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추방령은 끝났습니다2021.11.14.
흥미가 생기면 풀어야 한다. 기르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일어났다. 예전에 두 번째 폭파 전문 마법사를 찾기 위해 황자를 찾아갔을 때. 그 황자가 그랬지. 자기는 누가 로드인지 안다고. 그 황자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 * * 이곳에서는 궁금한 게 있어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스승인 대현자를 볼 수도, 필요한 책을 마음껏 구할 수도 없다. 레안은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깥에서 바람을 쐬면 쐴수록 초조한 마음은 더해갈 뿐이니 방 안에 들어가 잠이나 자는 수밖에. 그러나 복도를 걸어가던 레안의 발걸음은 코너 너머로 길게 진 그림자를 발견하자 우뚝 멈추었다. 그림자의 실루엣이 이곳을 오가는 이들과 전혀 다른 탓이었다. 그림자야 다 거기서 거기이지만, 지금 눈앞에 진 그림자는 형태가 유달랐다. 좀 더 길고 기괴한 느낌. 레안은 그 그림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전에도 이상한 방법으로 찾아왔었던 괴이한 하얀 머리 남자를 떠올렸다. 혹시 또 그자일까?
“안녕.”
생각을 하자마자 바닥에 진 그림자가 손을 들어 올려 인사하는 시늉을 한다. 레안은 그림자를 지나 가까이 가는 대신 작게 물었다.
“전에 그자인가.”
상대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맞는다는 신호. 하지만 이건 퀴즈가 아니기에 기꺼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레안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벽에 기대어 서서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온 거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잘됐군.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내 바이올린의 행방이라던가.”
상대가 웃음을 터트리는 걸 듣고서 레안은 완전히 확신했다. 그때 그자가 맞았다. 그 괴물 같은 자.
“물어봐.”
상대가 그자라면 버텨봐야 별수 없기에 레안은 순순히 응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온 건지, 혹시 자신을 습격하러 온 건 아닌지, 그의 유용한 심복 마법사를 데려가 뭘 한 건지 궁금했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질문은 죄다 참았다.
“전에 그랬지. 로드가 누군지 안다며.”
하지만 그림자의 질문을 들었을 때는 레안의 표정도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가 확실하게 한 말이지만, 상대는 거기에 ‘나도 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저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누군데?”
저 이상한 자가 혹시 라틸이 보낸 함정은 아닐까. 저 질문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은 없나? 여기에서 라틸의 이름을 말하는 즉시, 황제에게 오명을 씌운단 죄목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히진 않을까? 잠시 망설였으나 레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라트라실 황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 말해.”
여전히 제멋대로인 말투는 황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안은 무엄하다고 상대를 꾸짖는 대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추측을 다 들려준 후. 레안은 조용해져서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쳐다보았다. 잠시 뒤. 창밖으로 떠나는 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간 건가.’
레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안도? 웃기시네. 라틸은 미간을 찡그리고 숨을 들썩였다. 잘 지내는 걸 보았지만 안도가 되는 게 아니라 떨떠름해졌다. 물론 영지에서 자신을 그리워하며 울고불고하길 기다린 건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줄이야.’
사실 정확히 따지자면 서넛이 시시덕거리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라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야. 서넛 경은 인기가 좋으시군요.”
이 와중에 데려온 기사는 눈치 없이 밝게 웃었다.
“하긴. 서넛 경은 궁전 내에서도 인기가 많으시니까요.”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넛이 인기가 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를 신경 쓰고 걱정한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괜히 직접 내려왔네. 저렇게 멀쩡한 거 알면 그냥 다른 사람 보냈지. 그가 지금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서,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홧김에 잡아먹어 버릴까 봐 직접 온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진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말고삐를 괜히 엄지로 긁었다. 이제라도 돌아갈까? 그 순간. 서넛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온 서넛은 눈 깜짝할 사이 라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따뜻한 적색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데리러 와 주신 겁니까?”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라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건 정말로 괴상한 기분이었다. 만족스러운 듯도, 어색한 듯도, 불편한 듯도 한 기분. 라틸은 딱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서넛은 말고삐를 한 손으로 움켜잡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같이 타도 되겠습니까?”
“네 말은?”
“말을 안 가지고 나와서요.”
그럼 뛰던가. 아까 잘 뛰던데.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나왔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상대가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게 홧김에 영지에 돌아가 있으라 했기 때문인지. 라틸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가.”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서넛은 대번에 몸을 훌쩍 위로 올렸다. 덩치가 좋은데도 그는 가볍게 라틸의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허벅지와 팔 사이. 민감한 옆구리 옆으로 스치듯 팔이 들어와 고삐를 함께 쥐었다. 라틸은 그가 자신의 손 위에 함께 손을 겹치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런 자세로 뒤를 보아봤자 보이는 건 그의 가슴뿐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자신이 서넛에게 사주었던 목걸이가 눈앞에서 달랑거렸다.
“이거. 아직 하고 있네.”
“빼는 걸 까먹어서요.”
별 의미 없다는 듯 대답하는 목소리는 라틸이 알던 서넛과 같았다. 짓궂은 오빠의 친구. 무시무시한 뱀파이어로는 보이지 않는다.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정면을 보았다. 서넛을 둘러싸고 즐겁게 웃고 떠들던 아가씨들이 잠시 놀란 듯했으나, 상대가 황제란 걸 알아보자 얼른 인사를 올렸다. 몇몇은 서운한 기색이었으나 몇몇은 눈에 띄게 재밌어하는 기색이었다. 서운해하는 사람들이나 재밌어하는 사람들이나 다 비슷한 오해를 한 눈치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게 아니다’고 변명하는 것도 이상한지라, 라틸은 말없이 고삐를 한 번 흔들었다.
“가자.”
* * * 서넛은 곧장 수도로 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자니 미안해서 라틸은 영주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멜로시 영주 부부는 자신이 가장 힘들 때 도와준 이들이니만큼 라틸은 그들을 챙겨주고 싶었다.
“내가 경을 쫓아냈으니 이미 기분이 상했겠지만요.”
“괜찮을 겁니다. 폐하께서 절 다시 데리러 와 주셨으니까요. 제가 신부를 구하기 위해 내려왔단 헛소문도 사라질 테고요.”
“그런 소문이 돌았습니까?”
“많이 돌았습니다.”
라틸은 서넛을 둘러싸고 있던 매력적인 여자들을 떠올리고서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왜. 인기 좋던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봐요.”
“제가 인기가 좋아도 폐하만 하겠습니까.”
“난 인기가 좋은 게 아니라 권력이 좋은 거죠. 내 후궁들이 날 사랑해서 온 건 아닌 거 알잖아요?”
라틸은 서넛이 이쯤에서 ‘아닙니다’라고 할 줄 알았으나 서넛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다른 사람이 수긍해 주는 건 별로인지라, 라틸은 괜히 미간을 찡그리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녀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서넛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라틸은 고삐의 거칠거칠한 면을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얼른 성에 도착하길 빌었다. 헤어지기 전의 날 선 대화 따위는 없었단 것처럼 구는 서넛이 싫지 않으면서도 미묘하게 찝찝했다. 라틸은 이 분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다나산인가. 거기 마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데. 혹시 아는 거 있습니까?”
그 간지러운 분위기가 사라지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 이야기를 묻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기에 라틸은 괜히 붕 뜬 마음에 억지로 텁텁한 밀가루를 뿌려버렸다.
“처음 듣습니다.”
“최근에, 몇 달 동안 말입니다. 괴이한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잖아요.”
“그랬지요.”
라틸이 눈짓을 보내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근위기사가 얼른 거리를 벌리고 멀어졌다. 라틸은 목소리를 좀 더 낮추었다.
“경은 뱀파이어인데. 혹시 그런 사건들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알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애매한 대답에 라틸은 눈썹을 찌푸렸으나, 서넛이 말고삐를 꽉 쥐는 바람에 돌아보지 못했다. 라틸은 정면에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서 질문을 이었다.
“칼라인이 뱀파이어란 건. 알고 있었습니까?”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나한테 비밀로 했다?”
“칼라인 님도 함부로 누군가를 해칠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 상대가 폐하라면 더욱요.”
“그래서 말 안 한 겁니까?”
“네.”
“그럼 그 칼라인의 시종은요? 그 시종은 사람이 맞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서 모르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쪽도 날 해칠 것 같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하는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뱀파이어들하곤 얘기 안 하고 지냅니까, 평소에?”
“네.”
“서넛 경은 뱀파이어잖아요. 틀라가 뱀파이어 로드고. 근데 틀라 명령은 안 들어도 되는 겁니까? 정확히 로드가 뭘 하는 거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간지러운 연한 녹색 분위기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성이 가까워질수록 냉담해져갔다. 라틸은 무슨 질문을 하건 서넛이 애매하게 대답하자 점차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뱀파이어란 걸 숨긴 채 옆에 내내 있던 게 다시 떠올랐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대답해 줄 수 있는 겁니까?”
“전 모르는 게 많습니다. 제가 아는 건 저와 칼라인 님은 폐하의 영원한 아군이란 것뿐입니다.”
아무리 질문해도 서넛이 그 ‘모른다’는 대답 외엔 제대로 하질 않자, 라틸은 결국 말을 멈춰 세웠다. 자신의 손 위에 겹쳐져 있던 서넛의 손이 더 이상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손은 차가웠다. 칼라인의 손만큼은 아니지만.
“화해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
라틸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서넛이 탄식하듯 불렀다.
“폐하.”
하지만 이미 그 빌어먹을 ‘모르겠습니다’에 라틸은 학을 뗀 상태였다. 이쪽은 상대가 뱀파이어란 걸 어떻게 해서든 받아들이려 노력 중인데. 저렇게 ‘모른다 모른다’ 대답만 해대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서넛 경.”
“폐하. 저는…… 죄송합니다.”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내려요.”
라틸의 차가운 명령에 서넛은 주저하다가 말에서 내렸다. 먼발치에 떨어진 근위기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라틸은 서넛을 쳐다보지 않은 채 작게 지시했다.
“추방령은 끝났습니다.”
“그러면-.”
“하지만 당장 돌아오지 마요.”
“!”
“내게 진실할 수 있을 때. 최소한 거짓말이라도 안 하게 될 때. 그때 돌아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라틸이 말머리를 돌리자 근위기사는 난처한 얼굴로 서넛을 보면서도 얼른 황제의 뒤를 따랐다. 서넛은 홀로 우두커니 선 채 멀어지는 망토 자락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고개를 떨구었다. * * * 서넛이 위험하지 않다는 건 확실한데. 서넛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단 것도 확실하다. 수도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업무를 본 라틸은 최대한 몸을 피로하게 만든 다음, 따뜻한 물에 간단히 목욕을 하고 이불 안으로 빠르게 기어들어가 눈을 감았다. 다시 화해를 하고 싶어서 간 건데. 차라리 제대로 거짓말을 해버리기라도 하던가. 비밀이 있는 티를 한껏 내면서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서넛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서넛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서넛을 믿고 싶은 자신은 한심스러웠다. 라틸은 이불보를 꽉 움켜쥐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까?’
하지만 분노에 취하자 오히려 잠은 더 빠르게 찾아왔고, 라틸은 순식간에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노크했다. 라틸은 눈을 번쩍 떴다.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 잠이 한 번에 달아났다. 황제의 침실은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창문 앞은 까마득한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저기로 드나들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노크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