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네가 아니야2021.10.24.
일순간 라틸과 대신관이 동시에 숨을 멈췄다. 라틸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귀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귀걸이였던 것’을. 펜던트가 해안가의 하얀 모래처럼 가는 모래로 변하는 바람에, 이제 귀에 거는 바늘 부분만 남아 있었다. 라틸은 끽끽거리는 바이올린의 환청을 들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대신관이 방금 이걸 뭐라고 설명했더라?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면서 어지러웠으나 라틸의 입은 저절로 변명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거 너무 약한데.”
그 목소리는 다행히 밝았으나, 지나칠 정도로 밝았다. 아까 라틸이 내내 건조하게 대답한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목소리. 라틸은 자책했으나, 내내 조용히 있던 대신관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소리 내어 웃었다.
“거봐요. 엉터리라니까요.”
혹시 일부러 내 편을 들어주는 건가. 라틸은 손바닥을 내리지도 못하고 가루를 털지도 못하고서 대신관을 살폈다. 이럴 땐 상대의 마음을 듣고 싶은데. 이 제멋대로인 능력은 꽉 막힌 서넛의 속마음을 들려주는 데 진이 다 빠지기라도 한 건지, 지금은 나와 주지 않았다. 대신관은 라틸의 손바닥 위, 가루가 된 돌을 빤히 보다가 시선을 느끼자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동자가 따뜻하게 웃음기를 머금었다.
“검게 변하지 않았잖습니까. 전설에 따르면 검게 변하면서 부서진다 했는데요.”
라틸이 긴장한 걸 알고 좋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해서 라틸은 조금 안심했다. 맞아. 검게 변하면서 부서진다며. 그러나 라틸의 손바닥 위의 가루는 약간 노란 빛을 띤 입자가 가는 모래처럼 보였다. 검게 변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그치? 이거 그냥 약한 거지?”
라틸은 안도해서 되묻고는 긴장한 게 머쓱하단 것처럼 일부러 마구 웃어댔다.
“와.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대신관도 같이 껄껄 웃어댔다.
“저도 순간 놀라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손바닥에 놓인 가루를 툭툭 아래로 털어버렸다. 가루가 발치로 떨어지자, 라틸은 귀걸이 바늘 부분만 대신관에게 도로 건넸다.
“이건? 가져갈래?”
대신관이 바늘을 받아드는 순간, 라틸은 그의 반대쪽 귀를 보았다. 저것도 ‘사악한 존재’가 닿으면 검게 변하면서 부서진단 돌이겠지? 이 사실을 생각하자마자 라틸은 얼른 돌아섰다.
“그럼 난 이만 가보마. 급한 일이 있어서.”
혹시라도 대신관이 다른 쪽 귀걸이를 건네면서 ‘다시 시험해보면 되지요’라고 말할까 봐 겁이 났다. 물론 라틸 자신은 사악한 존재가 아니니, 그 귀걸이를 쥐어도 이번엔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아까도 부서지긴 했지만 검게 변하진 않았고. 하지만 또 부서진다면 어쩌지? 레안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해 라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야. 검게 변하지 않았잖아. 진짜 쓸모있는 물건이면 대신관이 미리 내밀었겠지. 그냥 우연이야.’
그런데 왜 대신관에게 다른 쪽 귀걸이도 내밀어 보라고 말하지 않았어? 심장 깊은 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 * *
“대신관님? 왜 그러십니까? 폐하와 대화가 잘되지 않았나요?”
황제가 가버리자 백화가 다가오면서 대신관을 불렀다. 대신관은 담벼락 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어?” 하고 몸을 돌렸다.
“두 분이 대화하시라고 일부러 근처에도 안 오고 있었는데요.”
백화는 대신관의 곁으로 오더니,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신관님과 폐하 사이가 좀 가까워졌나요?’라고 물어보는 눈빛이었다. 자신이 성기사란 걸 자각하기에 대놓고 말을 꺼내진 않았으나, 눈빛만은 노골적이었다.
“아아, 생일 선물로 뭘 가지고 싶으신지 물었는데.”
대신관이 뒷말을 흐리더니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면서 “맑군!” 하고 외치자, 백화는 말은 안 통하지만 사랑스러운 시베리안 허스키를 바라보듯 웃었다. 하지만 웃는 건 웃는 거고. 그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화제에서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전 두 분이 귀걸이 이야기를 한 줄 알았는데요.”
대신관은 맑은 하늘을 눈부시다는 듯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바라보다가, 백화의 말에 흠칫해 손을 내렸다.
“응? 귀걸이라니?”
백화는 손가락으로 자이신의 왼쪽 귀를 가리켰다.
“이쪽 귀걸이가 없으셔서요.”
대신관은 눈가에서 손을 떼고 자기 왼쪽 귀를 따라 건드려 보더니 “아, 떨어졌나?”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백화가 빙그레 웃고 있자, 그가 무언가를 보았단 걸 눈치채고서 얼른 말을 바꿨다.
“아아, 그래. 내가 폐하께 귀걸이를 보여드렸지. 이런 디자인으로 귀걸이를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이런 걸 물어봤거든.”
“그랬군요. 폐하께서 좋아하시던가요?”
“자랑하다가 실수로 밟아서 내가 으깨버렸어.”
밟아서 귀걸이를 으깼다는 대신관이 난데없이 자신의 탄탄한 팔 근육을 증거로 보여주자, 백화는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더는 대신관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적당히 말을 맞춰 주었다.
“그렇군요. 대신관님은 강하시니까요.”
“그렇지!”
가슴을 내밀며 흐뭇하게 대답한 대신관은 백화의 어깨 너머, 저만치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선 성기사들을 보더니, 조사를 도와주겠다면서 그쪽으로 얼른 걸어갔다. 백화는 바로 대신관을 따라가는 대신 잠시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기우뚱했다. 돌로 만든 귀걸이 같은데. 그걸 밟아서 으깼다고?
* * * 지하성 중앙에 있는 커다란 도서관 안. 아낙차는 커다란 책상 앞 돌로 된 의자에 앉아 책 세 권을 동시에 펼쳐 놓고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에 있는 건 흑마법에 관련된 책이고 오른쪽에 있는 건 고대어에 관한 책, 그리고 왼쪽에 있는 건 고대어를 익히는 책이었다. 아낙차는 모르는 부분에 희미하게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의 조합들을 억지로 머리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23페이지에서 완전히 막혀서 두 시간을 허비하게 되자, 그녀는 결국 책을 덮고 일어나 조리실로 걸어갔다. 며칠 후면 아들의 생일이었다. 이런 외진 곳에 있으니 틀라가 황자인 시절처럼 화려한 파티를 열어 주거나 귀한 선물을 주진 못하지만, 생일 케이크라도 제대로 먹게 해주고 싶었다. 아낙차는 커다란 솥 안에 여러 종류의 밀가루 반죽을 붓고, 설탕, 우유, 계란 등을 넣어 가면서 케이크 형태를 만들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요리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이것저것 넣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결국 아낙차는 조리 도구를 내려놓고 의자에 주저앉아 밀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무 서글펐다. 라틸 그것은 온 국민이 생일을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을 텐데. 귀한 틀라는 이런 어두컴컴한 지하성에서 케이크 하나 제대로 못 먹게 생기다니……. 생일이 같은데 하나는 온 국민의 축하를 받고 하나는 케이크도 못 먹는 처지가 어찌 이리 비교될까.
‘생일?’
그때. 그 ‘생일’이란 부분이 아낙차에게 꺼림칙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팔을 내렸다.
‘생일.’
이곳에 온 뒤 알게 된 정보 몇 가지가 있었다. ‘대적자는 로드와 생일이 같다’거나 ‘대적자가 태어나는 날짜는 예언으로 알 수 있다’ 같은. 물론 로드와 대적자의 끝없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보니, 이게 꼭 그대로는 아니라고 했다. 로드 쪽에서 예언 날짜를 바꿔치기했던 적도 있고, 일부러 생일 날짜를 속여서 대적자 측을 교란한 적도 있다고. 아낙차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변칙이 있다지만 원칙은 원칙이지.
‘틀라가 로드라고 하는데 라틸도 틀라와 생일이 같다……. 틀라가 로드라면 라틸의 생일이 같은 건 우연. 하지만 틀라가 자기 걱정처럼 진짜 로드가 아니라면?’
라트라실 그것이 로드일 가능성도 있나? 그녀가 몸을 기대고 있던 탁자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아낙차의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던 의심은 물벼락을 맞은 작은 모래처럼 뭉개졌다. 아낙차는 벌떡 일어서서 조리실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키가 아낙차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는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괴물이 빠르게 뛰어가면서 외쳤다.
“그놈이 또 왔어요! 그놈이 또 왔어요!”
“그놈?”
아낙차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으나, 괴물은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아낙차는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으나 벽에서 또다시 ‘쿵 쿵’ 하는 진동이 느껴지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하얀 머리!’
황급히 몸을 돌린 아낙차도 틀라를 찾아 뛰기 시작했다. * * *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다. 굳게 마음을 먹은 틀라는 여우 가면이 또 자신을 기절시켜 숨기기 전에 계속해서 이동했다.
“틀라 님!”
토끼 가면이 지나가다가 그를 불렀으나 틀라는 대답도 하지 않고 속도를 내어 망루로 올라갔다. 그러나 망루로 다 올라가기도 전에 그는 누군가에게 옆구리를 강하게 맞고 잠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돌무더기 사이를 구르고 있었다. 틀라는 땅을 짚고 상체를 들어올렸다. 박살이 난 성벽이 자연적으로 아치를 만들고, 그사이에 하얀 머리 기르골이 서 있었다. 먼발치서 보았을 때도 미쳤단 생각이 들었던 기르골은 코앞에서 보니 더욱 소름 돋았다. 흰자위와 동공이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새빨개진 눈동자를 한 기르골이 혀를 내밀더니 자기 입술을 날름 핥자, 틀라는 등골이 오싹해져서 앉은 채 뒤로 주춤주춤 기어갔다.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기르골이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나의 도미스. 드디어 우리가 다시 만났어!”
상체를 지탱한 팔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까지 떨림이 전해지자 틀라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무서웠다. 저 눈이 너무 무서웠다. 기르골이 휘파람을 불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자, 틀라는 본능적으로 눈가에 열기가 올라왔다.
‘이래선 안 된다.’
하지만 필사의 정신력을 쥐어짜 그는 자신을 다독였다. 상대는 지금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혼자 춤을 추며 오는 꼴을 보라지.
‘지금! 목!’
판단을 마치자마자 틀라는 다리에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을 주고 기르골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가 쥔 검이 기르골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리고 그 검이 목에 닿는 순간.
‘됐다!’
희열에 들뜬 틀라는 웃었고, 곧 무너졌다.
‘어?’
틀라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른 채 바닥을 굴렀다. 차갑고 따끔한 돌들이 양 뺨에 연달아 눌려왔다. 틀라는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 그는 강한 힘에 이끌려 허우적거렸다. 눈앞이 이동한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코앞에 기르골이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를 바로 앞에서 마주한 틀라의 눈이 공포로 커다래졌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검이 목에 닿았는데. 왜 그에게 잡혀 있지?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보다 먼저 기르골의 입술이 그의 목덜미에 다가왔다. 얼음 같은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틀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아…….”
기르골이 숨을 빨아들이는 게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단두대에 목이 잘릴 때의 그 감각이 떠올라 틀라의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눈에서 눈물이 주룩 한 방울 흘러내렸다.
“도미스으.”
충족감에 가득 찬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틀라는 또다시 돌무더기 사이를 구르는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고통은 없었으나 틀라는 고통보다 더한 공포에 젖어 입을 열었다. 저 앞. 기르골의 옆에 그의 몸이 있었다. 기르골은 틀라의 몸을 옆으로 휙 밀쳐 버리더니 느릿하게 다가와 틀라의 머리카락을 쥐고 들어올려 자신과 눈이 마주치게 했다. 바로 앞에 새빨간 눈동자를 들이민 채 기르골이 황당해하는 얼굴로 항의했다.
“넌 누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