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뭔가가 달라졌다2021.11.24.
보라색 꽃을 보면서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두고 간 로즈메리를 떠올리던 라틸은 얼결에 기르골을 따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정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만난 적이 없으니까. 라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으나 기르골은 자신 있어 보였다.
“그럼.”
“어디서 만났는데?”
기르골의 눈이 초승달처럼 길고 시원하게 휘었다.
“우린 전생에 연인이었어.”
“웃기시네.”
그 헛소리에 라틸은 혀를 찼으나, 기르골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그댈 좋아했던 거 같아. 물론 현생에서도.”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긴.”
“우리가 금단의 사랑을 했던가?”
“진짜 기억 하나도 안 나는구나. 죄다 엉터리네. 비슷한 구석이 없어.”
라틸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아무 말이나 뱉고 보던 기르골이 드디어 건성으로 둘러대길 멈추고 졸랐다.
“말해주면 안 될까? 내가 오래 살아서 기억력이 안 좋아, 아가씨.”
키가 큰, 다 자란 남자가 귀엽게 조르는 모습은 나름대로 매력적이어서, 라틸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알려줘도 또 까먹을 텐데. 뭐하러 물어? 그냥 이대로 넘어가.”
“사디 양은 냉정하네. 내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냉정하긴. 내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인데.”
“냉정한 사람이 열정적이면 진짜 매력 있더라. 사디 양이 그런 사람이야?”
“정말 아무 말이나 다 갖다 붙이는구나.”
고개를 저은 라틸이 몸을 돌려 걸어가자, 기르골이 그 뒤를 졸졸 쫓아오며 다시 온갖 가능성을 다 던져보기 시작했다. 라틸은 “아니. 아닌데. 아니야.”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기르골이 멋대로 던져대는 말을 즐겁게 흘려들었다. * * * 그런 모습을 먼발치에서 누군가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
도미스의 모습을 한 아이니였다. 아이니는 ‘사디’와 그녀의 곁에 선 하얀 머리 남자를 발견하고서 기가 차 헛웃음을 뱉었다.
“저 두 사람? 하.”
“왜 그래?”
아이니가 연거푸 헛웃음을 뱉자, 곁에 서 있던 흑사신단 용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의 시선은 대답을 듣기 전에 아이니가 쳐다보는 방향을 먼저 찾았다. 갈색 머리 여자와 하얀 머리 남자. 시선 끝에서 낯익은 모습들을 발견한 용병도 표정이 빠르게 얼었다. 갈색 머리 여자는 최근에. 하얀 머리 남자는 아주 오래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어서. 그러나 나란히 서 있는 터라, 아이니는 용병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서 중얼거렸다.
“저 남자. 저 하얀 머리 남자가 전에 날 습격한 그자야. 저 옆에 있는 여자가, 내가 말한 그 여자고. 대적자일지도 모른단 여자. 그런데 저 둘이 왜 같이 있지?”
중얼거린 아이니는 반응을 바라며 옆을 보았다가, 뒤늦게 용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 걸 발견했다. 용병은 아이니 그녀보다 더 굳어 있었다.
“왜 그래?”
그게 이상해 묻자, 용병은 사람들 틈으로 아이니를 끌어당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자. 대적자를 키워내는 배신자 뱀파이어야.”
“뭐?”
아이니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사디와 하얀 머리가 있는 방향을 보았으나, 자신들이 사람들 틈으로 숨은 탓에 두 사람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디는 대적자일지도 모르는 여자잖아. 그런데 둘이 같이 있단 건…….”
“기르골과 있는 걸 보니 저 여자가 대적자가 확실한 모양이네.”
아이니와 용병은 동시에 서로를 다급히 쳐다보았다. 둘은 모두 칼라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먼저 반응한 쪽은 아이니였다.
“칼라인은 내 말을 안 믿을 테니, 네가 칼라인을 찾아가. 가서 전해. 대적자를 발견했다고.”
아이니가 용병의 팔을 잡고 빠른 목소리로 부탁하자, 용병은 흐린 날 구름처럼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는 칼라인이 아이니가 환생한 도미스라는 걸 부정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칼라인을 위해 이렇게 나서주다니…….
“도미스. 언젠가는 칼라인 님도 네 진심을 알아주실 거야.”
감동받은 용병의 말에 아이니는 무슨 소리냐며, 얼른 칼라인에게 다녀오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 * *
“응?”
기르골이 아무렇게나 뱉어대는 말에 적당히 대답해주면서 걸어가던 라틸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자, 기르골이 헛소리를 멈추고 물었다.
“왜 그래?”
얼핏 가짜 도미스를 본 거 같아서. 라틸은 눈을 가늘게 떴으나,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던 곳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사디 양?”
“아냐. 아무것도.”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본 게 가짜 도미스면 뭐 어쩌겠는가. 그녀는 가짜였고, 칼라인도 그녀가 가짜란 걸 알았다. 그러면 된 거였다. 라틸이 더이상 그녀를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가자.”
라틸이 팔을 살짝 잡아당기자, 기르골은 고개를 갸웃하며 잡힌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 와?”
라틸이 재차 그를 잡아당기자, 기르골은 곧 함박웃음을 지으며 따라왔다.
“가야지. 갈게.”
* * * 라틸은 수도를 헤집고 다니면서,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기르골과 제멋대로 놀았다. 분수대에 앉아 노래를 교대로 부르다가 서로를 음치라 구박하고, 샌드위치를 반씩 나눠 먹다가 상대 것이 더 크다고 항의하고,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 오고, 소극장에 들어가 오래된 연극을 구경했다. 기르골은 시시때때로 자신과 사디의 관계에 대해 엉터리 추정을 해댔으나, 본인도 라틸이 자신의 말을 믿을 거란 생각하진 않는 눈치였다.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고 하늘에는 붉은빛이 내려왔다. 라틸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더 오래 나와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언덕에 올라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해 지는 걸 보자는 기르골을, 라틸은 툭툭 팔을 뻗어 두드렸다.
“나중에. 오늘은 헤어질 시간.”
기르골은 양옆에 나란히 선 샌드위치 가게 중 어느 쪽을 갈지 고르고 있다가, 라틸의 말에 ‘벌써?’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아직 해도 있는데. 벌써 들어가게? 더 있다 가지.”
“밤 됐는데 좀비 나오면 어떡해.”
“없애줄게.”
기르골이 헤어지기 싫단 얼굴로 라틸의 옷자락 끝을 붙잡고 슬쩍 흔들었다. 어느새 과거 맞추기는 다 까먹고 그저 노는 게 즐겁다는 얼굴. 오늘 그와 함께한 시간이 즐겁긴 마찬가지였기에, 라틸은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자신의 옷자락을 그의 손에서 빼냈다.
“너무 늦게 들어가면 혼나서.”
“하긴. 사디 양은 아직 아기지.”
“뭐래.”
라틸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의 팔을 두드리고 손을 흔들었다.
“잘 들어가. 석양은 다음에 보러 가자.”
라틸은 그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몰랐고, 그도 라틸이 어디에서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그와는 또 만나질 거란 생각이 들어서 하는 작별이었다. 기르골은 아쉬운 얼굴로 라틸을 보았으나 두 번 붙잡지는 않았다. 라틸은 또 손을 흔들고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보니, 기르골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라틸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더 있다 가라고 붙잡지도 못하면서. 그러다 라틸이 재차 손을 흔들자 기르골이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라틸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
얼마를 그렇게 왔을까. 이제 돌아갔나 싶어서 슬쩍 돌아보니, 기르골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라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쟤는 왜 안 가고 저러고 있어?’
기르골이 가야지 몰래 궁전에 돌아가든가 말든가 할 텐데. 저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가라고? 게다가 쓸데없이 애달픈 모습. 라틸이 우두커니 멈춰 서자, 기르골이 이번에는 먼저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라틸은 눈썹을 찌푸렸다. 칼라인은 여전히 도미스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지. 기르골은 그 도미스와 칼라인, 모두와 친구였고. 혹시 기르골도 아직 칼라인과 도미스 때문에 힘들어하나? 그래서 저러는 건가? 기르골은 그냥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인데. 머릿속에 한 편의 드라마가 그려졌다. 라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기르골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았다. 기르골이 자꾸 저러는 게 혹시 저 검 때문일까? 저 검을 뽑아 달라고, 오늘 같이 어울리는 와중에도 한 번씩 부탁했지. 대체 저 검이 뭐길래? ‘칼라인과 도미스의 적이 차고 있던 검’이란 게 찝찝하긴 했으나, 라틸은 결국 마음을 바꿔 기르골 쪽으로 다가갔다.
“사디 양. 역시 놀다 가려고?”
기르골은 자신과 놀아주기 위해 돌아온 거라 여기는지, 라틸이 가까이 오자 활짝 웃으면서 오른쪽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사자. 저기가 맛있대.”
라틸은 대답 대신 기르골의 검 손잡이를 쥐고 잡아당겼다. 약간 빡빡한 감이 있긴 했으나 힘을 주자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은 쉽게 뽑혔다.
“!”
라틸이 뭘 하는가 싶어 쳐다보던 기르골은, 라틸이 뽑은 검을 손 위에서 한 바퀴 돌린 다음 손잡이가 그를 향하도록 건네주자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검 손잡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건…….”
“작별 인사.”
그러니까 뒤에서 그렇게 그만 좀 쳐다봐. 신경 쓰이잖아. 라틸은 뒷말을 생략하고서 검을 쥔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 받아 가? 기르골은 천천히 손을 들어 라틸이 건넨 검을 받았다. 검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의 손이 살며시 스치는 순간. 정전기가 튀듯 짜릿한 느낌이 돌았다. 기르골은 두 손으로 검을 감싸 안듯 받고서 라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평소보다 좀 더 커다래져 있었다.
“잘 가. 샌드위친 다음에.”
또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또 만나도 재밌을 것 같아. 라틸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서, 돌아서서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여전히 뒤통수가 따끔거렸지만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아직도 기르골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게 뻔하기에. * * * 라틸의 예상대로 기르골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쓸쓸해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의 입꼬리는 부자연스럽게 양옆이 올라가 있어서, 잘못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상처럼 보였다. 기르골은 고개를 기우뚱하다가, 눈동자만 내려 품에 안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사디가 손쉽게 빼내 자신에게 건네준 검, 어젯밤에는 라나문이 손쉽게 빼내어 그의 목에 겨눈 검. 반듯한 미간이 점점 찡그려졌다.
‘대적자가…… 두 명이라고?’
기르골의 머릿속에 어젯밤 라나문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라, 영웅 놀이가 싫다며 로드를 죽여야 한다면 직접 하라던 모습이. 로드니 악이니 하는 데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 그 권태로운 표정도. 홀랑 벗은 주제에. 당시엔 ‘이번 대적자는 진짜 특이하구나’ 생각하고 말았는데. 대적자가 둘일지도 모른단 걸 알게 되자 그것조차 이상하게 여겨졌다. 지금까지의 대적자들은 다들 최소한의 정의감이 있었으니까. 대부분은 정의감이 많은 편이었고.
‘뭔가가 달라졌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기르골의 눈매가 천천히 만족스레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