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중간에 있던 사람2021.10.31.
기분이 나쁘지만 도미스는 칼라인의 위치를 알지도 몰라. 이 생각을 하고 도미스를 찾아 나선 라틸은 뜬금없이 마주친 타시르가 자신을 졸졸 따라오자 눈살을 찡그렸다. 혹시 오해일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커다란 유리가 앞에 달린 가게를 지나가며 뒤쪽을 살펴보기를 몇 번. 라틸은 타시르가 자신을 쫓아오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혀를 찬 라틸은 커다란 기둥 뒤를 지나가며 힐긋 뒤를 확인하다가, 미로처럼 꼬여 있는 골목길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 * * 라틸이 타시르를 따돌리는 그 시각.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깊은 지하성 안에서도 쫓고 쫓기는 추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쫓는 이는 기르골이었고, 쫓기는 이들은 동물 가면을 쓴 이들이었다. 목숨을 건 이 술래잡기에서 승기를 쥔 쪽은 동물 가면들 쪽이었다. 평소에 동물 가면들이, 기르골에게 은신처를 들킬 경우를 미리 대비하고 착실하게 연습한 덕이었다. 개중에서도 여우 가면은 가장 안전하게 대피한 편이었는데, 그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우굴 덕분이었다. 여우 가면은 연습을 했는데도 제대로 탈출하지 못하는 동작 굼뜬 몇몇을 자기 대피소에 밀어 넣은 후, 입구에 토끼 가면과 나란히 서서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직 새 거처를 못 지었는데. 귀찮게 됐네.”
여우 가면의 구시렁거림에 토끼 가면은 단호하게 반박했다.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닐 텐데.”
“제일 큰 문제야. 여긴 위치도 좋고 방어막도 튼튼하다고. 이런 곳을 또 구하기 쉬울 거 같아?”
“이 정도로 방어가 철저한 곳을 만들 필요가 있나, 이제? 또 가짜를 만들 수도 없잖아?”
토끼 가면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돌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확신했다.
“우리가 데리고 있던 로드가 가짜란 걸 들켰을 거다. 이젠 가짜를 또 만들어도 소용없어. 기르골은 바보가 아냐. 두 번 속지 않아.”
여우 가면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식시귀를 뱀파이어 로드로 위장한 건 무리였나.”
“식시귀는 식시귀 냄새가 나니까. 그러게 내가 식시귀는 별로라 했잖아.”
“아주 가까이 안 오면 냄새가 나는지 아닌지 알 게 뭐야. 조금 날 뿐이잖나. 후각이 둔한 녀석들은 모를 정도로.”
“하지만 기르골은 후각이 둔하지도 않고 가까이도 왔단 게 문제지. 틀라가 가짜 로드란 걸 지금쯤 알아냈을 거다.”
토끼 가면이 혀를 차면서 말하자, 여우 가면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바보 같은 황자. 내가 도망치자고 했을 때 같이 갔더라면 서로서로 좋았을 것을.”
* * * 틀라가 아낙차를 데리고 지하성을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기르골은 여우 가면을 찾아내려 지하성 내부를 뒤져대고, 지하성의 동물 가면들은 기르골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는 그때. 라틸은 타시르를 따돌리는 데 성공하고 마침내 아이도미스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막상 찾아낸 아이도미스가 용병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서 처음에는 말을 걸기가 힘들었지만, 다행히 15분 정도가 지나자 용병들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아이도미스는 노천카페에 홀로 남아 있었다. 라틸은 그녀가 혼자가 되자마자 다가가며 불렀다.
“저기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무언가를 읽고 있던 아이도미스는, 라틸이 부르자 고개를 들고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사디 양?”
이런 곳에서 사디와 마주칠 줄 몰랐단 얼굴이었다. 나도 우리 둘이 다시 만날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어. 라틸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재차 말을 걸었다.
“시간 돼요?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이도미스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날 어떻게 찾았어요?”
“전에도 이 부근에 있길래. 계속 이 부근에만 있네요?”
라틸은 저벅저벅 걸어가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도미스는 눈썹을 치켜올리긴 했으나 꺼지라고 하진 않았다. 라틸이 의자에 앉자마자 점원이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라틸은 그것을 받아 훑어보는 척하다가, 점원이 천천히 고르라며 자리를 비켜주자마자 물었다.
“전에 내가 라트라실 황제의 명령으로 그쪽이랑 칼라인을 염탐한다고 쏘아붙였죠?”
라틸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아이도미스를 어떻게 떠보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다짜고짜 말을 꺼내야 할지, 돌려서 슬쩍슬쩍 찔러보아야 할지. 처음 라틸은 ‘칼라인과 도미스의 첫 만남’에 관해 물어서 그녀가 진짜 도미스인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첫 만남 때 미묘하게 신경전을 벌였던 ‘사디’가 칼라인과 도미스의 첫 만남에 대해 물어보는 건 영 뜬금없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라틸은 이런저런 생각 끝에, 현재까지 이어진 과거의 인연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염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거 같던데?”
라틸이 일부러 좀 기분 나빠하는 내색을 보이자, 아이도미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 날 염탐하다니?”
“그쪽 친구가. 이름이 기르…… 뭐라더라? 그 사람이 그쪽을 계속 쫓아다니던데. 그 쪽한텐 뭐라고 안 해요?”
점원이 이쪽을 계속 힐긋거리자, 라틸은 아무거나 주문한 다음 메뉴판을 돌려주고서 다시 아이도미스를 보았다. 그녀는 자기 찻잔을 손에 쥔 채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알아들은 얼굴이 아니었다.
“기르?”
라틸은 아이도미스가 ‘기르골?’이라 대답할 거라 생각하다가, 그 눈빛을 보자 덩달아 ‘어라?’ 싶어졌다. 왜 저러고 있지? ‘기르’까지 나왔으면 당장 알아들어야 할 이름 아닌가? ‘기르골 말하는 거야?’라고 물어봐야 하잖아?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멀뚱히 있기를 잠시. 점원이 라틸이 주문한 커피를 가져와 앞에 내려놓고 가자, 라틸은 떨떠름해서 물었다.
“당신 친구 아니에요? 왜, 머리 하얗고 눈 빨갛고.”
라틸의 설명에 아이도미스의 눈과 입이 커다래졌다. 이제야 누군지 알아듣겠단 것처럼. 실제로 그녀는 아주 작게 “설마.” 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라틸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아이도미스가 무언가를 더 묻기 위해 자신을 보는 순간. 빙그레 웃었다.
“그쪽. 가짜구나?”
“뭐?”
“도미스인 줄 알았는데. 도미스가 아니네.”
라틸은 도미스가 환생한 사람이란 걸 알지 못했다. 자신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상대가 환생을 했기 때문에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옵션 따위는 라틸에겐 없었다. 자기 친구인 기르골을 전혀 모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라틸에겐 눈앞의 저 도미스 얼굴을 한 사람이 도미스가 아니란 충분한 이유였다.
* * * 아이니는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칼라인에게 내내 도미스의 환생이란 걸 부정당했는데. 이젠 자신과 별 사이도 아닌 여자가 자신을 부정한다. 심지어 그 여자는 아이니가 도미스의 모습으로 바꾸기 전에도 칼라인 관련해서 주제넘은 이야기를 한 전적이 있다 보니, 아이니는 더욱 화가 났다. 그러나 화나는 와중에도 그 ‘하얀 머리에 붉은 눈’ 이야기는 신경이 쓰였다. 하얀 머리에 붉은 눈. 그녀를 추적했다는 자. 분명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공격하다가 칼라인이 막아줘서 달아난 그 뱀파이어 이야기일 것이다. 새삼 그 하얀 머리가 두렵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이니가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라트라실 황제의 특사일 뿐인 저 여자가 어떻게 하얀 머리 뱀파이어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상대가 진짜 도미스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데 사용했느냐는 점이었다.
“내 말이 틀렸어요?”
아이니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맞은편에서 사디가 놀리는 투로 되묻더니 자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멀지 않은 좌석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뱀파이어 용병 하나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실 아이니는 아까 함께 있던 뱀파이어 용병들에게 ‘갈색 머리 여자가 자꾸 이쪽을 쳐다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갈색 머리 여자가 사디일 거란 생각을 해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아이니는 친구 뱀파이어들을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물리고서,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 남으라 한 뱀파이어 하나에게는, 나중에 자신이 신호를 보내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갈색 머리 여자를 공격하라고 미리 언질도 해두었다. 아이니는 여전히 사디가 대적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두면 사디가 정말로 뱀파이어와 겨룰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사디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그녀를 공격한 하얀 머리 뱀파이어에 관한 내용일 줄은 몰랐지만.
‘지금 공격해 봐.’
아이니가 눈짓하자, 약속했던 뱀파이어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얘기하죠.”
아이니는 이렇게 둘러대고서 노천카페를 벗어나 인적이 거의 드문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물어볼 게 하나 더 있어요.”
사디는 이렇게 말하면서 순순히 그녀를 따라왔다. 그러다 마침내 사람들이 아무도 오가지 않는 골목길, 그중에서도 조금 넓은 곳에 도착한 순간. 아이니의 눈짓을 받고서 미리 이곳에 도착해 있던 뱀파이어가 곧장 사디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아이니는 뒤로 물러나며, 사디가 눈 깜짝할 사이 코앞에 나타난 이를 놀라 쳐다보는 걸 구경했다. 상대가 대적자가 아닌 것 같으면 적당히 상대하고 그만두라고 당부해 두었기에 걱정되는 마음은 없었다.
‘만약 대적자가 누구인지 내가 알아낸다면…… 칼라인에게 도움이 되겠지.’
지금은 계속 그녀를 부정하는 칼라인도, 나중에는 그녀의 진심을 알아줄지도 몰랐다. 그녀가 로드가 아닐 때라도 그와 한편이 될 거라는 사실도. 생각을 마치자마자, 놀라서 비틀하는가 싶던 사디가 몸을 아래로 숙이더니 달려든 이의 복부를 주먹으로 내려치고서 다른 손으로 턱을 가격했다. 일반적인 힘으로는 뱀파이어에겐 충격조차 주지 못할 터이나, 사디가 내려치자 제대로 타격이 되었는지 용병으로 위장한 뱀파이어가 뒤로 떠밀리듯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아이니는 생각했다.
‘역시 저 여자가 대적자 같은데.’
뱀파이어 용병이 아이니를 쳐다보자, 그녀는 ‘이제 됐으니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상대가 대적자라면 뱀파이어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거로도 모자라 정말 없앨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도망가게 해야 했다. 뱀파이어는 화난 얼굴로 사디를 보긴 했으나, 미리 약속한 대로 그 자리를 피했다. 뱀파이어가 사라지자 아이니는 사디를 쳐다보았다. 사디 역시 아이니를 보고 있었다. 잠시 커다란 비둘기가 다녀갔단 표정으로.
“아까 그자. 그쪽이 시켜서 덤빈 건가?”
그러다가 눈치 빠르게 물었으나, 아이니는 대답 대신 돌아섰다. 저 여자가 대적자일 확률은 이로써 더 올라갔다. 그거면 됐다. 당장 더 얽힐 필요는 없었다.
“이봐. 혹시 칼라인이 그쪽이랑 있어?”
뒤에서 사디가 물었으나, 아이니는 무시하고 걸어갔다. 다행히 사디는 더 쫓지 않았고, 아이니는 사디가 없는 곳에서 아까 자신의 지시로 사디와 겨룬 뱀파이어 용병을 만나 물어볼 수 있었다.
“어때? 그 애가 대적자가 맞는 거 같아?”
용병은 상의를 조금 들어, 그 짧은 사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자신의 배를 보여주었다.
“대적자가 맞는진 모르겠지만 힘은 엄청나게 세.”
“대적자니까 센 거 아니겠어?”
“그럴지도.”
아이니는 용병에게 상의를 내리라 하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칼라인이 나랑 있냐는 소린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칼라인은 하렘에 있는 거 아니었나?”
그 순간. 용병이 아이니에게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이니는 조용해져서 용병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눈으로 물었으나, 용병은 대답 대신 주위를 살피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 후. 용병은 입에서 손을 떼면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소리라니?”
* * *
‘감이 좋네.’
담벼락 뒤쪽에서 타시르는 한숨을 내쉬고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양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 있었다.
‘재밌네. 우리 귀족 도련님은 자기가 대적자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쪽에선 다른 여자가 대적자라 그러고 있고. 이 와중에 용병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