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전생에서도 헷갈렸다2021.10.17.
하얀 머리 남자는 몹시 아름다웠으나, 아이니가 본 것 중 가장 소름 돋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도끼를 들고 나타난 레들러조차도 저렇진 않았다. 상대의 새빨간 눈동자를 본 아이니는 그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흰자위가 붉게 변하는 건 뱀파이어들이 흥분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멈춰.”
상대가 뱀파이어란 걸 깨닫자 아이니는 용기를 가지고 명령을 내렸다. 비록 지금은 뱀파이어 로드가 아니지만, 뱀파이어들은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500년 안에 새로이 생겨난 뱀파이어라면 모를까, 그 이상 살아온 뱀파이어라면 도미스의 얼굴을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일단 얼굴만 알아본다면 명령을 들을 것이다. ‘뱀파이어 로드’의 존재는 그만큼 뱀파이어들에게 절대적이었으니까. 기대한 대로 하얀 머리 남자는 잠시 고개를 기우뚱하는 것 같더니, 아이니의 말에 그대로 따랐다. 그가 순순히 명령을 듣자 처음 하얀 손과 새빨개진 눈동자를 연이어 보았을 때의 충격이 조금 가라앉아서, 아이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조심조심 뒷걸음질 쳤다. 그 방향의 끝에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온통 뱀파이어 용병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러나 아이니가 문에 닿기 직전.
“재미없네.”
잘 멈춰 있던 하얀 머리 남자가 갑자기 중얼거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 아이니의 코앞으로 달려들었다. 바로 앞에 들이 밀어진 새빨간 눈동자에 아이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비명을 지르자마자 이미 그녀는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붕 뜬 몸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누군가 단단한 팔로 그녀를 받아들었다. 아이니는 자신의 목이 반동으로 뒤로 밀려났는데 뒤통수에 느껴지는 충격이 없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들자마자 보인 건 칼라인이었다.
“칼라인!”
아이니는 반가워서 그를 불렀으나, 칼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니를 내려주자마자 하얀 머리 뱀파이어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얀 머리 뱀파이어는 씩 웃더니 어디선가 기다란 하얀 창을 꺼내 휘둘렀고, 칼라인은 허리춤의 검을 대각선으로 베어갔다.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매서운 쇳소리가 퍼져갔다. 하지만 대결은 오래가지 않았다, ‘깡 깡’ 거리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자, 하얀 머리 남자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문짝을 걷어차고 창밖으로 나간 탓이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아이니는 숨을 몰아쉬면서 뒤로 넘어간 의자를, 여기저기 조각난 이불을, 깨진 화병을, 방 한편에 선 칼라인을, 뒤로 넘어간 문짝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뒤로 넘어간 문짝 아래에 누군가 깔려 있는 걸 알아차린 그녀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넘어간 문을 조금이라도 들어 올리려 시도하며 묻자, 용병은 문짝 아래에서 빠져나오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소란스러워서 달려왔는데, 웬 문짝이.”
아무래도 용병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누가 왔다 갔어?”
용병은 질문을 하다가, 칼라인을 발견하고는 “어!”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장?”
아이니는 얼른 나서서 용병이 오해하지 않게 했다.
“문을 걷어찬 건 칼라인이 아니다. 다른 자가 나타나서 날 습격하려 했지. 그자의 짓이야. 칼라인은 날 구해준 거고.”
용병은 애초에 칼라인을 의심하지도 않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당연히 그러겠지. 단장은 항상 널 챙기잖아?”
용병의 말에 아이니는 흐뭇하게 웃으며 칼라인을 보았다. 맞았다. 그는 모든 기억 속에서 늘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 오늘 역시도 말은 ‘도미스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위험 하자마자 바로 달려와 구해주지 않았던가.
“나가봐라.”
칼라인이 지시하자 용병은 아이니에게 ‘잘해봐’ 하는 투로 웃어 보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아이니는 기대에 차 칼라인을 바라보았다. 구하러 왔다는 건 역시 그도 속으로는 자신을 도미스가 환생한 거라 인정하는 거겠지?
“구해줘서 고마워 칼라인. 지금은 내가 로드가 아닌데도 도와줄 줄 몰랐어. 넌 계속 날 부정했잖아.”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어설프지만 기억을 받은 것 같기에 알아볼 거라 여겼는데. 못 알아보나 보군.”
“무슨 소리야?”
“그 얼굴을 하고 있으면 계속 습격을 받을 거다. 그자에게서.”
아이니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난데없는 정보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그 뱀파이어가 누군데?”
“그게 네 얼굴이 아니라면 원래대로 돌아가라.”
“!”
“네 얼굴이라면 여길 떠나 몸을 숨기고. 이걸 얘기해주러 왔다.”
칼라인은 제 할 말만 다 하더니 그대로 떠나버렸다. 아이니는 문짝이 부서진 방 안에 혼자 남아 어수선해진 방을 둘러보았다. 칼라인이 자신을 거부한 것도 괴롭지만, 그가 하고 간 말도 의아했다. 그 뱀파이어. 칼라인이 말하는 걸 들으면 분명 도미스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는 것 같은데. 왜 도미스의 얼굴을 보고서도 노리는 거지? 칼라인은 왜 그자를 바로 쫓아가지 않은 거고? * * * 칼라인이 기르골을 쫓아가지 않은 건 여기서 쫓아 가봐야 어차피 또 지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상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기르골은 그보다 강했다. 각성한 로드 정도가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그가 해야 할 건 승산 없는 싸움에 한 번 더 도전하다가 로드를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게 아니라, 차라리 먼저 대적자를 죽여 로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동굴 안으로 들어간 칼라인은 굳이 필요 없는 모닥불을 만든 다음 타닥타닥 소리를 들으며 예언된 날짜에 태어난 아이들을 모았던 신전이 어디였던지 위치를 떠올렸다. 그러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주 옛날. 그때도 칼라인은 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옆에 기르골을 두고서. * * *
“춥지도 않은데 모닥불은 왜 피우는 거지?”
“자네도 내 나이쯤 되면 알 거야, 칼라인. 필요는 없어도 운치는 느끼고 싶을 때가 있어.”
“몇 살인데?”
“자네도 내 나이쯤 되면 알 거야. 안 세게 돼. 의미가 없어서.”
기르골은 능숙하게 소시지와 감자, 당근을 꼬챙이에 끼워서는 적당히 구워 칼라인에게 내밀었다.
“자. 자네에게 주는 내 마음.”
“참 얄팍하군.”
“없는 거보단 낫지. 안 그런가?”
칼라인은 꼬치를 받아 입에 넣고 씹었다.
“그 아가씨 진짜 웃기고 귀여웠는데. 안 그런가?”
기르골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몇 시간 전 헤어진 도미스란 여자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칼라인은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던 여자의 눈동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 화제를 피해버렸다.
“전혀.”
“쳐다보는 눈빛이 강아지 같았어.”
“따지자면 개 쪽이었지.”
“자네 정말 가차없구만.”
식사를 마친 둘은 곧장 동굴을 나와 칼라인이 처음 도미스를 구했던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숲을 얼마나 계속 걸어갔을까. 외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 세 명이 보였다. 둘은 부부로 보였고 하나는 아이였다. 부부는 슬픈 얼굴이었으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제 엄마의 머리카락을 잡고 놀고 있었다. 부부는 칼라인과 기르골을 보자 잠시 흠칫했지만, 외지인이란 걸 알아차리자 오히려 안도한 얼굴로 그곳을 바삐 지나갔다. 칼라인은 그들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길옆에 비켜서 있다가, 여자가 업고 있는 어린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러다가 부부가 완전히 그들을 지나가는 순간.
“이봐.”
칼라인이 갑자기 그들을 불렀다.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바삐 지나가다가 흠칫 놀라 돌아섰다. 얼마나 격하게 돌아서던지, 남자가 든 커다란 보따리에서 국자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 무슨 일이요?”
자신이 너무 놀랐던 게 자존심이 상하는지 남자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이 마을에 흑마법사가 있단 소식을 들었는데.”
남자의 날카로운 반응은 칼라인의 말을 듣자 더욱 격해졌다.
“그딴 거 없소! 있었는데 제 발로 이 마을을 떠났어! 가다가 뒤졌는지 알 게 뭐야!”
버럭 고함을 지른 남자는 한쪽 팔로 제 아내의 팔을 당겼다. 그들을 지나가기 전. 여자가 아주 이상한 눈으로 칼라인을 쳐다보았다. 칼라인 역시 그들을 계속 보고 있었다.
“우리도 그만 가지.”
기르골이 칼라인을 당겼지만, 칼라인은 그 세 식구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이봐.”
기르골이 재차 팔을 흔들자, 칼라인은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아이.”
“아이?”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전생에 자네 원수였나 보네. 가지.”
기르골이 재차 잡아당기자 칼라인은 마지못해 그 자리를 벗어나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빠른 걸음으로 10분 정도를 걸어가자 뜻밖에도 웬 오두막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주위에 다른 집이 없는 외딴 오두막.
“오호. 여기서 도망쳤나 보군.”
기르골은 중얼거리면서 반쯤 내려앉은 문짝과 바닥에 틀어박힌 도끼를 보더니, 힘으로 문을 쥐어뜯듯 열고 오두막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바리바리 짐을 다 싼 걸 보고 짐작은 했지만. 도망친 게 확실하네.”
아예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기르골은 집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서 탄식했다.
“그 부부가 흑마법사라는 소문이 도는 부부였나 봐. 그래서 예민하게 굴었을 거야.”
칼라인은 기르골을 따라 집 안에 들어오며 물었다.
“그들 중에 흑마법사가 있던 거 같나?”
“설마. 그 부랴부랴 떠나는 꼴이 기억 안 나? 흑마법사라면 그럴 리가 없지. 이번에도 허탕이네.”
아쉽다는 듯 투덜거린 기르골은 한 부분만 부자연스럽게 찢어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칼라인은 그러는 동안 거실에 있는 커다란 요람을 계속 쏘아보았다.
“왜 그래?”
기르골은 하품을 하면서 그 뒷모습을 구경하다가 물었다.
“아까부터 자네 계속 그 아이 신경 쓰더라?”
칼라인은 요람에서 목이 부러진 인형을 꺼내 들었다. 엉성한 바느질로 손수 만든 인형은 더럽고 꼬질꼬질했다.
“모르겠어. 자꾸 생각나는군. 좀 불쾌한 아이였다.”
칼라인은 ‘좀 불쾌했다’고 말하지만, 표정은 ‘어마어마하게 불쾌했다.’ 쪽에 가까워 보였다. 칼라인은 주저하다가 기르골에게 물었다.
“혹시 그 애가 로드일까? 자네는 로드를 봤을 때 어땠지?”
“불쾌하진 않았는데.”
“그럼 아닌가.”
같은 세대의 뱀파이어 나이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며 로드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칼라인은 자신이 나이트라는 걸 명백히 인지하면서도 아직 로드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나이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칼라인에겐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를 한없이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느껴지는 감정이 불쾌감이라니 좀 이상하긴 한데. 일단 자네가 누군가에게 반응한 건 이게 처음이니까. 한번 그쪽에 다시 가볼까?”
“아니라면-.”
“아닌 거지. 위치나 이름을 확인해 둬서 나쁠 건 없잖아? 가보자. 얼마 못 갔을 거네.”
기르골이 앞서가자 칼라인은 요람에 인형을 도로 내려놓고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이번에는 둘 다 속도를 내어서 보통 사람은 낼 수 없는 속도로 뛰어갔다. 그러다가 옆 마을까지 간 순간. 부부를 발견했는데, 웬 커다란 말 없는 짐마차가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게 보였다.
“어어! 저게 왜!”
마부가 잠시 옆에 내려선 사이 벌어진 일인 듯, 근처에서 마부로 보이는 사람이 펄쩍 뛰고 있었다. 마차가 코앞에 오자 부부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마차에 치이기 직전. 눈 깜짝할 사이 그들에게 간 칼라인이 그들 셋을 옆으로 밀쳐냈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마차는 그들이 비켜서자, 누군가 그들을 고의로 노렸던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마부가 허둥지둥 달려와 자기 마차를 살피는 사이. 부부는 칼라인에게 허리를 굽혀가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 부모가 인사하는 사이 아이는 까르르 웃으면서 칼라인을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안야, 안야도 인사해야지.”
아이 엄마가 아이를 토닥거리자, 아이는 칼라인을 보면서 활짝 웃더니 “냠.” 하는 소리를 냈다.
“안야도 고맙대요.”
“내 귀엔 ‘냠’으로 들렸는데.”
기르골이 웃으면서 끼어들자, 아이 엄마가 어색하게 웃었다. 부부는 몇 번이나 연거푸 인사를 한 뒤 엎어진 짐을 챙겨 다시 어딘가로 걸어갔다. 기르골은 여전히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칼라인을 쳐다보다가, “그럼 이렇게 하지.” 하고 말을 꺼냈다.
“저 어린애를 데리고 계속 저렇게 떠돌진 않을 거잖아? 숨어서 따라가다가 저 부부가 어디 정착하면 그 근처에서 살자. 자네가 저 아이에게 계속 신경 쓰는 걸 보면 저 애한테 뭐가 있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