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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걱정 마세요. 잘생겼거든요. (176/367)

176화. 걱정 마세요. 잘생겼거든요.2021.11.03.

16551117846094.png‘칼라인은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았어.’

궁전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벗으며 라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16551117846094.png‘칼라인이 한 말은 사실이었어. 칼라인이 만난 도미스는 가짜였어.’

치렁거리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어 하나로 묶은 뒤, 라틸은 주위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고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칼라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사람이 되는 건 아닌데도. 게다가 지금 나타난 도미스가 가짜라 한들, 칼라인이 도미스를 사랑한 것도, 그녀를 아직 잊지 못하는 것도 그대로인데. 칼라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단 걸 알게 되자마자 라틸은 미치도록 그가 보고 싶어졌다. 본궁으로 향하던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꾸었다.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리기 직전이란 사실을 알아버린 어린아이처럼, 라틸은 칼라인의 방을 향해 그대로 질주했다. 심장 안에서 커다랗게 풍선이 부푸는 기분이었다. 그곳에 가면 칼라인이 돌아와 있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또 창가에 기대어 서 있다가 “주인.”하고 웃으면서 돌아볼 것만 같았다. 그래. 칼라인은 거기에 있을 거야. 내가 무서워하지 않으면 돌아온다고 했잖아. 지금. 지금이 바로 무섭지 않은 순간이다. 공포가 사라진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호위가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라틸은 방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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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17846094.png“!”

그러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건 적막뿐이었다. 칼라인은 창가에 서 있지 않았다. 침대 가로 다가가 캐노피에 달린 차양을 들어올려 보았으나, 그 안쪽에도 역시 보고 싶은 남자는 없었다.

16551117846094.png“…….”

라틸은 힘없이 차양을 손에서 내리고서 넓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칼라인이 있을 땐 그리 넓은 줄도 모르겠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커 보이는 걸까.

16551117846094.png“칼라인?”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틸은 주저하다가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서랍 문을 열어 노트를 한 권 꺼냈다. 노트 앞부분에는 펜으로 쓰면서 눌린 자국은 남아 있었지만, 내용물은 뜯어내서 보이지 않았다. 가장 뒷장을 펼친 라틸은 휴대용 펜을 꺼내 그 위에 흘리듯 글자를 적어넣었다. -칼라인. 이제 너 안 무서워. 돌아와. 하지만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16551117846094.png“무서운 건 가라앉았는데. 더 늦으면 내가 화낼 거다. 이젠 네가 날 무서워하게 될 거야, 이 나쁜 놈아.”

라틸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쪽지를 침울하게 내려다보다가 힘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 * * 얼마 뒤. 라틸이 바라보다 간 쪽지를 길쭉한 손가락이 집어 들었다.

16551117846136.png“가엾어라.”

쪽지를 집은 이는 타시르였다. 타시르는 반듯한 황제의 글씨를 바라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추고 다시 책상 위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16551117846136.png“역시. 황제가 용병왕을 내쫓은 건 아닌가 보네.”

그럼 용병왕이 혼자서 나간 건가? 타시르는 시종을 대동하고 용병왕의 처소 앞을 지나갈 때를 떠올렸다. 복도 앞에는 평소처럼 호위가 서 있었고, 시종 역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뜨거운 물과 향 좋은 가루를 푼 대야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칼라인이 멀쩡히 방 안에 머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16551117846136.png‘호위는 모를 수 있지. 하지만 시종은 모를 수 없다. 어쨌든 시종을 남겨두고 간 걸 보면 돌아올 마음은 있단 건데…….’

타시르는 생활 물품과 가구가 전부 그대로인 방 안을 휙 둘러보며 뒷짐을 지었다. 하지만 왜? 황제가 쫓아낸 게 아닌데, 용병왕이 혼자 떠나갔어야 할 일이 뭘까. 황제가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면 밀명을 받아 임무를 나간 거라 생각할 텐데. 분명 그것도 아니지 않던가.

16551117846136.png‘대적자란 이들과 관련이 있어서 떠난 건가? 없는 쪽 같긴 한데.’

황제가 사람을 풀어 찾지 않는 걸 보면, 용병왕은 분명 황제에게 떠난단 말도 하고 갔을 테고……. 아무리 방 안에서 머리를 굴려봐도 칼라인이 보인 이 이상 행보는 영 짐작이 가지 않는지라, 타시르는 자신의 머리에 휴식을 주기 위해 창문을 넘어 다시 밖으로 나갔다.

16551117880593.jpg“아이고 소단주님! 얼른 오세요!”

창문 앞에 쪼그린 채 망을 보고 있던 시종 히얼란은, 타시르의 길쭉한 다리가 나타나자 얼른 딱따구리처럼 제 도련님을 쪼아댔다.

16551117880593.jpg“누가 올까 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얼른 가야 돼요!”

16551117846136.png“누가 오면 다리에 쥐가 났다고 하면 되지. 뭘 그리 떨어?”

16551117880593.jpg“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는다고요!”

타시르는 히얼란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히얼란은 상대의 그런 태도를 다 알면서도, ‘그래도 잔소리를 계속하다 보면 뭐라도 하나 고치겠지’란 생각을 하며 연신 뒤를 쫓아갔다.

16551117880593.jpg“으악.”

하지만 갑자기 타시르가 우뚝 멈춰서는 바람에 히얼란은 그의 등에 이마를 부딪치고서 멈춰 섰다.

16551117880593.jpg“왜요?”

히얼란이 묻자, 타시르는 ‘쉿’ 하고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고서는 어딘가를 눈으로 가리켰다.

16551117880593.jpg“폐하네요?”

그곳에 있는 건 라트라실 황제였다. 쪼그리고 앉은 황제. 무릎에 뺨을 대고 있는 바람에 볼살이 밀가루 반죽처럼 찌그러진 황제를 본 히얼란은 작게 감탄했다.

16551117880593.jpg“저러고 계시니 평소보단 좀 덜 무서워 보이시네요.”

제복 차림을 하고서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너무 멀게 느껴졌는데. 저러고 있으니 저 또래의 청년 같은 모습도 보여서 히얼란은 연신 신기해했다.

16551117846136.png“그러게. 귀여워라.”

16551117880593.jpg“예?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그냥 평소에 비해서만 좀 덜 무서운 건데요.”

히얼란은 단호하게 타시르의 평가에 반대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 타시르가 갑자기 그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놀라서 옷자락을 잡았다.

16551117880593.jpg“소단주님! 어디 가시려고요?”

16551117846136.png“납작 가자미가 된 나의 아내에게.”

타시르의 표현에 히얼란은 더욱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하자 목소리를 낮추어 잔소리를 퍼부었다.

16551117880593.jpg“지금요? 지금 가면 안 돼요. 폐하 좀 보세요. 딱 봐도 기분 나빠 보이시잖아요. 지금 갔다가 불똥 튀는 수 있어요!”

히얼란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라나문이 이상한 약을 먹었을 때 전부 다 불러내서 ‘너희도 먹어라’고 했던 황제, 게스타가 돌을 맞았을 때 궁인들까지 전원 불러모아 놓고 경고하던 황제……. 하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이복형제를 처형시킨 일이었다. 그 당시엔 궁전에서 지내지 않았지만,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저렇게 우울해하는 황제에게 깝죽거리는 소단주가 다가가려 하다니. 미움 사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16551117846136.png“행복한 사람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지.”

16551117880593.jpg“네?”

16551117846136.png“가려면 지금이야.”

하지만 타시르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고는, 옷자락을 쥔 히얼란의 손을 뚝 떼내고서 지시했다.

16551117846136.png“아버지가 폐하께 전하라 한 선물. 뛰어가서 그거 가져와. 빨리.”

  * * * 도미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는 문제는 칼라인이 곁에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도미스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확인하고 싶던 건 그녀가 가짜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조금 들여다보게 된 라틸은 시무룩해져 무릎에 얼굴을 힘없이 비볐다. 생일에 선물을 준다더니. 그런 약속을 해놓고 도망가버린 칼라인에게 화가 났다.

16551117846094.png‘그래. 그건 그냥 도망이야. 날 위한 게 아니라 달아난 거라고. 겁쟁이. 진짜 날 위해 떠난 거라면 부를 방법도 알려주고 갔어야 하잖아.’

시종을 닦달하는 것. 이미 해보았다. 하지만 시종은 자기가 더 당황할 뿐. 칼라인이 어디에 갔는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사람을 붙여 보아도 마찬가지. 시종은 칼라인이 방 안에 머무는 것처럼 제 할 일을 계속할 뿐, 그와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진 않았다.

16551117846094.png“후우…….”

이 와중에 대신관의 귀걸이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왜 집자마자 부서졌던 건지. 대신관이 그걸 뒤늦게라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지. 고개를 들면 호수 주위를 정찰 중인 성기사들이 보였고, 이 점 역시도 라틸에겐 심란하긴 매한가지였다. 저들을 보고 있으면,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성기사와 병사들을 사방에 보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보고가 없단 게 떠올랐다. 라틸은 흑마법사의 존재가 알려졌으니, 이제 그들이 온갖 기행과 악행을 저지를 거라 여겼다. 사방에서 사건이 터져나가서 몹시 바빠질 거라 각오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은 조용히 수면 아래에서 모든 걸 다 해내려는 건지, 아니면 힘이 아직 그리 강하지 않은 건지, 생각보다 조용했다. 호수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가 대신관을 보고 돌아간 것만 두 번째. 여기에서만 그런 것도 아닌 게, 카리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니 황후가 실종된 게 최근에 가장 큰 일이었고, 또다시 좀비가 나타났단 이야기는 없었다.

16551117846094.png‘아이니 황후는 어디 갔나 몰라.’

그때.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나서 라틸은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댄 채 고개 방향만 돌렸다.

16551117846094.png“!”

커다란 선물 상자였다. 커다란 선물 상자가 다리가 달려 걸어오고 있었다. 당황해서 쳐다보고 있자니, 근처로 다가온 선물 상자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117846136.png“폐하. 선물입니다.”

16551117846094.png“그건 누가 봐도 보이는…… 타시르?”

라틸이 목소리를 알아듣고 부르자, 선물 상자 뒤에서 작은 얼굴이 삐죽 모습을 드러냈다. 타시르가 맞았다. 선물 상자가 너무 커다랗다 보니, 상체가 다 가려졌던 것이다.

16551117846136.png“이거 무겁네요.”

타시르가 끙 소리를 내며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는 동안, 라틸은 몸을 일으키며 당황해 물었다.

16551117846094.png“선물은 줬잖아?”

16551117846136.png“네. 이건 제 선물이 아니라 제 부모님이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전 전달 심부름을 한 거고요.”

16551117846094.png‘아. 며칠 전에 밖에서 마주쳤을 때. 그때도 뭘 들고 있었지. 저거 받으러 갔나 보다.’

라틸은 타시르가 갑자기 졸졸 쫓아오는 바람에 황당했던 며칠 전 일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17846094.png“고맙네. 잊지 않고 챙겨주시고.”

16551117846136.png“폐하 생일을 못 기억하는 국민 숫자가 더 적을걸요.”

라틸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농담한 타시르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와 서더니 선물 상자의 리본 끄트머리를 집어 건네며 물었다.

16551117846136.png“여기까지 들고 온 김에 뭐가 들었나 같이 확인해 볼까요?”

16551117846094.png“뭐가 들었는데?”

16551117846136.png“저도 봐야 압니다. 안 알려 주시더라고요.”

16551117846094.png“어? 정말? 아무 말 안 하고 주셨어?”

16551117846136.png“제 미남 동생이 들어 있어요.”

16551117846094.png“어?”

놀란 라틸이 기겁해 쳐다보자, 타시르는 비실 웃으면서 라틸의 볼에 대고 속삭였다.

16551117846136.png“걱정 마세요. 잘생겼거든요.”

16551117846094.png“뭐, 아니, 아니, 잠시만. 진짜야?”

타시르 밑으로 남동생이 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진짜 넣어서 보냈다고? 실제로도 몸을 잘 구겨 넣으면 사람이 숨을 만한 선물 크기이긴 한지라, 라틸은 당황해서 황급히 리본을 뜯었다. 아트락시 공작이나 재상이 보낸 선물이라면 타시르의 말이 농담 같을 텐데. 타시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툭 치면 벗겨지는 옷을 입어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고, 라틸은 그걸 현장에서 봐버렸다. 전적이 있는지라 몹시 수상했다. 마침내 리본을 당기자 선물 포장지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커다란 상자가 드러났다. 라틸은 상자를 힘으로 뜯어버렸다.

16551117846094.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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