줍어하는 목소리를 듣자 가까스로 진정한 라틸은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억지로 웃었다. 게스타는 여린 성품이기 때문에, 마주하고 있으면 이쪽이 굳건한 모습을 보여야 한단 이상한 책임감이 생긴다. 그 점 때문일까. 오히려 게스타를 보자 제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산책하고 있었느냐?”
라틸이 묻자, 게스타는 저만치서 가까이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라틸의 얼굴을 살피며 되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아. 그냥 이것저것.”
게스타의 시선이 칼라인의 방문 쪽을 힐긋 향했다. 칼라인의 방 창문은 커튼이 다 드리워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라틸이 그 방에서 나오는 걸 본 모양이었다.
“칼라인 님이 많이 아파서 그러세요?”
“아아.”
칼라인은 대외적으로 몸이 안 좋아서 두문불출하는 거로 되어 있지. 속도 모르고 게스타가 칼라인을 걱정해주자, 라틸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맥이 빠지기도 해서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하지만…….”
“너는? 이 한밤중에 왜 이러고 다니느냐. 이상한 괴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라틸은 호수 주위를 둘러싼 성기사와 병사들을 힐긋 보고서 게스타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망토를 다시 끌어올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이젠 성기사들이 밖에 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궁인들도 요즘은 무서워서 해가 지면 안 돌아다니는데.’
게스타는 늘 오들오들 떠는 데 비하면 겁이 많이 없구나.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래도 슬슬 밤이 쌀쌀해지니,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얼른 들어가서 따뜻하게 자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다 보니, 전에 클라인이 한 고자질이 떠올랐다. 라나문이 벌거벗고 정원을 다닌다는 고자질이.
“폐하?”
그렇지만 게스타에게 ‘라나문이 혹시 나 없을 때 벗고 다녀?’라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라틸은 말을 살짝 바꿔서 물어보았다.
“게스타. 혹시 클라인과 라나문이 사이가 많이 안 좋아?”
게스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다른 후궁들에 대해 나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단 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란 거네. 사이가 안 좋은 거 확실한가 봐.
‘그럼 라나문이 벌거벗고 다닌 게 아닌데, 클라인이 뭘 잘못 보고 나한테 말을 전했을지도 모르겠네.’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으나, 당장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게스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기 걸리니까 조금만 더 다니다 들어가, 게스타.”
“폐하께서도 산책하시는 거라면……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미안. 지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나중에.”
게스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라틸은 서둘러 몸을 돌려 본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게스타는 끝까지 바라보았으나, 결국 황제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원래 가려던 곳으로 몸을 돌렸다. * * *
‘생각해보니 전에 도미스 꿈에서. 칼라인이 기르골한테 로드가 어쩌구 하는 걸 얼핏 들은 거 같아.’
문제는 너무 얼핏 들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단 거지만. 본궁으로 돌아온 라틸은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 비누 거품을 손으로 이리저리 휘젓다가, 물이 식어 추워질 즈음에야 일어섰다. 그러고는 보송한 목욕 가운을 걸치고 나가서, 시녀를 불러서 약을 가져오게 했다.
“잠이 잘 안 오고 몸도 좀 으슬으슬 떨리고 머리도 아프고 그래. 잠 오는 성분이 담긴 두통약을 가져와라.”
“궁의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폐하?”
“궁의가 다녀가는 게 더 머리 아프다. 약만 가져와.”
시녀는 ‘그래도 궁의가 다녀가는 게 낫지 않나’ 걱정하는 눈치였으나, 라틸이 눈을 감아버리자 결국 밖으로 나가 비상약과 물을 챙겨 들어왔다. 시녀가 약을 은쟁반에 내려놓자, 라틸은 쟁반에 함께 놓인 작은 칼을 들어 약을 반으로 쪼갰다. 라틸이 자른 약 반을 옆으로 밀자 시녀는 작은 절구로 약을 으깨 쟁반에 문질렀다. 은쟁반의 색이 변하지 않는 걸 확인한 시녀가 밖으로 나가자, 라틸은 남은 약 반쪽을 입에 털어놓고 물을 마셨다. 약 기운이 바로 돌진 않았지만 라틸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서 침대로 가 누웠다. 칼라인에겐 추궁을 하고 싶어도 곁에 없으니 할 수가 없고. 서넛은 뭘 물어봐도 아예 대답을 하질 않고. 기르골은 아직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도미스의 기억을 확인하는 수밖에.’
* * *
“뭐? 보증인이 없다고? 그럼 안 돼!”
정신을 차린 라틸이 가장 먼저 들은 소리는 누군가의 짜증 섞인 거절이었다. 눈앞에서, 귀걸이를 착용한 퉁퉁한 남자가 파리채 같은 걸 들고서 휘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도미스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며 시야가 연신 낮아졌다 높아지길 반복했다.
“부탁합니다. 일할 곳이 꼭 필요해요! 절대로 말썽부리지 않을게요, 저는-!”
“아 꺼지라고! 꺼져!”
“부탁해요!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아 보증인도 없는 어린 여자애 뭘 믿고 내가 일을 맡기란 거야?”
다시 파리채가 마구 휘둘러지더니 결국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때린다. 라틸은 대번에 ‘개새끼! 감히 누굴 때려!’라고 욕을 뱉었으나, 도미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걸로도 그치지 않고 남자는 아예 벌떡 일어나 도미스를 파리채로 마구 때려댔다. 그러다 짤랑 소리가 나며 뒤에서 문이 열리자, 남자가 파리채를 내려놓고 싹싹하게 “어서 오세요, 손님!” 하고 외쳤다. 들어온 손님이 힐긋 훌쩍이고 선 도미스를 보자, 남자는 다시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언성을 높였다.
“꺼져! 도둑년 같으니라고!”
손님 중 하나는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였는데, 제 아빠의 손을 꼭 쥔 채 신기하단 눈으로 도미스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아빠의 손을 흔들면서 물었다.
“아빠, 저거 거지야?”
“쉿. 저런 거 보는 거 아니다.”
아빠가 한 손으로 아이의 눈을 가리자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라틸은 또 속으로 욕을 뱉었으나, 도미스는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뭐 하는 거야 도미스! 너 뱀파이어잖아! 죄다 물어버려!’
라틸은 순간 자신이 뭘 하러 꿈을 꾸려 했는지도 잊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뱀파이어 혹은 뱀파이어 로드’라 추측한 도미스는, 라틸의 생각보다 더욱 여린 사람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지도 않고 시무룩하게 돌아다니며 계속 일자리만 구하려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자리를 구하려면 ‘보증인’이란 게 꼭 필요한 듯, 도미스는 어떤 곳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라틸은 자신이 직접 애원하며 다니는 게 아닌데도 덩달아 기운이 없어 쪽쪽 말라 들어갔다. 지금의 솔직한 마음으로는 도미스가 이러다가 타락해서 뱀파이어 로드가 된 거라 해도 이해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니, 보증인이 있어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친인척 없는 사람은 뭐 어쩌란 거야?’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러다가 도미스가 악해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정신적으로 어두워질 것 같다고 라틸이 한탄하고 있을 무렵.
“거기, 아가씨.”
머리에 보송한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길쭉한 우산을 든 우아한 귀부인이 도미스를 불렀다. 라틸은 그 귀부인을 기억해냈다. 도미스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른 옷가게에 있던 여자였다. 계속 도미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기에 기억이 났다. 도미스가 주춤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 다가가지 않자, 귀부인은 직접 코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일자리를 구한다고?”
“네, 네, 마님.”
일자리 이야기에 도미스가 두 손을 모으고 허둥지둥 대답하자, 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으로 항구에 있는 커다란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꼭 여기서 일해야 하니? 배 안에서 내 하녀 생활을 해볼 마음은 없고?”
뜻밖의 제안에 도미스가 “네?” 하고 맹하니 되묻자, 귀부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 그녀의 캐리어 가방을 들고 선 여자를 가리켰다.
“내 하녀인데. 뱃멀미가 심하다네. 이전엔 배를 탄 적이 없어서 본인도 몰랐나봐.”
“아…….”
뱃멀미가 심하단 하녀가 얼굴을 붉히자 귀부인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렝트르까지 갈 거야. 거기에 별장이 있거든.”
“네에…….”
“거기에 가면 능숙한 하녀들이 많으니 괜찮아. 하지만 렝트르까지 하녀를 고작 두 명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집에서 다시 하녀를 데려오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라틸은 도미스의 심장이 희망으로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갈 수 있어요! 제가 갈게요! 저 뱃멀미 없어요!”
라틸은 도미스가 ‘사실은 나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내야지’라고 생각하는 걸 느끼고서 혀를 찼다. 저러다 뱃멀미가 있으면 나중에 어쩌려고. 하지만 도미스는 이미 궁지에 몰려 있기에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다행히 귀부인은 그런 도미스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거만하지만 조금 따뜻하게 말했다.
“계속 널 보고 있었지. 정말 급해 보이더라. 만약에 네가 배 안에서 일을 싹싹하게 잘해준다면 계속 내가 데리고 있어줄 수도 있단다.”
“마, 마님! 저 진짜 잘할게요!”
“세 시간쯤 있다가 배가 출발할 거야. 바로 결정하진 말고. 그때까지 부두로 오렴. ‘스모키 윙’을 타고 갈 거란다.”
“네! 네! 감사합니다!”
귀부인이 눈짓을 하자, 뱃멀미가 심하다는 하녀가 다가와서 목에 걸고 있던 패를 도미스에게 건넸다.
“이건……?”
“배 안에 들어가는 표란다.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서 못 타게 되거든 그걸로 들어와서 특등실 3호로 오렴.”
귀부인이 떠나자 도미스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라틸은 ‘이거 믿어도 되는 거야?’란 생각에 의심스러웠으나, 도미스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심지어 도미스는 ‘세 시간 있다가 와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곧장 부두로 달려가서, 커다란 배 앞에 아예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지.]
선원들이 무거운 짐을 옮기다가 걸리적거린다고 화를 내도, 도미스는 웃으면서 옆으로 비켜설 뿐 화조차 내지 못했다. 라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맹탕이 진짜 뱀파이어가 된다고? 뱀파이어 로드일 수도 있다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 도미스를 불렀다.
“야. 거기 빨강 머리.”
비키란 소리인 줄 알고 도미스는 이번에도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번에 말을 건 사람은 선원이 아니었다. 낡은 옷이지만 반듯하게 차려입은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날 왜 불렀지?]
도미스는 여자아이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라틸은 여자아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도미스가 귀부인에게 하녀 자리를 제안 받을 때 근처 벽에 쪼그리고 앉아 내내 쳐다보던 아이였다.
“나 불렀어?”
이를 모른 채 도미스가 묻자,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 잘 차려입은 귀부인이 같이 배 타고 가자, 하녀일 해봐라, 이랬잖아. 그 말 듣지 마. 그 사람 납치범이야. 널 납치하려는 거야.”
“어……?”
“이런 것도 모르니? 너처럼 속아서 끌려간 애들, 나 많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