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황제에게 호기심을 가지다2021.11.10.
클라인은 조금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라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틸의 마음은 이미 그곳에서 벗어나 칼라인의 방문 앞을 기웃대고 있었다. 방 안에 아니라 앞을.
‘칼라인 시종. 이름이 뭐였더라.’
칼라인의 존재감이 너무 강한 데다 본인도 입을 거의 열지 않다 보니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종. 이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다른 시종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자기 주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든지 말든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단 점이라거나, 밤안개처럼 흐르듯 다니는 점이라거나.
‘칼라인하고 비슷한 점도 있지.’
얼굴이 창백하고 조용하고…… 라틸은 우뚝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그자도 뱀파이어인가?’
“폐하.”
그러고 있자니 뒤를 따라오던 근위기사단 부단장이 눈으로 곰돌이 인형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들까요?”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종뿐만이 아니야. 칼라인 용병단 사람들. 흑사신단 용병들도 다 이미지가 비슷해. 아. 그 시종도 원래는 용병이라 했지. 설마…… 혹시 그자들 전부 다 뱀파이어이고 그런 거 아냐?’
뱀파이어들로 구성된 용병이라니. 너무 무서운 거 아닌가. 라틸이 또다시 멈추어 서자 근위기사단 부단장이 의아한 얼굴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라틸은 다시 앞으로 걸어가면서 얼핏 들었던 무서운 생각을 눌렀다.
‘아닐 거야. 그 많은 용병이 다 뱀파이어인 게 가능해?’
햇빛을 볼 수 있는 뱀파이어가 있다지만 그건 소수였다. 그게 다수라면 ‘뱀파이어는 태양에 약하다’ 같은 말이 돌았을 리가 없으니. 그 소수의 뱀파이어가 모두 다 흑사신단 용병이 되어 있다? 억측 같았다.
‘도미스. 그 가짜 도미스랑 같이 있던 용병들. 별로 강하지도 않았잖아? 뱀파이어라면 어마어마하게 강해야 하지 않나?’
역시 뱀파이어는 아닌 거 같아. 추측이 점차 확신이 되어 가서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궁 집무실 안으로 들어갈 때는 완전히 ‘그 사람들은 그냥 용병이야. 몇몇은 뱀파이어일 수도 있겠지만’으로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의자에 앉아 펜 뚜껑을 열고 있자니 다시 초조해졌다. 후궁 한 명이 뱀파이어인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용병 전체가 뱀파이어라는 건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단순히 ‘에이, 아니겠지.’ 하고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뱀파이어 집단이라면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칼라인.’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라틸은 펜 뚜껑을 도로 닫았다. 라틸은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하지만 라틸은 황제였다. 이 점을 명확하게 해야 했다.
‘대신관은 칼라인이 뱀파이어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서넛이 뱀파이어란 점도. 낮에 햇빛을 볼 수 있는 뱀파이어는 대신관도 바로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걸까? 그러면 흑사신단이 뱀파이어란 걸 알아내려면 다치게 한 다음 대신관의 치료를 받게 하는 수밖에 없나? 아. 부적. 부적을 다 붙여볼까?’
“폐하.”
한참 고민하던 라틸은 앞에서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중에 펜을 돌리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시종장이 라틸을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데 라틸이 딴생각을 하는 게 눈에 보이다 보니 말을 걸지 못하고 저러고 있는 눈치였다.
“사블레 후작.”
라틸은 그 표정이 심각하단 걸 알아차리고서 펜을 내려놓고 얼른 말해보란 손짓을 했다. 그제야 시종장은 꾸벅 인사를 하고서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다나산에 있는 작은 마을에 흉악한 누군가가 나타나 폭파 전문 마법사를 찾아대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라틸은 “응?”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다나산이라면? 우리나라가 아니잖아요?”
다나산은 카리센과 타리움의 사이에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다. 안타까운 소식이고, 자신이 그 나라 왕이었더라면 심각하게 들을 이야기이긴 하지만 외국 황제 입장에서 저렇게 심각하게 보고 받을 일은 아닌 거 같아서.
“그렇지요. 그런데 다나산에서 이번에 우리 측에 성기사들을 보내 조사를 도와 달라 청해서 말입니다.”
“성기사를?”
부연 설명을 듣고서야 라틸의 표정도 굳었다.
“괴물들이 나타난 겁니까.”
“직접 본 건 아니랍니다. 하지만 싸움이 일어난 뒤 여관을 중심으로 마을의 반 정도가 사라졌다는군요. 이 때문에 사람의 짓이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폭파 전문 마법사가 한 짓은 아니고요? 폭파 전문 마법사가 그…… 자신을 찾는다던 사람이랑 싸우다가 한 짓일지도 모르잖아요.”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로운 사람이라. 마을을 그렇게 망가뜨릴 사람 같진 않다고 하더군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도 싸우다 보면 자제가 안 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이런 상황이니 확실하게 살펴서 나쁠 건 없지.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종이를 꺼내 그 위에 간단한 지시서를 적고 인장을 찍은 다음 시종장에게 건넸다.
“성기사들을 보내주겠다고 해요.”
“예, 폐하.”
시종장은 보고를 다 듣자 밖으로 나갔다. 라틸은 문이 닫히는 걸 바라보며 그간 조용했던 흑마법사 무리가 슬슬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걸까, 생각했다. 사실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란 표현을 쓰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직 뭘 제대로 한 적도 없는 것 같지만.
‘서넛이나 칼라인은 이 상황을 지켜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람의 입장에선 이 상황이 날벼락인데. 뱀파이어들의 입장에서도 그러려나? 아니겠지? 라틸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펜 뚜껑을 열어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라틸은 뭔가를 하기도 전에 도로 펜 뚜껑을 닫아버렸다.
‘내가 미쳤나 봐!’
‘뱀파이어들의 입장’이란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사실 때문이었다. 라틸은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쿵쿵쿵 두드리고서 책상에 달린 종을 빠르게 두드렸다. 신호를 보내자마자 바로 대기하던 시종들이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라틸은 손가락으로 아무 방향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서넛을 데려와라.”
“서넛 경이라면 지금 휴가…….”
“데려와. 급한 일이 생겼다고.”
공식적으로 서넛은 쫓겨난 게 아니라 휴가를 가 있는 것이었다. 시종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라틸이 다급하게 지시하자 알겠다면서 얼른 일어섰다.
“잠시.”
하지만 라틸은 시종이 막 나가려 하자 도로 붙잡고서 데려왔다.
“예, 폐하.”
시종이 다가오자 라틸은 제자리에서 발을 몇 번 빠르게 구르다가 몸을 휙 돌려 나갔다.
“내가 직접 간다.”
* * * 말을 타고 멜로시 영지로 가면서 라틸은 자신이 너무 멍청했다고 자책했다. 두 사람이 뱀파이어란 사실에 놀라서 중요한 일들을 죄다 지나쳐 버렸다. 라틸은 그들이 이 일련의 상황들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없다면 혹시 관련된 이들을 아는지, 다른 뱀파이어나 그런 존재들은 이 상황에 연루되어 있는지 등을 먼저 물었어야 했다. 그게 이제야 떠오른 것이다. 이동하는 순간순간 ‘내가 직접 갈 필요는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서넛의 정체가 뱀파이어란 걸 알아서인가. 다른 사람을 보내자니 찝찝한 구석이 있기에 라틸은 말고삐만 힘차게 쥐었다. 다행히 멜로시 영지는 수도에서 멀지 않으니 얼른 다녀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수도에서부터 멜로시 영지까지 나 있는 노란 길을 따라 이동한 라틸은 마침내 영지를 둘러싼 성벽을 발견하고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 등을 쓰다듬으며 라틸은 언덕 위에 서서 잘 정비된 영지를 바라보았다.
‘서넛 경. 날 원망하고 있을까.’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열심히 일했는데 바로 쫓아냈다고? 거칠한 말의 털을 무의식중에 쓸다가 라틸은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놀라는 병사들을 입단속 시킨 다음 성벽 부근을 지나 성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도로를 제외하면 사방이 풀 뿐인 길을 지나가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서넛이 보였다. 라틸은 말을 멈추고 웃으면서 그쪽을 보다가 표정이 굳었다. 서넛은 혼자 있지 않았다. * * * 딸랑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자, 점원은 그쪽을 쳐다보기도 전에 “어서 오세요!”라고 외쳤다. 접시 세 개를 아슬아슬하게 찬장에 쑤셔 넣는 데 성공한 점원은 서랍장 문을 떠밀듯 닫은 다음 그제야 안도해 문 쪽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손님은 카운터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
손님을 보는 순간. 점원은 자기도 모르게 힘이 빠져 팔을 떨구었다. 팔이 서랍장에 부딪히자 부실한 문이 도로 열리며 가까스로 집어넣은 접시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난 죽었다. 점원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손님의 얼굴을 보며 수긍했다. 괜찮아,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겠어. 그만큼 막 들어온 하얀 머리 손님은 얼굴이 기적이었다.
“괜찮아요?”
그 손님이 카운터 아래에 박살 난 접시 안부까지 물어주자, 점원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원래 다 금 가 있었어요.”
일주일 전 사장이 한정판 컬렉션으로 구입해 온 접시란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가 있었다.
“디자인도 구렸어요. 새로 사게 돼서 기뻐요…….”
손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서 돌아섰다. 점원은 심장을 부여잡고 카운터 뒤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쪼그리고 앉았다.
‘와. 진짜 인간 아닌 거처럼 생겼네.’
그리고 점원의 생각처럼 하얀 머리 손님은 인간이 아니었다. 여우 가면을 잡는 데 실패하고 돌아온 기르골이었다. 로드를 찾는 데 실패하자 방향을 바꿔서, 사디가 대적자가 맞는지부터 확인하기 위해 다시 수도로 돌아온 것이다. 기르골은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긴 다리를 꼬고서 옆에 있는 가판대에서 아무 잡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조금 전 점원에게 지어 보였던 깃털처럼 포근한 미소는 이미 사라졌고, 얼굴엔 귀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괴물? 하렘 호수에? 진짜야?”
“쉬쉬하곤 있는데, 내 동생 친구 애인의 사촌이 그쪽에서 일하고 있거든. 나타난 거 맞대.”
“네 동생의 친구의 애인의 사촌이면 너무 먼 사이 아냐? 말이 몇 번은 꼬여도 꼬였겠는데? 난 그런 얘기 못 들었어.”
“대신관이 바로 쫓아냈나 봐. 대신관 보고 달아났대.”
“와. 든든하네.”
“근데 괴물 말이야. 쌀알처럼 생겼다는데?”
“그게 뭐야?”
하지만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은 기르골은 점차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쌀알처럼 생긴 괴물? 생김새를 보니 분명 다크리처 같은데. 다크리처는 흑마법사의 명령에 철저하게 따른다. 그런 다크리처가 도망쳤다?
‘칼라인만 거기 숨어 있는 줄 알았더니. 흑마법사도 있었나?’
기르골은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면 후궁들 중에 칼라인과 흑마법사가 둘 다 있는 거다. 칼라인 하나만 있다면 단순 도피처일 수도 있지만, 숨은 이가 둘이라면……. 눈을 가늘게 뜬 기르골은 무의식중에 잡지를 팔랑팔랑 넘기다가 어느 한 방향을 보고서 손을 멈추었다.
“…….”
기르골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 랭킹. 최신판. 첫 번째 랭킹에 올라와 있는 칼라인. 그리고…… 대신관.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나문까지 여기에 있다고?’
그는 대적자 후보로 생각한 아이가 아트락시 공작가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후, 그쪽으로 늘 편지를 보냈을 뿐 라나문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진 않고 있었다. 대적자는 대적자로서밖에 가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대적자가 전대 뱀파이어 나이트와 같이 한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칼라인이 그쪽에 들어간 게 다른 이유가 있나?’
혹시 흑마법사가 그쪽에 괴물을 보낸 게 라나문이 대적자라고 의심을 해서는 아닌가? 생각에 잠겨 있자니 점원이 커피를 가져와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기르골은 잡지를 덮었다. 아까 수군거리던 이들은 이제 ‘무섭긴 하지만 대신관님도 있고, 카리센 연회장에서 좀비를 물리친 폐하의 특사 사디 경도 있으니 안심이다’라며 자신들을 위로하듯 말하고 있었다. 기르골은 커피잔을 들어 올리면서 히죽 웃었다.
‘대신관과 뱀파이어 나이트, 대적자일지도 모르는 이를 후궁과 특사로 둔 황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