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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남사스러워 (181/367)

181화. 남사스러워2021.11.21.

하얀 머리의 감탄을 조롱으로 받아들인 라나문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잠시 눈이 흔들렸을 뿐. 이런 상황에서도 라나문은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 하얀 머리 역시 상대가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데도 태연자약하게 이런 말이나 계속했다.

16551119253339.jpg“역시 네가 대적자가 맞는데.”

16551119253348.png“떠나라. 영웅 놀이는 다른 자를 찾아서 하든가.”

16551119253339.jpg“아이야. 지금 네가 쥔 검. 그 검이 바로 대적자만 뽑을 수 있는 검이란다.”

내내 자신이 대적자임을 부정하던 라나문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이 하얀 머리의 눈동자에서 자신이 든 검으로 향했다. 이건 하얀 머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걸 창밖으로 달려 나오면서 검만 뽑아 든 것이다. 그런데 이 검이 대적자만 뽑는 검이라고?

16551119253348.png“허튼소리.”

16551119253339.jpg“아이야. 너 진짜 대적자 하기 싫구나?”

그 단호한 태도에 하얀 머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16551119253339.jpg“여태 모든 대적자를 통틀어 네가 제일 정의감과 공명심이 없다. 신기하지?”

하얀 머리 기르골은 ‘황제가 로드라면, 대적자가 후궁으로 들어간 것도 처음이긴 하지’라고 생각했으나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모든 상황이 그에게 그저 즐겁고 재밌을 뿐이라, 굳은 표정의 라나문과 달리 기르골은 내내 웃기만 했다. 그렇지 않은가? 라나문이 일부러 로드 곁에 가기 위해 후궁으로 들어간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모르고 들어간 눈치이니 말이다. 저 정도로 대적자이길 싫어하는데 일부러 로드 곁에 있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

16551119253348.png“뭘 그렇게 웃는 거지?”

기르골이 혼자 실실 웃어대자 라나문이 불쾌한 듯 물었다.

16551119253339.jpg“아이야. 넌 지금 이 평화가 좋아서 대적자이길 거부하는 거니?”

기르골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상상을 멈추고 다시 라나문에게 물었다. 라나문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기르골은 아마 맞는 말일 거라 예상하고서 인자하게 조롱했다.

16551119253339.jpg“네가 나서서 악을 처단하지 않는다면 아이야. 이 평화는 결국 깨질 거란다.”

16551119253348.png“날 훈련시켜 주겠다는 걸 보면 그쪽도 꽤 강한 모양인데.”

16551119253339.jpg“그렇지.”

16551119253348.png“그럼 그쪽이 직접 악을 처단해. 그러면 되잖아?”

표정 변화조차 없는 라나문의 덤덤한 말에 기르골의 어깨가 시무룩 내려갔다.

16551119253339.jpg“그게 되면 내가 이러고 있을까?”

16551119253348.png“안 될 이유는 뭔데.”

16551119253339.jpg“나도 모르지. 왜 세상에 대적자가 있고, 악이 500년마다 부활하는지 결국 아무도 모르듯.”

16551119253348.png“!”

빙그레 웃은 기르골은 라나문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16551119253339.jpg“나중에 또 보자. 그때까지 마음은 한번 바꿔보고.”

난 한 명 더 확인해야 할 인간이 있어서. 뒷말을 생략한 기르골은 어둠에 스며들어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그의 입술은 히죽 올라가 있었다. 대적자가 사용하는 검을 뽑은 걸 보면 분명 그 재수 없는 벌거숭이가 이번 대적자가 맞단 건데. 그러면 사디란 인간 여자는 대체 뭐란 걸까? * * *

16551119283021.png“요즘 흑마법사들이 난리잖아.”

클라인이 윗몸일으키기를 하다 말고서 뜬금없이 뱉은 말에, 그의 시종인 바닐은 곁에서 바느질하다 말고서 고개를 들었다.

16551119253339.jpg“그렇죠.”

악시안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검을 닦다가 클라인을 보았다. 클라인은 미리 악시안에게 ‘너는 닥치고 있어’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바닐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16551119283021.png“흑마법 중에 말이야. 혹시 사랑에 빠지는 그런 마법은 없으려나?”

16551119253339.jpg“사랑에 빠지는 마법이요?”

16551119283021.png“어.”

악시안이 “이상한 데 관심 가지지 마세요.”라고 끼어들자, 클라인과 바닐이 동시에 눈을 치켜떴다. 소리 없는 압박을 받은 악시안이 입을 다물자, 바닐은 걱정스럽게 클라인을 보았다. 사실 악시안에게는 일단 조용히 하라 했는데. 바닐도 좀 걱정이 되긴 했다. 클라인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어 나간 전적이 원체 많지 않던가. 클라인이 창밖으로 걸어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자 바닐의 불안함은 한층 더 강해졌다.

16551119283021.png“밤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중얼거린 클라인을 따라나서며, 바닐은 시원한 밤공기가 클라인의 저 헛생각을 날려 보내주기를 기도했다. 물론 흑마법이 익히고 싶다고 다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런데 정말로 밤 산책이 클라인의 헛생각을 날려주었다. 한참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클라인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서더니 어느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뭘 보시는 건가 싶어서 바닐도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클라인이 보는 방향을 보았다. 이윽고 클라인과 바닐의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라나문이 벌거벗고 서 있던 것이다.

16551119283021.png“저게 미쳤나.”

클라인은 기가 차 중얼거렸고 바닐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아무리 라나문이 시린 얼음처럼 아름다운 외모라지만, 달빛을 받은 몸 역시도 아름답다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혼자 저러고 있으니 좀 미친 거 같았다.

16551119253339.jpg“폐하를 그리워하다 미쳐버린 걸까요?”

바닐이 작게 속삭였다. 그 순간. 어딘가를 노려보던 라나문이 이쪽으로 확 고개를 돌렸다. 클라인은 어깨를 움찔했다. 라나문도 이쪽을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그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자, 클라인은 황급히 두 손을 내밀면서 비명을 질렀다.

16551119283021.png“오지 마. 오지 마. 거리 유지해. 오지 마!”

원래도 라나문을 싫어했지만, 한밤중에 벌거벗고 다가오는 라나문은 클라인에겐 공포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라나문은 클라인의 말을 다 무시하고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한 번에 클라인의 멱살을 잡아채며 물었다.

16551119253348.png“어디부터 봤지?”

클라인은 몹시 부담스러워 시선을 하늘로 향하며 이를 갈았다.

16551119283021.png“다 봤다. 다 봤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 안 보이겠냐? 정원에서 이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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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라나문의 표정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 잠시 입술을 깨무는가 싶던 라나문은 클라인을 퍽 밀쳤다.

16551119253348.png“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클라인은 바로 균형을 잡고 섰으나, 벌거벗은 라나문과는 손끝도 닿기 싫은지 웬일로 주먹을 날리지도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16551119283021.png“남사스럽단 걸 알긴 하니 다행이구나. 알면 꺼져. 내 눈 괴로워.”

  * * * 한 송이 로즈메리 꽃을 유리잔 안에 넣고 물을 받아둔 게 이상해 보이나. 다음 날 아침. 옷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시녀들은 연신 그 꽃을 힐긋거리며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갑자기 없던 꽃이 생겼으니 뭔지 물어보고 싶긴 한데 못 묻는 눈치들이었으나, 라틸은 굳이 설명해주는 대신 오늘 입을 옷만 골라잡았다. 식당에 가서도 라틸은 창문을 노크한 이의 정체와 로즈메리의 의미를 떠올리며, 거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 수프를 떠먹었다. 그런데 반 정도 접시를 비웠을 즈음.

16551119253339.jpg“폐하, 클라인 님께서 오셨습니다.”

웬일로 클라인이 라틸을 먼저 찾아왔다. 라틸이 데려와도 좋단 신호를 보내자, 얼마 가지 않아 클라인이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몹시 밝은 얼굴. 쟤는 진짜 볼 때마다 늘 표정이 밝구나. 그 미소를 본 라틸은 덩달아 웃으면서 클라인에게 맞은편에 앉으라 신호하며 물었다.

16551119346633.png“오랜만에 왔구나.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느냐?”

진짜로 큰 볼일이 있어서 왔으리란 생각으로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습관상 물었을 뿐. 그런데 의외로 진짜로 무슨 일이 있긴 있는지, 그 질문을 듣자마자 클라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밝다 못해 혼자 다른 조명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16551119346633.png“왜 그러느냐?”

그 모습에 호기심이 든 라틸이 재차 묻자, 클라인은 맞은편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서 히죽히죽 웃더니 머리를 라틸 쪽으로 살짝 숙이며 물었다.

16551119283021.png“폐하. 제가 어젯밤에 뭘 봤는지 아십니까?”

16551119346633.png“어젯밤?”

정체불명의 인간 아닌 침입자가 로즈메리를 놓고 간 그 어젯밤? 라틸은 어젯밤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혹시 클라인이 뭔가 엄청난 장면을 본 걸까? 목격자인가? 그렇다면 클라인이 지금 뱉을 말은 아주 중요할 터. 라틸은 진지하게 물었다.

16551119346633.png“무엇을 보았느냐?”

16551119283021.png“라나문이요.”

16551119346633.png“라나문?”

어젯밤에 수상한 행동을 한 사람이 라나문이었다고? 뜻밖의 상황에 등장한 이름에 라틸은 더욱 놀랐다.

16551119346633.png“뭘 했는데?”

라틸이 반응을 제대로 보여주자, 클라인은 히죽 신이 났다. 라틸과 별개로, 시종장은 자기가 싫어하는 클라인이 슬쩍 라틸을 찾아와 라나문을 거론하자, 불안해서 클라인의 정수리를 쏘아보았다. 클라인은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흐뭇하게 웃고서, 거만하게 말했다.

16551119283021.png“밤중에 벌거벗고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폐하.”

라나문이 입 다물라 협박한 일은 이미 티끌만치도 그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16551119283021.png“남사스럽지 않습니까?”

클라인이 남사스럽긴커녕 행복해 죽겠단 얼굴로 말하는 동안, 라틸은 눈을 끔뻑거렸다.

16551119346633.png‘라나문이? 벌거벗고? 돌아다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제멋대로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한 지점에서 부딪치면서 ‘빵’ 소리를 내며 터졌다.

16551119346633.png“어?”

라틸이 놀라 되묻자, 클라인이 손으로 머리부터 발끝을 가리키며 재차 말했다.

16551119283021.png“홀랑 벗고서 정원을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미친 거 같아요. 내보내야 합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폐하. 우리 애가 그걸 봤으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16551119346633.png‘아직 애 없잖아.’

라틸은 멍하게 생각하다가 곧 황당해서 손을 내저었다.

16551119346633.png“거짓말 마라, 클라인. 라나문이 그럴 성격이냐?”

16551119283021.png“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제 시종도 봤습니다.”

그 근거 없는 신뢰에 클라인은 기분이 상해서 재차 말했으나, 라틸은 웃으면서 하녀가 가져온 수프 그릇을 클라인의 앞에 밀어주었다.

16551119346633.png“네가 뭘 잘못 보았겠지. 아니면 피부색이랑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을 거야.”

16551119283021.png“진짠데요.”

16551119346633.png“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옷을 입고 있던 건 아닐까?”

클라인은 라틸이 자기 말을 농담으로만 취급하자 눈살을 찡그렸으나, 시종장까지도 ‘저런 거짓말을’ 하는 표정을 하고 있자 곧 기분이 상해 입을 아예 다물어 버렸다. * * *

16551119346633.png‘클라인 말이 진짜였을까? ……아냐. 라나문이 벌거벗고 돌아다닐 사람은 아니잖아. 대신관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업무를 반 정도 마친 뒤. 라틸은 하렘에 들어 칼라인의 방 선인장을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옮겨 둔 다음 가면을 쓰고 궁전을 빠져나왔다. 이젠 가짜 도미스에겐 관심이 사라졌으나, 이렇게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이미 취미가 되어 버렸다. 요즘 라틸에겐 이게 가장 마음 편한 휴식이었다. 궁전에서는 쉬려고 해도 눈길 닿는 곳마다 머리가 아플 뿐이었으니. 그런데 길을 가다가 꽃집 앞에 멈춰 서서, 커다란 항아리에 담긴 한 무더기의 보라색 꽃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사디 양?”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났다. 기르골의 목소리. 대번에 알아들은 라틸이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요 며칠 눈에 보이지 않던 기르골이 방싯방싯 웃는 얼굴로 라틸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라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6551119253339.jpg“우리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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