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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뒤돌아 있으면 볼 수 없는 것들 (177/367)

177화. 뒤돌아 있으면 볼 수 없는 것들2021.11.07.

라틸은 내용물을 놀라서 쳐다보았다. 상자 안에서 나온 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커다란 곰 인형. 라틸은 당황해서 커다란 덩치를 내려다보다가 떨떠름하게 인형에게 물었다.

16551118056378.png“아…… 네가 동생이니?”

옆에서 타시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16551118056382.png“뭐 하시는 겁니까 폐하.”

16551118056378.png“동생이라며. 근데 얘가 나왔잖아.”

16551118056382.png“안을 보세요.”

라틸은 곰 인형을 들어 올려 보았지만 곰 인형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6551118056382.png“인형 안이요.”

그 모습을 보다가 타시르가 나서더니 곰 인형의 목덜미부터 엉덩이까지 달린 지퍼를 내렸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수북한 보석이 채워져 있었다. 라틸은 ‘뭔가’ 싶어서 고개를 내밀다가 번쩍거리는 광채에 놀라 물었다.

16551118056378.png“동생이 아닌데?”

타시르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16551118056382.png“진짜로 동생 소개받고 싶으셨습니까?”

16551118056378.png“아니. 그건 아닌데. 너라면 진짜 동생을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16551118056382.png“제가 처음에 그랬잖아요. 이 안에 뭐가 있는진 저도 모른다고요.”

아. 그랬지.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타시르는 괜히 서운한 척 인형의 귀를 잡아당겼다.

16551118056382.png“동생 얘기를 뒤에 꺼냈으니 당연히 농담인 걸 아실 줄 알았습니다.”

16551118056378.png“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릴 정신이 아니어서.”

말하고 나니 타시르가 무슨 일이냐고 물을까 봐 라틸은 괜히 주춤했다. 하지만 타시르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대신 곰인형 속에서 귀걸이를 찾아 꺼내더니, 라틸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16551118056382.png“제가 걸어드릴까요?”

라틸이 가만히 있자 타시르는 귀걸이를 들고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멍하게 있는 사이. 타시르가 라틸의 한쪽 귀를 손으로 문질렀다. 갑자기 예민한 부위에 뜨겁고 커다란 손이 닿자 라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는 손이 닿았을 뿐인데 과하게 반응한 게 부끄러워서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했다. 하지만 타시르는 라틸의 귀에 집중하고 있어서 라틸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이를 눈치챈 라틸은 일부러 굳혔던 표정을 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덜미에 밀착한 타시르의 손은 귀걸이를 라틸의 귀에 조심스레 달아주고 있었다.

16551118056378.png“……아직 멀었어?”

16551118056382.png“요즘 눈이 안 좋아서요.”

16551118056378.png“내가 할까?”

16551118056382.png“여기 거울도 없는 걸요.”

16551118056378.png“그럼 들어가서 하면 되는데.”

16551118056382.png“거의 다 했습니다.”

뜨거운 손길이 귓가와 목덜미를 연신 왔다 갔다 이동하자 라틸은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타시르는 가벼운 사람이고 사랑의 말을 가볍게 뱉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후궁이라기보다는 후궁 역할에 심취한 마약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크서클이 짙고 퇴폐적인 데다 비열한 인상이긴 해도 타시르는 명실상부하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귀를 조물조물 만지고 있으니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아름다운 남자들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후궁으로 두고서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건 라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손가락이 귀 안쪽에 스치는 순간. 라틸은 놀라 등을 세웠다.

16551118056382.png“다 됐습니다.”

거의 동시에 타시르가 귀걸이를 걸어주더니 웃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라틸은 얼굴이 벌게져서 그가 만지작거리던 귓가에 자신의 손을 댔다. 달랑달랑한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귀걸이 모양이 어땠더라?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귀걸이 모양조차 확인하지 못한 게 이제야 떠올라서, 라틸은 손으로 괜히 귀를 만지작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16551118056378.png“다른 한쪽은 내가 달게.”

그러나 타시르는 귀걸이를 내밀지 않았다. 웃고만 있을 뿐.

16551118056378.png“왼쪽은?”

그게 이상해 묻자 그가 자기 귀걸이 한쪽을 빼내더니, 라틸에게 건네주어야 할 귀걸이를 자기 귀에 달아 버렸다.

16551118056378.png“어?”

라틸이 황당해서 쳐다보자 타시르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자기가 달고 있던 귀걸이를 라틸이 펼친 손바닥 위에 내려놓고서 손수 손가락까지 접어주었다.

16551118056382.png“결혼하면 이런 거 해보고 싶었습니다. 한 쌍이어야 할 물품을 둘이서 나눠 갖는 거요.”

16551118056378.png“타시르…… 너 진짜 바람둥이 같구나.”

16551118056382.png“죄다 숙맥이면 쓰잖아요. 하나라도 달아야지요.”

실쭉 눈웃음을 지은 그가 라틸의 팔을 붙잡고서 손깍지를 끼어 왔다. 별거 아닌 행동이지만 칼라인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고민만 하던 라틸에겐 그가 자신을 손으로 단단하게 받쳐주는 것처럼 여겨졌다. 라틸은 그의 손을 같이 잡고서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댔다.

16551118056382.png“오늘도 제가 가벼워서 좋으신 겁니까?”

타시르가 농담하듯 가볍게 묻는 말에 라틸은 희미하게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18056378.png“응. 옆에 있으면 같이 가벼워져서 좋아. 지금은 좀 가벼웠으면 싶거든.”

칼라인은 너무 무거우니까. 사랑도 정체도 전부 다.

16551118056378.png“이 정도가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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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1118113928.jpg“전혀 좋지 않아요.”

16551118056382.png“뭐?”

16551118113928.jpg“아니, 그렇잖아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옆에서 위로해주는 잘생긴 남자라니. 아무리 봐도 나중에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빌면서 떠나줄 역할 같다고요.”

히얼란이 초조하게 뱉은 말에 타시르는 사탕을 빨아 먹다가 와득 깨 먹고 말았다.

16551118056382.png“뭐? 진짜야? 누가 그래?”

타시르가 허망하게 뱉은 말에 히얼란은 황급히 두 손을 싹싹 저었다.

16551118113928.jpg“아니, 아니에요. 부정 탈라. 절대 아니에요. 그런 말 없어요!”

타시르는 사탕 막대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히얼란은 푹 한숨을 내쉬면서 타시르의 한쪽 귀에서 반짝거리는 귀걸이에 대고 소원을 빌었다.

16551118113928.jpg“제발 폐하께서 우리 소단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러다가 문득 타시르는 클라인 황자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16551118113928.jpg“왜 저러고 있을까요?”

늘 거만하고 당당하게 다니던 클라인 황자가 멀지 않은 곳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고, 곁에서 시종과 호위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으니 영 이상하게 보였다.

16551118056382.png“그러게.”

타시르도 흥미가 가는지 사탕 막대를 계속 씹어대면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히얼란은 아까 타시르가 한 말을 떠올리며 소단주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저 황자님을 위로하러 가실 건가? 타시르는 여기에 모인 후궁들 중 가장 대인관계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니 클라인 황자를 위로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타시르는 클라인 황자가 시무룩해 하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더니, 곧 볼 거 다 봤단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16551118056382.png“가자. 배고프네. 뭐 먹지?”

16551118113928.jpg“황자님은요?”

16551118056382.png“심기 불편해 보이는 데 갔다가 싸움만 나지.”

아까랑 말이 달라진 거 같은데? 히얼란이 의아해서 쳐다보았으나, 타시르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만 했다. 히얼란은 그 뒤를 쫓아가며 힐긋 황자 쪽을 쳐다보았다. * * *

16551118113928.jpg“왜 저렇게 힐긋거린대요? 기분 나쁘게.”

바닐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악시안은 고개를 돌렸지만 클라인 황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단 얼굴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바닐은 타시르의 시종이 자꾸 이쪽을 쳐다보는 게 기분이 나빠서 인상을 구기다가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에 황자를 돌아보았다. 풀죽은 클라인 황자를 본 바닐은 덩달아 기운이 빠졌다.

16551118113928.jpg“황자님. 제발 기운 좀 차리세요.”

거만한 모습만 보며 지내다가 이렇게 힘없는 시금치가 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라트라실 황제가 하이신스 황제와 연인사이었단 이야기가 놀랍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그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고 이후로는 잘 지내는 것 같았기에, 바닐은 그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나보다. 겉으로 보기엔 잘 풀린 것 같지만 그 일은 클라인 황자의 어딘가를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가 깊은 자국을 남긴 게 분명했다.

16551118113928.jpg“폐하가 안 오시면 황자님이 폐하를 직접 뵈러 가면 되잖아요?”

바닐의 말에 악시안도 순순히 동의했다.

16551118113928.jpg“한두 번도 아닌데, 갑자기 부끄러워하실 필요가 없지요.”

하여튼 이 새낀 말하는 게 늘 조금씩 기분 나빠. 바닐은 악시안을 째려보면서 표현을 약간 바꾸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클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16551118172404.png“그땐 폐하가 날 사랑한단 확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기가 죽어버릴 수도 있구나. 바닐은 시무룩해진 클라인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갑갑해져 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할 일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열중할 텐데. 여기서는 딱히 할 일도 없다. 해야 할 일은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뿐인데, 그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 내내 바닥만 내려다보던 클라인이 갑자기 고개를 확 들더니 얼굴이 환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클라인이 보는 방향을 본 바닐은 먼발치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제를 보자 안도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 * *

16551118056378.png“클라인?”

타시르의 부모님이 챙겨 줬다는, 속에 보석을 감춘 곰돌이 인형을 업고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클라인이 힘없이 벤치에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16551118056378.png“괜찮나?”

멀리서 보기에도 영 기운이 없어 보여서 라틸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거대한 돌덩이에 짓눌린 것 같던 클라인은 라틸을 보자마자 햇빛을 반사한 유리판처럼 순간 반짝이며 빛이 났다. 미소를 받는 사람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만한 그런 미소였다.

16551118056378.png“넌 볼 때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16551118056378.png‘아. 볼 때마다는 아닌가. 전엔 화낸 적도 있긴 하지.’

어쨌든 라틸은 클라인이 저렇게 반겨주니 괜히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서 흐뭇해졌다. 칼라인은 아무리 불러도 안 오지만 인형에 보석을 담아 주는 타시르도 있고 눈이 마주치면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클라인도 있고, 이 정도면 아주 좋은 거지. 라틸은 속으로 칼라인 따위가 없어도 자신은 잘만 지낸다고 생각하며 클라인의 옆에 앉았다.

16551118056378.png“오늘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

16551118172404.png“폐하를 봤으니까요.”

16551118056378.png“그게 그렇게 즐거운 일이야?”

16551118172404.png“폐하가 등에 뭘 업고 있는 걸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라틸이 곰 인형을 앞으로 내밀자 클라인은 인형의 머리를 쓸면서 비실비실 웃었다.

16551118056378.png“타시르 부모님이 준 건데. 마음에 들면 나도 너 인형 하나 사 줄까?”

퍽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 라틸이 묻는 순간. 클라인이 곰 인형의 귀를 뽁 뽑아버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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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18056378.png“여보세요. 왜 남의 인형 귀를 뽑아 가?”

16551118172404.png“자세히 보니 이거 곰처럼 안 생겼습니다, 폐하.”

16551118056378.png“네가 방금 귀를 뽑았으니까.”

전체적으로 클라인은 내내 밝고 붕 뜬 분위기였다.

16551118056378.png‘그래. 모두가 고민할 필요는 없지. 너라도 밝으면 됐다.’

라틸은 그런 클라인을 귀엽게 바라보다가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인사를 건네고 일어섰다.

16551118172404.png“폐하.”

그런데 떠나려는 라틸을 클라인이 갑자기 손을 뻗어 붙들었다.

16551118056378.png“왜 그러느냐?”

라틸이 돌아보았으나, 막상 불러 놓고서. 클라인은 몇 번 우물거리더니 고개를 젓고서 손을 내렸다. 할 말이 있나? 그런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저렇게 망설이지? 라틸은 클라인에게 ‘왜 그래?’라고 물어보아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꼭 말할 내용이라면 클라인이 진작 말했을 거란 생각을 하고서 몸을 돌렸다. 클라인이 그 뒤에서 손을 뻗었으나 잡지는 못하고 도로 내렸다는 걸, 다른 방향을 보고 걸어가는 라틸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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