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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실타래 (174/367)

174화. 실타래2021.10.27.

멋대로 쳐들어와서 멋대로 때리고 멋대로 목을 떼고서는. 마치 자기가 사기당해 이상한 물건을 구매했단 얼굴이었다. 한껏 기대했던 물건에서 불량을 발견한 표정. 틀라는 후들후들 입술을 떨다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써보았다.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하자 방향감각을 잃은 몸이 엉뚱한 방향으로 더듬더듬 나아가는 게 보였다. 기르골은 ‘웩’하는 표정으로 틀라의 머리를 자기 무릎에 두더니, 거기에 팔을 괴면서 중얼거렸다.

16551117049458.jpg“날이 갈수록 머리 굴리는 방법만 좋아지는군.”

정확히 누구를 겨냥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틀라가 로드라고 추켜세운 이들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 틀라도 두려움 한편에서 여우 가면과 토끼 가면 등 이 지하성 패거리들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이 진짜 로드라면 이 상황이 억울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긴 할 것이다. 전생에서부터 대대로 적이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자신이 로드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이 상황이 이전보다 훨씬 끔찍하게 여겨졌다. 자신이 로드라 생각할 때도 환생하는 로드를 쫓아다니며 죽인단 배신자가 이해가 안 갔는데. 심지어 자신이 로드도 아니라니. 그럼 자신은 이 미친 뱀파이어와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데 내내 쫓겼단 거 아닌가? 쫓기고, 숨고, 머리가 이놈의 쿠션처럼 쓰이고 있다.

16551117049458.jpg‘여우 가면……!’

틀라는 이를 갈았다. 그는 전에는 여우 가면이 ‘실수’로 그를 로드로 착각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기르골의 말을 들어보니 ‘실수’가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우 가면이 진짜 로드를 이 미친 뱀파이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를 방패처럼 세운 게 분명했다. 전쟁터에서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가짜 장군이나 가짜 왕처럼. 자존심이 밀가루 반죽처럼 완전히 짓뭉개져 버렸다. 너무 화가 나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이런 식으로! 그를 부활시킨 것도 이런 계책 때문이었을까? 틀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서글픈 죽음을 마지막으로 평안을 찾았을지도 몰랐다. 원치 않는 죽음이었으나 그걸로 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우 가면 패거리들은 죽은 그를 살려내 더한 괴로움과 수치심을 주었다. 라틸과 그는 황좌를 놓고 서로의 목을 노린 것이었다. 같은 목표가 있기에 싸운 거였다. 그러나 여우 가면 패거리들은 그조차 아니었다. 그저 필요를 위해 그를 이용했다. 머리를 잃은 그의 몸뚱어리가 무릎을 꿇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16551117049458.jpg“음?”

기르골은 그게 흥미로운지 머리와 몸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마다 팔에 눌린 머리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틀라는 이를 느끼며 소리 없이 끅끅거리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16551117049458.jpg“진짜 로드의 정체. 내가 가르쳐줄게.”

미세하게 꼬무락거리던 기르골이 움직임을 멈췄다. 틀라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 자신의 말에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으나 방향이 맞지 않아 볼 수가 없었다. 틀라는 입술을 깨물고 기르골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다급하게 부탁했다.

16551117049458.jpg“나와 손을 잡자.”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16551117049458.jpg“내가 왜?”

웃음기 섞인 목소리. 틀라에겐 그 비웃음이 ‘머리밖에 남은 게 없는 약해 빠진 가짜 로드 따위를 내가 왜 거두어들여야 하느냐’로 들렸다. 틀라는 황급히 설명을 이어갔다.

16551117049458.jpg“나도 이용당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약하지도 않아. 당신이 지나치게 강한 거지.”

16551117049458.jpg“…….”

16551117049458.jpg“나도 복수하고 싶다. 진짜 로드와…… 날 이용한 그 동물 대가리들에게.”

말을 할수록 틀라의 목소리에 힘과 원한이 들어갔다. 정말로. 그저 이 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자신을 로드라고 추켜세워주면서 이 모든 상황을 옆에서 즐겁게 구경했을 이들에게, 자신이 느낀 이 모욕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기르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도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틀라는 조마조마해서 그가 무어라 말하길 기다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기르골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16551117049458.jpg“여우 가면에게조차 이용당한 놈이 내게 도움이 될까?”

16551117049458.jpg“없는 것보단 나을지도 몰라! 나는…… 나는 황자였다. 단 두 개뿐인 제국의 황자. 타리움의 황자!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어!”

16551117049458.jpg“황자라.”

황자란 소리에 기르골이 조금 호기심을 보이는 듯하자, 틀라는 다시 간절하게 자신의 쓸모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입을 열었다. 개중 헛소리가 섞여 있단 생각도 들었으나,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런 불안감은 더욱 강해졌다. 생각해보니 이제 그는 여우 가면에게도 쓸모가 없어지지 않았던가. 기르골이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이제는 여우 가면이 어떻게 나올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필요 없으니 가라고 내쫓으면 그나마 낫지. 어쩌면 ‘너무 많은 걸 알았다’라면서 그와 어머니를 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틀라는 이런 이야기까지 기르골에게 전부 내뱉었다.

16551117049458.jpg“그래. 그럼 우리 황자님은, 진짜 로드가 누구라 생각하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던 기르골이 마침내 말을 끊으며 물었다. ‘대답만 듣고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기에 틀라는 바로 외쳤다.

16551117049458.jpg“라나문!”

16551117049458.jpg“라나문?”

16551117049458.jpg“아트락시 공작가의 라나문.”

이렇게 말하고 나니 오래 산 뱀파이어는 못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틀라는 굳이 덧붙였다.

16551117049458.jpg“타리움의 귀족이다. 타리움에서 아트락시 공작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 라나문은 그 집 장남이고.”

그런데 뭐가 그리 웃긴 걸까. 틀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르골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왜 웃어? 틀라는 당황했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재밌어 죽겠단 웃음을 흘릴 일이 있나? 의아해하고 있자니, 다 웃은 기르골이 조롱했다.

16551117049458.jpg“넌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16551117049458.jpg“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순간. 기르골이 들어왔던 그 무너진 벽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외쳤다.

16551117049458.jpg“라트라실 황제다!”

16551117049458.jpg‘어머니?’

틀라는 눈동자를 최대한 위로 끌어올려 목소리를 낸 사람이 정말 자신의 어머니가 맞는지 확인하려 애썼다. 처음에는 눈 근육이 아플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발 굽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어머니가 이곳에 온 후 자주 신고 다니는 신발 굽이 보이자, 틀라는 외치며 들어온 게 자신의 어머니란 걸 깨닫고 공포에 젖어 절규했다.

16551117049458.jpg“어머니! 가세요!”

기르골 이 미친놈이 어머니에게까지 해를 입힐까 두려웠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라 목이 떨어져도 죽지 않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16551117049458.jpg“어머니! 피하세요! 당장!”

틀라는 울면서 외쳤으나 구두 굽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기르골이 시끄럽다는 듯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틀라는 더 외치려 했으나, 차가운 손이 그의 입을 조금의 틈도 없이 막아버리자 이상한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괴로운 소리를 뚫고 기르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117049458.jpg“라트라실 황제가 누구지?”

16551117049458.jpg“지금 타리움의 황제. 네가 안고 있는 아이의…… 이복동생. 내 아들의 왕좌를 훔쳐 간 년.”

16551117049458.jpg“아.”

아낙차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침착했다. 기르골을 앞두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와 달랐다. 틀라는 울면서 ‘어머니 어머니’ 속으로 불렀으나, 기르골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16551117049458.jpg“왕좌니 뭐니 하는 건 상관없다, 인간. 내게 중요한 건 왜 로드가 라트라실 황제라 주장하는지야. 이 식시귀와 너는 왜 말이 다를까?”

16551117049458.jpg“생일.”

16551117049458.jpg“생일?”

16551117049458.jpg“이 애와 라트라실의 생일이 같아.”

기르골의 표정이 구겨졌다.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본 아낙차는 심장이 섬뜩해 왔다. 사실 그녀도 라틸이 로드인지 아닌지 따위 몰랐다. 잠깐 생일이 같단 점을 의심했을 뿐.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저 하얀 머리 뱀파이어를 설득해야 했다. 무슨 거짓말을 더 해서라도. 저 뱀파이어를 설득한다면 아들을 구할 수 있다. 게다가 저 괴물 같은 걸 라트라실 그년에게 보내 죽일 수도 있다. 파란 호수 같은 눈동자 안쪽에서 어두운 증오와 애달픈 애정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16551117049458.jpg“이게 가장 중요하지. 여우 가면이 내 아들을 이용하려 로드 행세를 시킨 거라 해도, 뭔가 로드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으니 시켰을 거잖느냐.”

16551117049458.jpg“…….”

16551117049458.jpg“생일도 같고. 나고 자란 곳도 같으니 저 애를 고른 게 분명해. 헷갈리게 하기 쉬우니까. 또…….”

그래도 기르골의 표정이 그리 탐탁지 않자 아낙차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다행히 라트라실에 대한 모든 건 그녀에게 증오스러웠기에, 쓸만한 정보 하나가 더 떠올랐다.

16551117049458.jpg“선대 황제. 내 남편이 라트라실을 뒷조사한 적이 있다. 내 아들이 아니라, 그년을 조사했어. 이유가 뭘까? 수상한 점이 있으니 그런 거지. 안 그래?”

기르골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틀라가 로드가 아니란 말을 한 후로 가장 큰 반응을 보였다. 틀라의 머리를 안고서 몸을 일으킨 것이다. 아낙차는 아슬아슬하게 기르골이 던진 아들의 머리를 받아 안았다.

16551117049458.jpg“네가 쓸모가 있다고? 난 대가리가 쏙쏙 빠지는 놈들은 별로야.”

16551117049458.jpg“그건-!”

16551117049458.jpg“엉뚱한 놈을 로드라 주장한 걸 봐선 별로 쓸모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빙그레 웃은 기르골은 아낙차와 틀라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손가락 끝으로 틀라의 머리를 콕 찍었다.

16551117049458.jpg“하지만 네 어머니는 그나마 쓸모 있어 보이는군. 날 찾아와라. 그 정돈 하겠지.”

말을 마친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16551117049458.jpg“어, 어머니. 어머니.”

아낙차는 아들의 머리를 꽉 안고서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다가, 틀라가 부르자 황급히 아들의 몸을 찾아 머리를 얹었다. 머리는 몸에 닿자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았다. 틀라는 제 손을 한 번 움직여 보더니, 아낙차를 황급히 안아들었다.

16551117049458.jpg“어머니. 여기서 일단 나가야겠습니다. 어머니 말처럼 라트라실이 로드라면…… 우리가 대적자 편에 서서 황위를 되찾을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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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1117049458.jpg“너. 폐하의 마음은 제대로 얻고 있는 게 맞아?”

잠시 하렘을 나가 아버지의 상단에 들른 타시르는 인사를 생략한 아버지가 잔소리부터 퍼붓자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16551117163223.png“이 아버지, 진짜 급하시네. 사람 마음이 그리 빠르게 움직이나요?”

그 태연한 태도에 상단주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16551117049458.jpg“폐하께서 그 용병왕이란 자를 제일 자주 찾아가신다며. 신분에 밀린 것도 아니고. 너랑 제일 처지가 비슷한 게 그자인데. 네가 뭐가 부족해서 밀리는 거야? 얼굴? 네가 더 잘났다! 눈 밑이 좀 퀭하긴 하지만…… 그건 용병왕도 마찬가지 아니냐!”

타시르는 칼라인과 싸우고 온 뒤 그를 찾아와 ‘너는 가벼워서 좋다’고 말했던 황제를 떠올리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상단주는 ‘어유 어유’ 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두드리다가, 미리 챙겨두었던 커다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16551117163223.png“뭡니까?”

16551117049458.jpg“곧 폐하의 생일이지 않으냐. 폐하께 드리는 선물이다. 연회를 안 하신다니 네가 전해드려라.”

16551117163223.png“뭔데요?”

16551117049458.jpg“뇌물이다!”

아버지의 깔끔한 대답에 타시르는 웃으면서 상자를 안고 돌아섰다. 그 태연한 모습을 본 상단주는 ‘쟤가 아니라 차남을 보냈어야 했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상인으로서는 타시르 쪽이 우세했으나, 차남의 이미지가 용병왕과 가장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덩치가 커다랗고 무뚝뚝한 모습.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타시르는 선물을 한쪽 팔에 끼고 거리를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던 중. 코너를 돌면서 누군가 그의 어깨에 퍽 부딪혔다. 살짝 부딪힌 것 치고는 어깨가 꽤 아파서, 타시르는 미간을 찡그리고 자신과 부딪힌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부딪힌 여자도 얼굴을 구기고 그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이 커다래져서 빠른 걸음으로 그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16551117163223.png“?”

하지만 그 표정이 단순히 길거리에서 부딪힌 사람을 보는 얼굴이 아닌지라, 타시르는 흥미를 느끼고 얼른 그 사람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 * *

16551117163262.png‘아니, 도미스 만나서 가짠가 진짠가 따져야 하는데. 타시르 쟤는 왜 날 따라오는 거야? 사과하라고 쫓아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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