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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만. (169/367)

169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만.2021.10.10.

홀로 식사를 끝낸 레안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안쪽에서 희미하게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레안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멈춰 있다가 천천히 손에 힘을 가했다.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바이올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레안은 문을 열어둔 채 안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혹시 라틸이 암살자를 보낸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건 암살자로는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청년이었다. 복장도 암살자가 입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새하얀 코트였다. 청년의 손에는 레안의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레안은 청년을 부르지 않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 청년의 손과 바이올린 활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호위를 자처한 감시병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 철저하게 통제된 사람들만 별궁을 오갈 수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레안은 별궁을 오가는 사람들조차도 아마 감시의 시선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청년이 별궁 입구도 아닌 그의 방 안에 들어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니. 이 문 바로 앞에만 해도 호위가 서 있는데 말이다. 레안은 경계심이 들어 뒤로 반보 물러났다. 그 순간. 바이올린 연주에 열중하던 하얀 머리 청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청년과 함께 바이올린 소리도 멈추자 레안도 얼결에 뒤로 물러서길 멈추었다. 하얀 머리 청년은 바이올린 활을 쥐었던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매가리 없는 태도로 레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안은 청년의 눈이 특이하게도 붉은색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레안은 호위들을 부를 뻔했으나 얼른 생각을 잡아 눌렀다. 대신 그는 상대가 흔적도 없이 방에 들어와 있던 걸 떠올리고서 침착하게 물었다.

16551115897848.jpg“누구지?”

질문을 던진 레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옆에 놓인 길쭉한 탁자에서 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따랐다.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기르골이었다. 폭파 전문 마법사가 레안 황자의 심복이란 걸 알고 들어온 기르골. 그러나 기르골은 레안이 침착한 척하건 말건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며, 누군가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주는 성품도 아니었다. 그는 친절해 보이게 웃었으나, 레안의 질문은 싹 무시하고 물었다.

16551115897848.jpg“자이오르란 폭파 전문 마법사. 네 심복이라던데. 어디 있어?”

비록 유폐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지만 감히 황자에게 할 만한 언사는 아니었다. 심지어 기르골은 질문을 던져 놓고서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다른 황족이라면 ‘무엄하다’고 화를 냈을 것이나, 이번에도 레안은 그러지 않았다. 레안은 눈치가 좋았다. 그는 몇 마디 말을 나눈 것만으로도 상대가 실력도 성격도 보통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고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16551115897848.jpg“자이오르라면 그리티에 있을 텐데.”

16551115897848.jpg“그리티.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있던가? 그래. 거기 같네.”

상대 역시 레안의 말을 의심하지도 않고 바로 받아들이며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레안의 바이올린까지 자기가 챙겨 들고서. 불법 침입에 이어 도둑놈 같은 심보였으나, 레안은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16551115897848.jpg“마지막엔 분명 거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군. 나는 이 안에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돌아가는 사정은 모르겠어. 다른 데 옮겼을지도.”

오히려 이렇게 덧붙인 레안은, 자신의 처지를 쓸쓸하게 말하면서 기르골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16551115897848.jpg“그런데 그쪽은 어떻게 들어왔지? 여기는 감시병들이 물샐 틈 없이 서 있어서 들어오기 어려울 텐데.”

16551115897848.jpg“쉽던데.”

16551115897848.jpg“혹시 비밀…… 통로 같은 게 있나?”

16551115897848.jpg“없을걸.”

기르골은 바이올린을 깽깽거리면서 창가로 걸어가더니 발로 창문을 열었다. 저기서 뛰어내릴 생각 같았다. 레안은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침입자가 순순히 돌아가길 기다리는 대신, 급하게 물었다.

16551115897848.jpg“비밀 통로 같은 게 있다면 알려다오. 내가 여기 있으면 세상을 구할 수가 없다.”

내내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하던 기르골은 그 말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16551115897848.jpg“세상을 구해? 네가 뭔데?”

아주 기분 나쁘게. 창틀에 다리를 걸쳐 놓는가 싶던 기르골이 조롱조로 묻는 말에도 레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16551115897848.jpg“전설 속에 나오는 대적자 같은 존재는 아니지.”

16551115897848.jpg“…….”

16551115897848.jpg“하지만 세상을 망칠 ‘로드’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레안의 표정은 진중했고 목소리는 단호해서, 우유부단한 사람이 듣는다면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르골은 이번에도 한마디로 레안의 시도를 뭉개버렸다.

16551115897848.jpg“나도 알아.”

웃으면서 자랑한 기르골이 창밖으로 휙 나가버리자, 레안은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 창틀에 손을 대고 머리를 내밀었다. 분명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저 아래에도 옆쪽으로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 * * 얼결에 타시르에게 휩쓸린 라틸은 그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다가,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변해가는 걸 보자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115926098.png“이제 제 방으로 갈까요, 폐하?”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타시르가 자연스럽게 또 붙어 왔지만, 라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16551115926102.png“아니. 칼라인하고 해야 할 말이 있어.”

라틸은 타시르가 분명히 붙잡을 거라 여겼으나 그는 정말로 눈치가 좋았다. 타시르는 라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는가 싶더니, 웃으면서 그러라고 했다.

16551115926098.png“전 폐하 편입니다.”

슬며시 덧붙이는 말로 보아, 칼라인과 싸울 거란 예상까지 한 듯했다. 라틸은 괜히 타시르의 팔을 툭 치고서 칼라인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서넛이 뱀파이어란 걸 알았으니, 이젠 칼라인의 정체도 알아내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서. 하지만 그 굳은 다짐은 커다랗게 뭉쳐 놓은 눈 덩어리나 다른 바가 없었다. 칼라인의 방으로 가까워질수록 점점 녹아내리더니,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질척이는 물로 녹아 있었다. 라틸이 초조하게 방문 앞에 서 있기만 하자 호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1115897848.jpg“폐하. 칼라인 님께 폐하께서 오셨다고 알릴까요?”

16551115926102.png“되었다.”

라틸은 심호흡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 두 개를 열고 안쪽의 침실로 들어가자, 칼라인이 못 보던 선인장에 물을 주는 게 보였다. 라틸은 문을 닫고서 주저하다가 안쪽에서 노크했다. 칼라인은 이미 라틸이 온 걸 알고 있던 것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커튼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양옆으로 묶여 있었으나 오늘은 창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바람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에는 칼라인이 펄럭거리는 커튼 뒤쪽에 서 있었는데. 라틸은 입술을 초조하게 짓씹다가 세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며 물었다.

16551115926102.png“몸은? 괜찮으냐?”

16551115957935.png“거의 다 나았습니다.”

칼라인은 덤덤하게 대답하고서 분무기를 선인장 옆 창틀에 내려놓았다. 거의 다 낫긴. 완전히 다 나았겠지. 라틸은 서넛의 손바닥에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다 낫던 장면을 떠올리며 속으로 빈정거렸으나 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다.

16551115926102.png“다행이네.”

칼라인은 라틸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한 자리에 서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창문 너머로 불그스름한 석양빛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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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햇볕도 햇볕인데. 서넛이 연무장에서 멀쩡히 활동하던 것처럼, 칼라인 역시 햇살이 목덜미에 닿는데도 멀쩡해 보였다. 뱀파이어가 햇빛에 약하단 개소리는 누가 했어? 라틸은 다시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엉터리’라고 이마에 써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잠시였다. 언제까지나 이따위 망상이나 하면서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칼라인은 내내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그 역시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거로 보아 무언가 각오를 한 눈치였다. 서넛이 영지로 떠나기 전에 언질이라도 준 걸까? 아니면 대신관의 치료를 거부한 일을 자기도 신경 쓰는 걸까? 어느 쪽이든 그 역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것처럼 보여서, 라틸은 심호흡을 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가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16551115926102.png“서넛이 뱀파이어래.”

16551115957935.png“…….”

16551115926102.png“뱀파이어한테 한 번 물렸대. 그래서 낮에도 다닐 수 있대.”

이런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기 정말로 이상했다. 뜬금없이 뱀파이어라니. 하긴. 쌀알 괴물이 하렘 호수에서 나오고 연회장에 도끼를 든 귀족 좀비가 나타나는 판에, 뱀파이어 정도면 양호한 편일지도 모르겠지만…….

16551115926102.png“너도 그래?”

라틸은 태연히 물어보려 했지만 튀어나온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너무 작아서 칼라인이 못 들었으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로. 다행히 칼라인은 제대로 들은 게 분명했다.

16551115957935.png“내가 누군지는 주인이 더 잘 알고 있는데.”

대답하는 걸 보면. 하지만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라틸은 ‘예’와 ‘아니오’로 대답을 듣고 싶었다.

16551115926102.png“돌려 말하지 마. 수수께끼 같은 말 좋아하지 않아.”

라틸은 다시 한번 더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까보다는 좀 더 뚜렷한 목소리였으나, 칼라인은 이번에도 라틸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16551115957935.png“내가 뱀파이어라면. 카리센에 함께 다녀온 우리 추억은 전부 사라지는 겁니까?”

대신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자신이 라틸을 도왔던 일을 잊어버린 거냐고, 돌려서 묻는 게 분명했다. 라틸은 어색하게 서서 바지 옆선을 주먹으로 몇 번 두드렸다. 잊어버렸냐고? 그럴 리가. 잊어버렸다면 직접 오는 게 아니라 당장 성기사들을 보내서 퇴치하라고 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도 검을 빼내 들고 왔겠지.

16551115926102.png“그렇지는 않아.”

라틸은 순순히 인정했다.

16551115957935.png“그러면-.”

16551115926102.png“하지만 모르지. 그날의 추억이 배부른 뱀파이어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16551115957935.png“나는 주인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주인이 다른 얼굴로 나타났을 때도. 늘 주인을 알아봤는데. 주인은 내가 변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날 의심하는군요.”

16551115926102.png“!”

16551115957935.png“주인은 날 믿지 못하나 봅니다.”

16551115926102.png“편안하게 상대를 믿을 수 있는 건 자기가 유리한 입장일 때지. 넌 네가 포식자이니 그렇게 말하는 거다. 내가 뱀파이어이고 네가 사람이라면, 나도 네가 뱀파이어든 사람이든 신경 쓰지 않았어.”

16551115957935.png“우습군요. 가장 강대한 권력을 쥔 폐하께서 자신을 포식자로 두지 않으시다니요.”

뭐라고 물어보지, 걱정하던 마음은 칼라인과 빠르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싹 사라졌다. 라틸과 칼라인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서 상대를 탓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칼라인은 스스로 뱀파이어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나, 둘 다 칼라인이 뱀파이어라는 전제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6551115926102.png“호랑이 주인이 굶주린 호랑이와 한 우리에 들어가면. 누가 포식자 같은데?”

그러다 라틸이 빈정거리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 라틸은 벽과 칼라인의 사이에 끼어 있게 되었다. 창가에 서 있던 그가 어느새 라틸의 바로 앞에 서 있던 것이다. 라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칼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 집요한 눈길을 피해 아주 약간 시선을 내리자, 목 끝까지 채워져 있는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뱀파이어도 침을 삼키는 건가. 단추로 꽁꽁 가린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라틸은 다시 시선을 올려 칼라인을 보았다.

16551115957935.png“그 우리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주인입니다.”

화를 내러 온 건데. 그와 너무 밀착해 있으니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라틸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듯 움켜쥐었다. 단단한 팔이 손안에 꽉 잡히자, 그가 움찔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16551115957935.png“사실 주인도 날 믿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무섭다면서도 여기 혼자 들어온 걸 텐데.”

칼라인이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자, 등이 찌릿하며 몸에 솜털이 다 일어섰다. 라틸은 손을 올려 그의 귀를 움켜잡고 노려보았다.

16551115926102.png“대체 뭘 원하는 거야?”

16551115957935.png“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당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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