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뽑아봐2021.10.03.
라틸은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 와중에, 지금 이 상황에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뱀파이어에게 한 번 물렸으니까 아직 너는 괜찮아? 아니, 한 번 물리는 거랑 아닌 거란 차이가 있긴 해? 물렸다면 대체 언제 물린 건데? 어린 시절에도 그는 라틸과 레안의 곁에 있었다. 그러면 쭉 이 상태로 계속 있던 건가? 그렇다면 정체를 숨긴 채 내내 곁에 있던 그를…… 믿어도 되는 게 맞긴 한가? 아니, 하지만 누가 친구나 친구 여동생에게 ‘나 뱀파이어한테 물렸어’라고 고백하겠는가. 말을 못 하는 게 맞긴 한데……. 아니, 그런데 지금 로드가 나타난 상황 아닌가. 로드가 나타나고 좀비가 나타나고 괴물이 하렘 안을 뛰어 다니고 있다. 라틸은 서넛의 손목을 꽉 붙잡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절 믿으셔야 합니다.]
서넛이 마음으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곁에 있어야 폐하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가 마음으로 내는 목소리는 슬픔에 가득 차 있었고, 몹시 애달팠고, 아주 위태롭게 들렸다.
[저는 폐하를 지키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정말로.]
눈물이 보이지 않아도 상대가 울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손에서 힘이 조금씩 조금씩 빠져갔다. 라틸은 서넛의 손목을 놓았다. 손목을 놓은 건 자신인데, 툭 힘없이 떨어진 손도 라틸의 손이었다.
“폐하.”
서넛이 라틸을 불렀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손으로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봐.”
“저는…….”
“앉아봐라.”
주저하던 서넛은 순순히 물러나 4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평소라면 의자를 곁으로 가져와 앉았겠지만 그는 이번에는 거리를 두고 앉아서, 자신이 아주 온순한 사자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듯한 그 눈동자를 보다가 라틸은 가까스로 물어보았다.
“너도…… 피를 마셔?”
“마시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라틸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물었다.
“뱀파이어들은 햇볕을 받으면 안 돼서 낮에는 못 돌아다닌다던데. 너는 어떻게?”
예전에 서넛이 대신관의 치료를 거부했을 때. 그때도 몹시 수상해 보이긴 했으나, 뱀파이어는 절대로 낮에 돌아다닐 수 없단 걸 알기에 넘어갔다. 하지만 서넛은 지금도 낮에 잘 돌아다니는데, 자신이 뱀파이어에게 물렸단 걸 인정했다. 서넛은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한 번밖에 안 물려서 그렇습니다.”
이번에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가 낮에 돌아다닐 수 있는 건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바와 달리 모든 뱀파이어가 햇볕에 취약한 건 아니었고, 그처럼 특별한 몇몇 뱀파이어는 햇볕을 쏘여도 다닐 수 있었다. 그 숫자가 아주 드물 뿐.
“이성을 잃기도 해?”
“사람들도 화나면 이성을 잃습니다, 폐하.”
“……그래. 그건 그렇지.”
라틸은 한숨을 내쉬고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그저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뒤늦게야 그게 깃털 펜이란 걸 알아차렸으나, 라틸은 펜을 내려놓는 대신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그 상태였어?”
“옛날부터요.”
“옛날. 평화로웠을 때부터?”
서넛이 고개를 끄덕였고 라틸은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옛날부터 저랬다면 좀비나 뱀파이어 로드의 부활, 이런 건 그와 상관없는 모양이니. 하긴. 좀비가 500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도미스의 기억에 따르면 산골이나 그 인근 마을에는 이미 좀비가 막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던가.
“폐하.”
라틸의 눈치를 보며 서넛이 재차 불러 보았다. 라틸이 생각처럼 당장 화를 내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 불안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라틸이 아낙차를 유폐시키기 전에도 그녀에게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는 건지도 몰랐다.
[폐하께서 그저 아프지 않길 바랍니다.]
이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서넛의 마음을 들으며 라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서넛.”
“예, 폐하.”
“일단…… 영지로 돌아가 있어라. 이 일은 함구하고.”
“폐하, 저는!”
“좀 생각을 해 보겠다.”
라틸은 감았던 눈을 뜨고서 심란한 눈으로 서넛을 쳐다보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다른 사람들에겐 병가로 처리해 두겠다.”
* * * 여러 가지로 마음이 번잡해진 라틸은 짬이 나자 다시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어느새 새로 생긴 취미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아이도미스한테 가볼까.’
라틸은 그녀를 찾아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을 할까 말까 생각했으나, 열정이 솟지 않아서 관두었다. 지금 칼라인도 서넛 같은 존재일지 아닐지 모르는 판에 도미스가 가짜인지 진짜인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서넛한테 칼라인에 대해서도 물어야 했는데. 라틸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게 참. 정말로 심란했다. 서넛도 칼라인도 모두 다 라틸의 아군들이 가짜 황제와 자신을 구별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힘이 되어 준 이들이었다. 칼라인은 모든 걸 다 버리고서 라틸과 같이 카리센에도 다녀왔다. 그토록 위험할 텐데도. 그런데 딱 그 두 사람이…….
‘괴물이 된다고 다 이성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도 몰라. 그래. 틀라도 괴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기 어머니는 잘 챙기잖아.’
게다가 서넛의 손 상처가 낫는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잠시 잊어버렸는데. 생각해보니 서넛이 사람이 아니라면 대신관의 부적을 못 파내는 거 아닌가? 그거 파낸 사람은 또 다른 사람 아닌가? 그런데 멍하니 걸어가고 있자니, 대로 부근에 키가 큰 하얀 머리 남자가 종이 뭉치를 끌어안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기르골이었다. 그를 보자 라틸은 한층 더 찝찝해졌다.
‘칼라인이 서넛 같은 케이스라면. 칼라인은 좀비 같은 걸 죽이고 다니다가 물려서 뱀파이어가 된 건가? 근데 기르골 저건 칼라인이랑 늘 붙어 다녔잖아. 혹시 기르골 저자도 뱀파이어는 아냐?’
이전에는 햇빛 아래에 있으면 무조건 뱀파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서넛 같은 케이스를 보고 나니 그런 믿음조차도 사라지고 말았다. 라틸은 괜스레 찝찝해져서 기르골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니면 칼라인이 뱀파이어가 되는 바람에 기르골과 사이가 멀어졌나? 기르골은 괴물을 사냥하는 사람이라?’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본 걸까. 라틸의 머릿속은 아직도 꿀렁거리고 있는데, 바삐 걸어가던 기르골이 갑자기 발길을 멈추더니 라틸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얼른 라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서 친하게 말을 걸었다.
“사디 양. 우리 지난번에 인사할 겨를도 없이 헤어졌지? 그거 때문에 노려보는 건가?”
밝은 목소리. 햇볕을 받아 금빛이 도는 하얗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생기가 도는 뺨과 입술. 뱀파이어 같진 않은데…….
“사디 양?”
라틸은 기르골을 너무 노골적으로 훑지 않기 위해 그의 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노려본 건 아닌데. 지나가기에 그냥 본 거지.”
적당히 둘러대고서 라틸은 그가 품에 안은 종이 뭉치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건 뭐지?”
기르골은 라틸이 가리킨 종이 뭉치를 굳이 한 번 내려다보더니 히죽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뭐 찾아볼 게 있어서 조사 중이었지.”
“그게 뭔데? 찾았나?”
“찾았지.”
기르골이 안고 있는 건 건 불법 경매장에서 있었던 마차 폭발 사건의 수사 일지였다. 건성으로 매듭지어졌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추었을 테니 그거라도 보기 위해 구한 자료. 수사 일지에 쓰인 바로, 마차를 폭발시킨 범인이 꽤 장거리에서 공격을 했기에 다들 폭발 전문 마법사가 연루된 일이라 여겨 그 방향으로 수사를 한 듯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날 당시 가장 가까이 있던 폭발 전문 마법사가 ‘자이오르’란 자인데,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던 것뿐. 거리상으로는 절대로 공격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자이오르는 혐의를 벗었다는 게 이 수사 일지의 간략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기르골은 이 정도 정보면 충분했다. 그가 원하는 건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게 아니라, 폭발 전문 마법사를 찾는 거니까. 그 마법사는 레안 황자의 심복이라 했지. 레안 황자란 자도 이 근처에 머문다고 하니, 그자를 찾아가면 폭발 전문 마법사의 위치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르골이 그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혼자 입을 히죽 벌리고 웃자, 라틸은 도미스가 왜 기르골이 아니라 칼라인을 좋아한 건지 알겠단 생각을 했다. 얼굴은 정말 천사같이 아름다운데…… 하는 행동이……. 어쨌든 저 종이 뭉치나 조사에 대해선 말할 마음이 없는 듯해서,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을 저었다.
“그래. 알았다. 하던 조사 마저 해. 잘 가.”
손을 저은 라틸은 몸을 돌렸다. 딱히 가려는 곳은 없었다. 그저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고 싶을 뿐. 그때.
“사디 양.”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기르골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라틸과 발걸음을 맞춰 걸으면서 친근하게 물렀다. 라틸이 쳐다보자 그가 라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내 고백은 어떻게? 생각해보았어?”
“내가 누군지부터 기억해 내라니까.”
라틸이 툭 먼지를 털듯 그의 팔을 치자, 기르골은 팔을 순순히 내리긴 했으나 계속 라틸과 발걸음을 맞추어 따라 걸었다.
“조사할 거 있다며.”
그 모습이 퍽 한가해 보여서 라틸이 타박하자, 기르골은 그건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가진 않았다.
“알아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서.”
“그럼 그거 알아봐.”
라틸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고 돌아섰다. 하지만 라틸은 몇 걸음 가지 않아서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기르골이 이번에는 종이 뭉치를 든 채 라틸을 뒤에서 쫄랑쫄랑 쫓아오고 있었다.
“아깐 저쪽 방향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대?”
라틸이 손가락으로 기르골이 걸어가던 방향을 알려주었으나, 기르골은 웃으면서 라틸의 옆으로 다가와 감탄만 했다.
“사디 양은 방향감각이 탁월하군.”
“……가던 길 가라고 알려준 건데.”
“친절하기까지. 난 사디 양에게 또 이렇게 반하는 걸까?”
“그대 심장은 가볍다 못해 훅 불면 날아가겠다.”
“날아가서 그대 심장에 앉으면 좋을 텐데.”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구나, 이 새끼. 라틸은 기르골이 무슨 말을 해도 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자, 더 보내기를 멈추고 그냥 따라오게 두었다.
“멋대로 해. 따라오던가.”
그렇게 얼마나 걸어 다녔을까. 따라오라 했더니 기르골은 정말 종일 라틸을 따라다녔다. 라틸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때도, 길거리에서 음유 시인의 노래를 들을 때도, 작은 극장에 들어갈 때도. 정말 한가해 보이는 모습이라 라틸은 기르골이 많이 심심했나 보다고, 스스로 납득했다. 그러다가 석양이 질 무렵. 그와 두 번째로 만났던 야트막한 언덕에서 라틸은 기르골과 샌드위치를 뜯어 먹게 되었다.
기가 막히긴 했으나 덕분에 심란한 마음은 좀 가라앉아서, 라틸은 ‘도미스가 그대에게 권하든? 내가 칼라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해 달라고?’라고 묻기를 관두었다. 칼라인이나 도미스 일 따위. 지금은 뒤로 미루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샌드위치를 다 먹고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 있을 때였다. 기르골이 “아차.” 하고 탄식하더니 갑자기 허리춤에서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 풀어 라틸에게 건넸다.
“뭐지?”
라틸이 물어보며 검을 받아들자, 기르골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그 검. 검집에서 한 번 뽑아 볼래, 사디 양?”
라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왜?”
“우리 가문 가보인데.”
“너희 집 가보를 왜 나한테 뽑아 달래?”
“난 못 뽑거든.”
“뭐?”
“그래서. 이 검을 뽑는 사람에게 청혼해야 해서.”
아니, 이 무슨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조건이 있나. 라틸은 황당해서 기르골을 보았으나 기르골은 당당한 얼굴이었다.
“거짓말이지?”
“어떤 거 같아?”
“거짓말 같아. 어쨌든 그런 거라면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 부탁해.”
라틸은 기르골의 헛소리를 믿지 않으면서도 일단 이렇게 돌려 거절하며 검을 도로 내밀었다. 그러다가 검의 문양을 확인한 라틸은 손을 흠칫하고서 도로 검을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자, 라틸은 머리띠를 다시 착용하고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문양을 보았다. 이 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왜 그래, 사디 양?”
그래. 확실하게 본 적이 있다. 자세히 본 건 아니다. 아주 얼핏, 정말로 얼핏 보았다. 그런데도 확신이 들었다. 그 얼핏 본 검이 이 검이 맞았다. 이 검. 칼라인의 기억 속에서 보았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도미스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그중에서 혼자 다른 제복을 입고 있던 여자. 그 여자가 차고 있던 검이 이 검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의 라틸에게 기르골이 옆에서 재차 재촉했다.
“뽑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