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청혼인 줄 알았어2021.11.28.
검도 빼 줬으니 슬슬 돌아갔겠지. 어쩌면 목적이 다 끝났으니 이젠 이전처럼 자주 안 나타날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검이었는데, 왜 그걸 운명의 여자만 뺄 수 있다느니 거짓말한 건지는 모르…….
‘어라. 이 검 뽑으면 청혼해야 한다던가, 그런 말 하지 않았던가.’
라틸은 궁전을 향해 털레털레 걸어가다가 우뚝 멈추어섰다.
‘그냥 한 말이었겠지? 진짜 청혼하러 오진 않겠지?’
치솟는 불안감을 라틸은 애써 누르며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래. 청혼 얘기는 아마 거짓말일 거야. 세상에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딨어? 게다가 최근에 다른 여자도 그 검을 들고 있었고…… 최근인가. 최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사디 양.”
아직 정리도 하지 못했는데 뒤에서 기르골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청혼하러 왔나?’
라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라틸과 달리 기르골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청혼하러 왔나 봐!’
라틸은 난감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작 이런 일로 청혼하지 않을 게 뻔하지만, 상대는 꽃을 뜯어 먹는 남자였다. 같이 있으면 재밌고 즐거운 데다 보고만 있어도 황홀하리만큼 아름답지만, 저 예쁜 머리통 안은 좀 뒤죽박죽인 게 분명하니, 충분히 청혼하고도 남았다.
“왜 그래? 나 바쁘다니까.”
그렇다고 상대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거절하긴 좀 그래서, 라틸은 일단 아까보다 차가운 목소리를 내보았다.
“급한 얘기가 아니라면 나중에.”
“급한 얘기야.”
아, 역시 청혼하려는 건가 봐! 라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기르골을 쳐다보았다.
“세상을 구해보고 싶지 않아?”
‘거봐! 청혼……이 아니네?’
“어?”
청혼도 아니고. 심지어 더 놀다 가란 말도 아니다. 뜬금없이 세상을 구하자니? 라틸은 당황해서 자기 귀를 툭툭 두드리고 요청했다.
“다시 말해봐. 내가 이상하게 들었어.”
“아가씨. 세상을 구해볼래?”
“…….”
역시 꽃 뜯어 먹는 놈 말은 진지하게 듣는 거 아니야. 라틸은 웃으면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든 다음 몸을 돌렸다. 청혼보다야 상대하기 쉬운 제안이었으나 청혼보다 더욱 괴상한 제안이었다. 세상을 구하자니.
“아가씨. 대적자라고 알아? 아가씨가 그거 같아서 그래.”
그러나 ‘대적자’란 단어를 듣는 순간. 라틸은 걸어가던 멈추고서 확 돌아섰다.
“대적자?”
“아나 보네.”
기르골이 싱긋 웃었으나, 라틸은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적자가 뭔가. 500년 단위로 부활하는 로드를 막아내는 영웅 아니던가. 전설적인 영웅 같은 존재. 잘 알려진 전설은 아닌 것 같지만, 하여튼.
‘나더러 그런 존재라고?’
오빠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건이 없었더라면, 라틸은 기르골의 대적자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시하고 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레안은 라틸을 로드라 의심해 가짜 황제를 만들었고, 엄마는 막판에 라틸을 도와주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엔 오빠 말을 믿고 거기에 합류했다. 대현자란 작자는…… 물론 이자도 레안의 스승이니 레안의 편이겠지만, 라틸을 위험한 황제처럼 표현했다. 이 와중에 기르골이 라틸에게 ‘네가 대적자’라고 하자 귀가 솔깃해졌다. 기르골이 꽃 뜯어 먹는 장면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솔깃했을 것이다.
“세상이 시끄러우니까. 로드라던가 대적자라던가, 그런 건 들었지.”
‘사디’는 황제의 특사이니 이런 정보에 대해 알아도 이상하지 않다. 카리센에서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좀비와 싸우지 않았던가. 라틸은 ‘사디’의 설정을 떠올리며 순순히 대답했다.
“나, 좀비랑 싸운 적도 있어. 믿기진 않겠지만.”
“믿어.”
라틸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내가 대적자란 거야?”
“내가 대적자들을 훈련시키는 스승이니까.”
“…….”
왜 자꾸 눈앞에 기르골이 꽃 뜯어 먹던 장면이 어른거리나.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라틸은 팔짱을 풀지 않고 되물었다. 로드란 소리보다야 대적자라는 게 듣기에 낫긴 하지만, 그렇다고 덥석 남의 말을 믿어버리기엔 최근에 배신당한 일이 많았다.
“사디 양, 혹시 생일이 8월 25일 아냐?”
“맞는데.”
“그러면 확실해. 그 생일은 대적자가 태어날 거라고 예정된 날짜거든.”
“……그래도 못 믿겠어.”
기르골이 자신이 허리에 찬 검을 툭툭 두드리더니, 손잡이를 잡고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희미한 스파크가 잠시 튈 뿐. 검은 검집에서 뽑히지 않았다.
“!”
그 광경을 놀라서 보고 있자니 기르골이 검을 풀어 라틸에게 건넸다. 라틸이 얼결에 검을 받아들자, 그가 태연히 설명했다.
“대대로 대적자가 사용하는 검. 고대의 마법이 걸려 있어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녹슬지 않아. 대적자가 아니면 뽑지도 못하지.”
라틸은 기르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천천히 뽑아 보았다. 뻑뻑하지만 이번에도 분명 뽑히긴 했다. 라틸은 새하얀 검신을 빤히 보았다. 이게 대적자의 검이라고? 그냥 하얀 검, 칼라인의 적이 사용하던 검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게 대적자의 검이라니…….
“근데 이거. 전설의 검치곤 예기가 없는데. 날은 따로 갈아줘야 해?”
라틸의 질문에 뭐가 그리 웃긴지 기르골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신의 손을 뻗어 검날을 주욱 그었다.
“!”
라틸은 놀라서 검을 든 채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그의 손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르골은 피가 흐르는 엄지를 입에 물면서 웃었다.
“미쳤어?”
라틸이 놀라서 항의하자 기르골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대적자가 죽으면 예기를 잃어. 그래도 사용하는 덴 문제가 없어.”
“첫 번째 대적자가 죽은 후로 늘 이 상태라고?”
“아니지. 새로운 대적자가 사용하면 다시 예기를 찾지.”
기르골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져 내려갔다.
“가장 날카롭게 만들었을 때 로드와 붙을 수 있고.”
“로드…….”
“가장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방법은 내가 알려줄 거야, 아가씨. 염려 마.”
아니, 그걸 염려하는 게 아니라…… 아니, 그러니까 이게 진짜 대적자의 검이라고? 아니, 그럼 내가 진짜 대적자야?
‘근데 오빠는 왜 날 로드라 했는데? 아니, 물론 난 절대 로드가 아니라고 부정하긴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게 된 일. 피 냄새를 남들보다 잘 맡게 된 일. 죽은 사람의 기억을 꿈으로 꾸는 일. 거울 속에서 어떤 여자를 본 일. 강해진 근력. 이것들은 뭐고?
‘아니야. 생각해보니 내가 대적자라서 이런 변화가 나타난 걸 수도 있어.’
사악한 자가 만지면 검게 변하며 부서진다는 돌. 내내 신경 쓰였는데. 생각해보니 그 돌도 부서지긴 했으나 검게 변하진 않았다. 라틸의 가슴속에 내내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감. ‘내가 진짜 로드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슬며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대적자일지도 몰라. 로드가 아니라!’
기르골은 그런 라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친절하게 물었다.
“내 말을 믿겠어, 아가씨?”
라틸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희망이 솟긴 했으나 역시 이런 건 신중해야 했다. 기르골은 라틸이 계속 자신을 의심하는데도 기분 나쁘지 않는지, 그럴 만 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하지만 아가씨. 내 말이 아니라 해도 나쁠 거 없잖아? 난 아가씨를 아주 강하게 만들어줄 거거든. 강해지는 건 좋은 거고.”
기르골의 이번 말도 꽤 그럴듯했으나 여전히 라틸은 상대를 바로 믿지 않았다.
“네가 나보다 강하다고?”
“못 믿겠어, 아가씨?”
“어.”
“대련해볼래?”
“내가 왜?”
“아가씨가 지면 내 제자가 돼.”
“!”
“내가 지면 내가 아가씨 제자가 될게.”
“뭐야, 난 제자 필요 없어.”
“그럼 결혼하자.”
“뭐야 왜 다 너 좋은 거야?”
“우리가 결혼하면 나한테 좋은 일이야?”
“당연하지.”
난 황제니까. 물론 쟤는 모르고 하는 말이겠지만. 라틸이 당당하게 턱을 치켜 올리자, 기르골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또다시 실실 웃다가 제안을 바꿨다.
“그러면 내가 아가씨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그게 무엇이든.”
라틸은 가만히 고민해보다가 승낙했다.
“좋아.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라틸이 검을 도로 내밀자 기르골이 받아서 다시 허리춤에 검집을 매었다.
“지금은 바빠서?”
“어. 벌써 돌아가야 했는데 너무 오래 끌었어. 대련은 다음에.”
“다음에 언제?”
* * * 약속을 잡은 뒤. 보폭이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사디를 보며, 기르골은 그제야 몸을 돌려 아까 들르려 했던 오른쪽 샌드위치 가게에 들렀다. 대적자가 둘인 게 이상하긴 하지만…… 일단 한 명이 강렬하게 대적자이길 거부하는 이상, 다른 하나라도 잘 꾀어서 제대로 가르쳐야 했다. 다행히 사디는 라나문보다는 대적자가 되는 걸 꺼리지 않는 눈치지 않던가. 별개로 정의감은 저쪽도 역대 대적자들에 비해 적어 보였지만.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를 산 기르골은 가게 한 쪽에 앉아 빵을 싼 종이 껍질을 벗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적자가 둘이 된 점. 과연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대적자와 로드는 운명이 분배하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 조절하기라도 한 것처럼 늘 힘의 균형이 엇비슷했다. 그런데 대적자가 둘이 됐다? 기르골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대적자가 두 명이 됐으니 힘이 두 배가 된 거라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대적자의 힘이 반씩 나누어져 두 명이 된 건지.’
* * * 혼란스럽기는 궁으로 돌아온 라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르골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차라리 가장 간단하다. 그냥 그가 꽃을 뜯어 먹는 이상한 거짓말쟁이인 것뿐이니까. 하지만 진실이라면…… 설탕과 소금, 후추, 바질을 뒤섞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딱히 정의감 넘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로드와 대적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대적자이고 싶다. 황제인 자신이 500년에 한 번씩 나타나는 악의 수장이라니.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이 로드가 아닐지도 모른단 가능성. 이건 설탕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대적자의 스승이라 밝히는 기르골이 뱀파이어인 칼라인과 친구였단 점. 이건 후추였다. 이상했다.
‘아. 친구였는데 칼라인은 뱀파이어가 되고 기르골은 반대편에 서게 되면서 틀어졌나? 그것도 가능하긴 하겠는데…….’
그럼 칼라인의 기억 속. 도미스의 마지막 장면은 대체 뭐지? 뱀파이어인 칼라인은 도미스와 끌어안고 있고, 그들을 둘러싼 하얀 제복 차림의 기사들…… 그리고 홀로 모양이 다른 제복을 입고 있던 여자.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게 대적자의 검. 대적자의 검으로 로드만 상대하는 게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상했다. 대적자의 검을 가진 여자가 도미스와 칼라인을 공격하다니. 마치…… 마치 그들이 퇴치해야 할 괴물이라도 된 것처럼. 궁전에 무사히 들어가 가면을 벗어 숨겨둔 라틸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서 두꺼운 커튼을 쳐서 완전히 가려둔 창문을 휙 돌아보았다.
‘혹시 도미스도 뱀파이어였나?’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낫다.
‘혹시 도미스가…… 로드였나?’
이건 가장 끔찍한 가정이었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가정. 로드는 500년에 한 번 부활. 그렇다면 대적자도 어림잡아 비슷한 시기에 등장. 그러면 그들과 함께 있던 칼라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