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네가 꺼져주는 것이 내 소원2021.10.06.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도미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그중에서 혼자 다른 제복을 입고 있던 여자. 그 여자가 차고 있던 검이 이 검이었다. 잠깐 보았을 뿐인데 이 정도로 기억에 확실하게 남은 게 이상하지만, 분명하다. 라틸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검집을 쥐었다. 꿈에서 보았던 검을 실제로 쥐고 있어서인가.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좋은 기분? 통쾌한 기분? 허망한 기분? 한 가지 단어로 콕 집어 표현하긴 어렵지만, 무척 복잡한 심경이란 건 확실했다. 라틸은 검집을 손안에서 쓸어보다가 꽉 틀어쥐었다. 검이 손안에서 덜컥거리는 게 느껴졌다.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검을 뽑기 전. 라틸은 눈썹을 찌푸리고서 기르골 쪽을 확 쳐다보았다. 기르골은 눈을 빛내며 검을 쥔 라틸의 손을 빤히 보고 있었는데, 라틸이 자신을 쳐다보자 검에서 시선을 떼고 마주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라틸은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이 검을 가진 여자는 도미스와 칼라인의 적으로 보였는데.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검을 기르골이 자기 가보라 주장한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나. 도미스의 적이 기르골의 애인이나 아내여서 검을 사용했을 경우. 둘. 기르골이 남의 검을 가지고서 거짓말을 하는 경우. 라틸의 눈이 가느스름해지자 기르골이 실실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아가씨?”
라틸은 검에서 손을 떼고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혹시 기혼이야?”
“응?”
기르골은 잠시 눈썹을 치켜들더니 곧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서 그보다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라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너희 가보라는 이 검을 다른 여자가 사용하던데? 칼라인 꿈속에서’라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기르골의 연인이나 아내가 도미스를 죽인 거라면 기르골과 칼라인의 사이가 멀어진 게 이해가 갔다. 게다가 그런 거라면 칼라인과 기르골이 절대로 만나게 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칼라인한테 생일 선물로 원수를 줄 뻔했네.’
“사디 양?”
라틸이 검을 뽑지 않고 검집에 들어간 상태 그대로 도로 내밀자, 기르골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고작 이거 하나 뽑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돌려줘? 하는 얼굴이었다. 라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대답했다.
“먼저 날 기억해 내.”
“!”
“그러면 검을 뽑아볼게.”
라틸이 기르골의 무릎 위에 검집을 내려놓고 새 샌드위치를 집어 들자, 기르골은 원상태로 돌아온 검집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네.”
검을 뽑아보라며 달콤하게 달래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그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적반하장인 태도였으나, 라틸은 화를 내는 대신 새로 집은 샌드위치의 종이 포장을 벗긴 다음 기르골의 입에 그걸 물려주며 당부했다.
“꽃만 먹지 말고. 빵도 좀 먹고.”
기르골은 라틸이 물려준 그대로 빵을 우물우물 씹다가, 라틸이 손을 내리자 제 손으로 빵을 집어 내렸다. 라틸은 풀어두었던 짐을 챙겨 몸을 일으키고 바지에 묻은 풀잎들을 털어냈다. 그러고서 기르골을 보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묘한 투로 당부했다.
“내가 너무 기대하게 하지 마, 사디 양.”
“?”
“기대하다 실망하면 더 화나잖아.”
그 말속에는 거칠거칠하고 작은 가시가 가득했으나, 라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기대도 그대가 하는 거고 실망도 그대가 하는 거면 화풀이도 스스로 해.”
“……그럼 작별 키스는? 그것도 혼자 해?”
라틸은 손바닥에 입을 맞춘 다음 그를 향해 손을 한 번 휙 털어주고서 몸을 돌렸다. 기르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털레털레 멀어지는 뒷모습을 언덕 끄트머리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디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를 기우뚱했다.
“우리가 어디서 봤더라?”
대답해 줄 이는 없었으나 기르골은 그 후로도 혼자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채 3분도 되지 않아 몸을 일으킨 기르골은 그대로 곧장 가파른 언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버렸다.
“우선 로드 잡으러 가야지. 로드.”
빠른 속도로 낙하하면서도 신이 나서 중얼거리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 * *
“라나문 님.”
정원을 돌아다니며 곧 있을 라틸의 생일을 생각해보던 라나문은 그를 부르는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난 다른 쪽 산책로에서 타시르가 밝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타시르가 가볍게 걸을 때마다 커다란 귀걸이가 흔들리는 걸 보자, 라나문은 ‘쟤는 뭐가 좋아서 저리 즐거운 얼굴일까’ 싶어 눈썹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라나문 님께 가던 길이었는데 잘되었습니다.”
가까이 온 타시르는 라나문의 뒤에 선 시종에게도 눈인사를 건네고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라나문의 팔짱을 꼈다. 라나문이 대번에 팔을 싹 빼냈으나 타시르는 민망해하지도 않고서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으시네요. 전에 상담하신 그 편지 건 때문에 온 겁니다.”
“편지?”
“네. 저도 호기심이 가서 따로 알아봤거든요. 혹시 라나문 님 외 다른 사람들도 그런 편지를 받았나 조사했는데요. 일단 제가 알아보기론 없었습니다.”
“확실한가?”
라나문의 질문에 타시르는 참 멍청한 질문을 들은 것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확실할 리가요. 편지를 받고 입을 안 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런가.”
“하지만 모두가 라나문 님처럼 영웅이 되길 꺼리진 않을 테니, 편지를 받았다고 해도 아주 소수일 겁니다.”
“그렇군.”
“라나문 님은요? 따로 조사해 보셨습니까?”
타시르의 질문에 라나문은 앞으로 느리게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 편지들은 내게로 바로 도착하지 않아. 저택을 통해서 오고 있지.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내가 후궁이 된 걸 모르는 눈치다.”
다른 사람이 질문했더라면 알려주지 않았겠지만, 타시르는 상담을 해주고 비밀을 지킨 거로도 모자라 추가로 조사까지 해주었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진척 상황을 알려주는 게 예의일 거란 생각에서였다. 타시르는 라나문의 말에 감탄사를 뱉었다.
“세상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인가 보네요. 그런 점이 대적자를 길러내는 스승답긴 한데요.”
“일단 편지 심부름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만나보고 싶단 내 말을 전해 달라 지시는 해두었다.”
거기까지 말한 라나문은 말을 멈추고 정면을 보았다. 타시르 역시 엇비슷하게 정면을 보았다. 두 사람이 선 방향으로 정면에는 본궁에서 하렘으로 이어진 길이 나 있는데, 그쪽으로 마침 라틸이 걸어가고 있던 것이다. 라틸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근위기사단장이 보이지 않았고, 라틸은 평소보다 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좋지 않은 데다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몹시 빨라서, 타시르와 라나문은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둘 다 라틸을 바로 부르거나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음?”
그러나 시선을 느낀 라틸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서 둘 쪽을 돌아보았다. 라나문과 타시르는 얼른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인사를 하면서도, 라틸이 인사만 받고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갈 거라 생각했다. 저 길을 따라가면 칼라인의 처소가 나오니, 아마 그쪽에 갈 것 같다고. 그러나 둘을 발견한 라틸은 몸을 휙 돌리더니, 두 사람 쪽으로 친히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웬일로 둘이 같이 산책하느냐?”
다가오는 라틸은 아까의 화난 얼굴은 싹 거둔 상태였다. 평소 같은 미소가 입술에 걸려 있었고 목소리도 밝았다. 하지만 분명 라틸이 씩씩거리며 걸어가던 걸 보았던 터라, 라나문과 타시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를 보았다. 먼저 대답한 쪽은 타시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타시르는 자연스럽게 라틸의 말을 받더니, 곧장 라틸 옆으로 가 팔짱을 끼면서 친근하게 묻기까지 했다.
“왜 요즘은 안 찾아오시는 겁니까? 이 타시르가 폐하가 보고 싶어서 얼마나 쓸쓸했는지 아십니까? 네?”
커다란 남자가 팔에 딱 달라붙으면서 몸을 밀착해오자, 라틸은 얼결에 옆으로 밀려났다. 타시르는 그걸 핑계로 다른 팔을 뻗어서 라틸이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더니, 그 팔도 치우지 않고 라틸을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순식간에 라틸이 타시르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라나문의 시종 카르둔은 흥분해서 라나문에게 시선을 보냈다. 도련님도 해보세요. 저거요. 라나문은 카르둔의 강렬한 시선을 받았고, 자신의 시종이 뭘 요구하는지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타시르가 라틸을 제품에 넣고 온몸으로 방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까지 라틸의 팔짱을 끼긴 어려웠다. 타시르는 라나문의 시선이 매듭처럼 달라붙은 자신과 라틸의 팔 사이에 닿는 걸 눈치챘지만, 놓기는커녕 오히려 라틸 옆으로 더 달라붙으면서 물었다.
“폐하는 제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자주 떠올려 달라고 그림까지 선물했는데요.”
“난 네가 선물한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타시르.”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제가 지도는 몰라도 보물은 있다고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그렇군요. 그럼 이 빨개진 귀는, 제가 곁에 있는 게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걸까요?”
“흠흠.”
타시르가 라틸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자, 카르둔은 라나문에게 더욱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아,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당장 도련님도 붙으시라고요! 얼마나 답답하던지 라나문을 등을 뒤에서 떠밀고 싶을 정도였다. 황제 쪽으로. 그러면 넘어지는 척 옆으로 가기라도 하겠지. 카르둔이 진짜로 그래 볼까, 생각하는 사이. 내내 우두커니 서 있던 라나문이 드디어 행동을 취했다. 손을 뻗더니, 타시르의 품 안에서 라틸의 손 하나를 잡아낸 것이다. 아주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그 촉감을 느낀 라틸이 쳐다보자 라나문은 타시르와 달리 점잖게 말했다.
“저도 빨리 폐하게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은 점잖았지만, 그 안에 담긴 두 사람의 약속은 점잖긴커녕 아주 노골적이고 경망스러워서, 라틸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라틸이 거기에 더 반응하기 전.
“아아, 그랬지요. 라나문 님도 그날이 생일이셨지요?”
타시르가 먼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라틸을 뒤에서 제품 안에 폭 감싸고서, 악의라고는 한 톨도 없단 투로 물었다.
“저도 라나문 님께 선물을 드려야 할 텐데. 가지고 싶은 건 뭐 없으십니까?”
그 교묘한 끼어듬에, 라나문은 ‘네가 꺼지는 것’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런데도 이 대답을 참은 건 라틸이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대적자와 편지 건에 관해 상담을 했고 도움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라면 라나문은 라틸이 옆에 있더라도 ‘꺼져’라고 차갑게 말했을 것이다. 그가 차갑고 매정한 성격이란 건 어차피 모두가 아니까.
“필요 없다.”
하지만 차마 좋은 소리는 나가지 않아 차갑게 대꾸하자, 타시르가 라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면서 칭얼거렸다.
“폐하. 라나문 님은 이 타시르가 싫은가 봅니다. 폐하도 타시르가 싫으십니까?”
여우짓이지만 너무 노골적이다보니 오히려 라틸은 그게 웃겨서, 자신을 감싼 타시르의 팔을 자연스럽게 매만지며 토닥거렸다.
“폐하는 타시르가 좋단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노골적으로 여우 같으나 살며시 여우 같으나 얄밉게 여겨지긴 똑같아서, 라나문은 표정이 쌀쌀맞아졌다. 이 와중에 타시르의 시종이 라나문의 시종을 향해 ‘우리 소단주가 여우 같아서 저러신 걸 어쩌겠어’ 하고 미안한 척 웃자, 라나문의 시종은 덩달아 속이 끓어서 콧김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