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예의 바른 뱀파이어2021.11.17.
머릿속에 오만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흑마법사. 괴물. 좀비. 뱀파이어. 식시귀. 암살자. 배신자. 복수. 라틸은 이불 아래 요를 움켜잡았다. 사람은 아닐 거야. 암살자나 배신자여도 확실하게 사람은 아니야. 그 높이를 사람이 올라올 수는 없다. 그럼 누가 올라온 거지? 방 안 곳곳 무기를 숨겨둔 위치가 그림 카드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각각 무기를 쥐었을 경우의 동선도 지도처럼 그려졌다. 베개 밑. 가장 가깝다. 하지만 베개를 들치고 무기를 빼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 침대 캐노피 위쪽. 달려가면서 지체 없이 빼내기 쉬운 위치지만, 팔을 위로 올리는 동안 빈틈이 생긴다. 창틀 아래에 숨겨둔 비수. 타이밍이 안 맞으면 꺼내지도 못하고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라틸은 알아차렸다. 창문을 노크한 상대가 움직임이 없었다. 어째서? 혹시 이쪽이 벌써 잠들었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사태를 더 지켜보려는 건가?
‘아니, 사태를 살피려는 자라면 창문을 노크하지도 않았을 텐데?’
고민은 짧았다. 라틸은 몸을 뒤척이는 척 옆으로 돌아눕다가 베개를 들추는 대신 베개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단단한 손잡이가 손바닥에 잡히는 순간. 라틸은 그것을 꽉 틀어쥐면서 발로 침대를 박찼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눈은 기민하게 상황을 살피며 주위에서 닥쳐올 공격에 대비했다.
‘없다?’
하지만 방 안에도 창문 앞에도 심지어 창문 뒤쪽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어디 갔지?’
그래도 경계를 늦추는 대신 라틸은 검을 들어 올린 채 한 손으로 퍽 내려치듯 창문을 열었다.
‘없어.’
하지만 상대는 확실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그제야 라틸은 검을 내리고서 창틀에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까마득한 어둠 아래로 성벽을 밝힌 희미한 노란 불이 들어왔다. 그 빛과 이곳 사이의 거리는 꽤 멀어서, 역시 사람이 드나들 만한 곳은 못 되었다.
‘꽃?’
그런데 창문을 다시 닫으면서 보니, 창틀 끄트머리에 식물 한 줄기가 눌려 있었다. 라틸은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뻗어 그걸 집었다. 창문을 완전히 닫고 뒤로 물러나자 침실의 조명 아래에 식물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통통한 가시 같은 이파리들과 옹기종기 모여 핀 보라색 꽃잎들. 로즈메리 꽃이었다.
‘지금 계절에 로즈메리가 핀다고?’
다시 창문을 열고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라틸은 꽃을 움켜잡고 눈살을 찌푸렸다.
‘꽃이 여기에 있단 건 분명 누군가 다녀가긴 했단 건데. 여기까지 올라와서 왜 꽃만 놓고?’
* * *
“오늘은 날이 왜 갑자기 춥냐…….”
“날씨도 미쳐가나 보다.”
경비를 서는 병사 둘이 작게 소곤거리는 사이. 그들의 머리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짧게 내쉬는 한숨처럼 지나갔다.
“응?”
감이 좋은 병사 한 명은 고개를 들었으나 다른 한 명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왜 그래?”
“아니. 방금 뭐가 지나간 거 같아서.”
“아 씨. 무섭게.”
하지만 감이 좋은 병사도 고개를 갸웃할 뿐, 곧 동료 병사와 다시 날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쪽을 쑥스러움 많은 뱀파이어 하나가 지나갔단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실례할 뻔했네.”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간 뱀파이어, 기르골은 혼자 실실 웃으면서 높은 성벽을 손쉽게 훌쩍 넘어갔다. 궁전을 나온 기르골은 성벽에 기대어서 입에 물고 온 보라색 꽃잎을 얼른 먹은 다음, 혼자 소리를 죽여 웃어댔다.
“황제니까 예의 바른 뱀파이어를 좋아할 거야.”
만약 황제가 진짜 로드라면…… 이번 로드는 정말 좋은 데서 태어났구나. 한 번도 황제인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기르골은 턱이 하늘을 볼 정도로 높게 고개를 들어 궁전 꼭대기를 쳐다보다 키득키득 또 웃어댔다.
“안 무섭게 찾아가야지. 이번엔 절대로 안 무섭게 다가가야지.”
미소는 하늘 위로 부엉이 한 마리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순간 뚝 멈췄다.
“아.”
기르골은 고개를 원위치시키고서 방금 막 떠오른 생각에, 지나가던 사람을 내리쳤다.
“이봐!”
얼결에 이마를 맞고 엉덩방아를 찧은 사람이 욕을 하며 항의했으나, 기르골은 혼자 중얼거리느라 바빴다.
“온 김에 그 애나 보고 갈까.”
* * *
“이거 진짜 비싸게 주고 산 거예요, 도련님.”
책상 앞에 앉아 글씨를 연습하고 있는 라나문에게, 시종이 뚜껑 연 상자를 내밀었다. 라나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손을 저었다. 평생을 풍족하게 살아왔기에,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이다’란 말론 그의 흥미를 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종이 자리를 물리지 않고 버티고 있자, 라나문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려 시종이 들고 선 상자 내부를 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평범한 여름용 의상이었다. 아주 무난해 보이는 의상. 금사로 문양이 약간 새겨진 걸 제외하면, 전부 흑색이라 별다른 특색도 없는 망토. 저런 걸 비싸게 주고 샀다면 사기당한 거 아닌가. 라나문은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시종의 기분이 상할까 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입거라.”
하지만 시종 카르둔은 상자를 치우는 대신 책상 구석에 내려놓으며 자랑했다.
“도련님. 이건 도련님 거예요. 그리고 평범한 옷도 아니에요. 제가 앙제스 상단을 통해서 진짜 비밀리에 받아온 거란 말이에요.‘
“앙제스 상단? 타시르 그자의 상단 말이냐?”
“네. 타시르 님 동생한테 비싸게 주고 샀어요. 얼마나 열심히 설득했는데요.”
라나문의 시선이 다시 망토로 내려갔다. 표정 변화가 미세하긴 하지만, 떨떠름해 하는 기색이었다.
“이걸?”
라나문은 거기까지만 말하였으나, 카르둔은 아마 라나문의 머릿속에는 저 뒤쪽으로 ‘고작 이거 때문에?’란 문장이 붙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냥 옷이 아니라니까요?”
카르둔은 답답해서 자기 가슴을 퍽퍽 두드리다가, 옷을 두 손으로 들어 펼쳐 보이며 웃었다.
“이 옷은요, 잘못 툭 치기만 해도 확 벗겨지는 옷이래요! 앙제스 상단주가 타시르 님에게 주려고 연구 중인 건데 거기 상단주 차남이 제 친구랑 아는 사이거든요.”
카르둔은 방긋 웃으면서 옷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한 번만 입어보세요. 밖에선 못 입겠지만 폐하가 오셨을 땐 입으면 좋잖아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랭했다.
“나더러 타시르 그자와 같은 수준이 되란 건가.”
냉랭하다 못해, 카르둔의 제안을 거의 모욕으로 여기는 투였다. 그 표정을 본 카르둔은 머뭇거리다가 옷을 도로 상자에 힘없이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이러면 도움이 될 줄 알았어요.”
일단 상자는 두고 나갈게요. 아주 작게 중얼거린 카르둔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라나문은 다시 펜을 들고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글씨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0여 분 정도나 지났을까.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이던 라나문이 펜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 번 살폈다. 스치듯 봉투 안에 있는 옷을 본 라나문은, 물 흐르듯 문 앞으로 걸어가 잠겨 있단 것까지 제대로 확인하더니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봉투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이게 툭 치면 벗겨진다고?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옷인데. 라나문은 옷을 앞뒤로 살폈지만, 옷은 정말 멀쩡해 보였다. 흑심을 품고 만든 옷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
라나문의 머릿속에 첫날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서 부끄러워하던 황제가 떠올랐다. 당시엔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는 데 자존심이 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이후에는 아주 깜찍하리만큼 그를 쏙쏙 피해 다니고 있으니. 하지만 황제가 그의 맨살에 반응했던 건 분명한 일. 그렇다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라나문은 자신의 옷을 벗고 그 옷을 입어보았다. 카르둔이 본다면 ‘저럴 거면서 왜 나한테는!’ 하고 억울해하겠지만, 라나문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옷을 실제 입더라도 볼 사람은 황제뿐일 테니까. 카르둔은 못 볼 거니까. 그런데 옷을 다 갈아입고 전신 거울에 매무새를 비춰보고 있을 때였다. 정말 이렇게 봐선 흑심 가득한 옷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창문 밖에서 똑똑 노크를 했다. 고개를 돌린 라나문은 창틀에 팔을 괴고 기대어 선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거울에 걸어둔 검을 바로 뽑아 쥐었다. 하지만 창틀에 기댄 낯선 사람은 검을 보고서도 두렵지 않은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누군지 안 궁금한가. 바로 검부터 뽑네. 이쪽은 맨손인데.”
낯선 사람이 두 손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으나, 기사도에 별 관심이 없는 라나문은 여전히 검을 겨눈 채 온기 없는 시선으로 침입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받은 낯선 사람은 씩 웃더니 손을 내렸다. 라나문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신전에 있을 때. 꿈에서 당신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꿈이 아니었나 보군.”
낯선 사람의 입가에 히죽 미소가 올라왔다.
“기억하는구나?”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린 그가 보기에도 저 하얀 머리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으니. 심지어 저 하얀 머리는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왔었다. 현실적이었던 어린 라나문이 그를 꿈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라나문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 기억이 꿈이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오히려 더욱 이상해졌다. 분명 당시에 저 하얀 머리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니까. 게다가 모습. 어린 시절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선 그의 모습은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런 수상쩍은 자가 한밤중에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평이한 상황은 아니다. 더욱 경계를 풀지 못하고 있자니, 하얀 머리가 신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기억하고 있다니 말이 쉽겠군. 아이야. 악이 몰려오고 있다. 악을 처단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어.”
상대는 표정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진지했다. 눈을 마주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태도는 마주 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신뢰감을 일으켰다.
“맞설 준비를 해야지.”
“혹시 그쪽이 계속 내게 편지를 보냈나?”
하지만 라나문은 상대의 신뢰 가득한 목소리나 표정이 아니라, 말의 내용에 집중했다. 저 말. 그에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익명의 사람이 자주 지껄이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하얀 머리는 창문을 붙잡더니 진지하게 라나문에게 제안했다.
“네가 답을 하지 않아 직접 왔단다, 아이야.”
“답을 하지 않는 것도 나름의 대답이었는데.”
“관심이 없단 얘긴가 본데. 아이야. 네가 대적자라면, 혼란스러워진 세상을 누를 수 있는 건 너뿐이란다.”
하얀 머리의 목소리에는 세상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가득했다. 가히 영웅을 이끌 만한 스승다운 태도였다. 사기 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관심 없다.”
그러나 라나문은 상대가 사기를 치는 것이든 진짜로 저러는 것이든, 아예 저런 데 관심 자체가 없었다. 라나문은 대답 대신 검 끝을 하얀 머리에게 겨누며 경고했다.
“나가.”
그 단호한 모습을 보던 하얀 머리의 입가에서 내내 떠올라 있던 자애로운 표정이 사라졌다.
“잘 컸나 보러 왔는데. 이걸 잘 컸다 해야 하나.”
그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라나문은 앞으로 달려 나가 창문을 뛰어넘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하얀 머리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목에 겨누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하얀 머리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이윽고 하얀 머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히죽 쪼갰다.
“이 정도로 다 보여줄 필요는 없는데.”
“!”
하얀 머리가 나타난 이래 라나문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맨살에 닿는 여름밤 바람이 시원했다. 잘 벗겨지도록 제작된 옷이 창문을 넘으면서 훌렁 벗겨진 것이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하얀 머리가 만족스레 웃었다.
“훌륭하게 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