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저는 항상 폐하의 사람입니다2021.09.29.
서넛은 마른침을 삼켰다. 숨을 골랐으나 그 기색이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잠깐 당혹스러워 보였으나 겉으로 그는 몹시 침착해 보였다.
“좀…… 아픕니다.”
서넛의 대답에 라틸은 믿기 어렵다는 듯 재차 물었다.
“진짜 아파?”
성기사들은 영문을 몰라 뭐라 반응할 수도 없었다. 백화 역시도 얼떨떨해서 황제와 서넛 기사단장만 번갈아 살피기를 계속했다. 사이 좋은 두 군신이 이러고 있으니 영 이상했다.
“예. 아픕니다.”
“냄새는? 냄새는 어때?”
“피 냄새가 납니다.”
서넛이 재차 대답하자 라틸은 빙그레 웃고서 그의 손을 놓아주더니, 팔목을 잡아 그를 자신의 옆으로 데려갔다. 서넛이 순순히 따라와 옆에 서자, 라틸은 그의 팔목을 꽉 쥐고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당부했다.
“10분에 한 번씩 내게 상처를 보여라.”
“!”
* * * 그 시각. 잠시 난데없는 도미스 얼굴의 등장과 대적자일지도 모르는 여자 ‘사디’의 등장, 오랜 친구와의 재회 등으로 이래저래 바빠졌던 기르골은 다시 원래의 목적을 수행하려 하고 있었다. 폭파 전문 마법사를 찾는 것. 그는 우선 경찰부 관리라는 사람을 찾아갔다. 꼭 경찰부 관리를 만나려 했다기보다는 수사를 주도할 만한 인물을 만나려 한 건데, 마침 눈에 들어온 게 경찰부 수사관이었다. 술집에 들어가 취하지도 않을 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앉자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경찰부 관리 운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르골은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영리해 보이는 인상의 몇 명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경찰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개중 가장 많이 떠들어 대는 화제는 역시 수사 이야기. 개중 폭파 전문 사건이나 이전의 마차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으나, 기르골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못 보던 화려한 미남이 나타나 말을 걸자 수사관들은 바로 기르골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경찰부?”
기르골은 대답 대신 그들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수사관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런데요?”
“다행이다. 제대로 찾아왔네.”
“?”
수사관들이 의아해서 쳐다보자, 기르골은 손을 옆으로 뻗었다. 뭘 하나 싶어서 수사관들은 그 손을 같이 쳐다보았다. 기르골은 방긋 웃고서 음식을 들고 지나가던 사람을 옆에서 툭 밀쳤다.
“으악!”
지나가던 사람은 깜짝 놀라 다른 사람의 테이블로 나동그라졌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접시는 다 엎어졌고 안에 담긴 음식물은 엉망이 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이런 미친놈이? 야! 너 뭐야!”
멀쩡한 바닥에서 민 거라 크게 다칠 일은 없었으나 보통 사람이 할 만한 짓거리는 아니었다. 넘어진 사람은 화가 나 외쳤고, 수사관들과 다른 주위 사람들도 ‘이건 미친놈인가?’ 싶어서 기르골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 속에서 기르골은 생긋 웃더니 손을 거두며 물었다.
“잡아가 줄 건가요?”
“!”
* * * 문이 열리더니 하얀 머리의 대단한 미남자가 들어왔다. 손을 밧줄로 묶은 걸 보면 잡혀 온 사람 같은데. 뭐가 그리 좋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누구야?”
그 뒤를 비번인 수사관들이 똥 씹어 먹은 얼굴로 따라 들어오자, 근무 중이던 수사관이 눈짓으로 기르골을 힐긋거리며 물었다. 제일 뒤쪽에서 들어오던 수사관이 입 모양으로 ‘미친 새끼요’라고 알려주었다. 근무 중이던 수사관은 오히려 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져서, 멀쩡해 보이는 기르골과 표정이 구겨진 수사관들을 연신 번갈아 보았다. 그 사이. 기르골을 붙잡아 경찰부로 데려온 수사관은 한숨을 내쉬고서 그의 손에 맨 밧줄을 끌러주며 당부했다.
“자, 저쪽에 앉아서 이름이랑 사는 곳, 출신지, 신분패 번호 적어두고 가요. 그리고 경찰부 안 구경하고 싶다고 또 그딴 짓은 하지 말고.”
수사관이 밧줄을 끌러주는 동안 기르골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순순히 서 있었다. 마침내 밧줄이 다 풀어지자, 수사관은 다시 한번 더 “진짜 그런 장난은 하지 마요.”라 말하고서 훈방할 사람의 신상을 적는 종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기르골은 하하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럴게요. 내가 여기에 꼭 들어와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럼 그냥 방문하든가…….”
기도 차지 않아서 수사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뒷말은 이을 수 없었다. 내내 웃고 있던 기르골이 눈을 빤히 맞추더니 갑자기 눈빛을 확 바꾸는데, 그 분위기 변화가 너무나 무서워서. 갑자기 서늘해진 얼굴로 눈빛조차 피하지 못하게 시선을 제압하는데, 정말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수사관의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왜 그래?”
더욱 놀라운 건 눈을 마주치지 않은 다른 수사관들은 다들 멀쩡해 보인단 점이었다. 기르골의 이 변화를 눈치챈 건 눈이 마주친 수사관 하나뿐인 듯했다. 아니, 분명했다. 그 상태 그대로 기르골이 눈짓했다. 저기서 우리 둘이 얘기 좀 할까요, 라고. 수사관은 고개를 저었다. 기르골이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는 틈에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했다. 저자. 그냥 또라이가 아니란 걸 알리고 좀 더 조사하자 말해야 했다. 하지만 아까 얼핏 마주한 그 잠깐의 공포에 눌려 수사관은 저도 모르게 기르골을 따라가고 말았다. 인적 드문 곳까지 걸어온 기르골은 그제야 멈추어 서더니 수사관 쪽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불법 경매장에 있었다던 마차 폭발 사건. 수사 일지. 어디 있어?”
“그, 그걸 왜…….”
“필요해서.”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덤덤하게 대꾸한 기르골이 친절하게 명령했다.
“가져와.”
* * * 라틸은 10분에 한 번씩 서넛에게 손바닥을 펼치게 했다. 가끔은 5분에 한 번씩 펼치게 하기도 하고, 접었다가 도로 펼치게도 시켰다. 시종장은 라틸이 대체 뭔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이었으나, 라틸은 나름대로 진지한 절차 중이었다. 서넛과 칼라인은 대신관의 치료를 거부하고, 둘 다 상처가 아주 빠르게 나았다. 서넛은 제대로 못 보았으나 칼라인은 정말로 빠르게 나았다. 이 와중에 호숫가에 묻어둔 부적은 누군가 전부 파내버렸고, 괴물이 나타났다가 그 안으로 달아났다. 하렘 내부는 갑작스러운 괴물의 출현으로 공포에 싸여 있었다. 대신관이 있는데도 괴물들이 하렘 내부에 들어온 것도 이상했지만, 우선 확실한 건 궁 안의 사람 중에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이가 있단 거였다. 어둠과 손잡은 이들은 감히 그 부적에 손도 대지 못한다고 하니까. 라틸이 서넛의 손바닥을 베어 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라틸은 이미 서넛에 한해 ‘혹시? 설마?’ 하면서도 넘어간 적이 있었다. 그가 자신이 쫓겨나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믿어주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확인을 꼭 해야 했다.
“괜찮네요.”
라틸이 손바닥을 다시 확인하고서 중얼거리자, 서넛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짓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넛 경을 믿고 싶어서입니다. 서넛 경은 확실하게 내 사람이길 바라니까.”
“저는 항상 폐하의 사람입니다.”
“나도 서넛 경이 사람이길 바랍니다.”
“!”
서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틸은 시선을 피하고 걸어가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처음 계획대로 하루 종일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여러 번 확인했다. 최소 열 번 이상. 그리고 서넛의 손 상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바가 없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확인을 해볼 때였다. 라틸은 시종장을 내보낸 뒤. 집무실 안에 서넛과 단둘이 있게 되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설명했다.
“서넛 경. 난 지금 대신관에게 갈 겁니다.”
“폐하.”
“경의 손바닥을 치료해 달라고 할 겁니다.”
“…….”
“곤란하다면 지금 말해요. 대신관 앞에서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성기사들까지 다 알게 될 테니.”
라틸의 제안에 서넛의 눈동자가 떨렸다. 라틸은 다시 시계를 돌아보고서 다시 서넛을 쳐다보았다. 라틸 자신도 서넛이 이상하단 걸 알게 되면 뭘 어떻게 할지, 사실 아직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서넛이 흑마법사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그러면 사람은 맞는 걸까? 서넛은 라틸의 적인 걸까? 호숫가의 부적을 파낸 건 서넛이 한 짓인가? 서넛이 사람이 아니라면 그건 어쩌지? 서넛은 라틸이 위험한 순간마다 지켜 준 이었다. 그런 서넛을 과연 내칠 수 있을까? 하지만 내치지 않으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는 이를 내치지 않으면 그건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꼭 내쳐야 하나? 쉬지 않고 반대되는 생각들이 당구대의 당구공처럼 여기저기 부딪쳐댔다. 서넛은 라틸이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눈동자가 떨리는 걸 알아차렸다. 또한 라틸이 이전처럼 화를 내는 정도로 이 일을 넘어가지 않으리란 것도 알아차렸다. 서넛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추가 왔다 갔다 이동했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그가 볼 때, 라틸은 아직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칼라인은 각성하지 않은 로드가 없었다지만, 그는 라틸이 각성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가능성도 아직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이야기해 버리면 라틸은 큰 충격을 받게 될 거다. 레안 황자의 염려가 맞는다는 데 놀랄 거고, 자존심이 상할 거고, 늘 자부심 넘치고 당당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흔들리고 말 거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로드로서 살아가려 하거나, 운명을 인정은 하되 거부할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사이에 커다란 충격이 오긴 할 터였다. 그렇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라틸이 진실을 알았을 때 그에게 실망할 것이다. 자신을 속인 데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서넛 경.”
서넛이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라틸이 재차 그를 불렀다. 서넛은 한참 동안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의심하시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폐하에게 해를 끼치고, 폐하에게 위협이 되고, 폐하를 위험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요.”
“사람은.”
“…….”
“사람인 건 맞고?”
서넛은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틸은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틸은 의자 손잡이를 꽉 쥐고서 서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죽을 뻔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뱀파이어가 절 구하느라 한 번 문 적이 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서넛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저는 늘 폐하의 서넛입니다.”
서넛은 라틸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라틸은 손잡이를 여전히 꽉 틀어쥐고 있었으나 그를 밀어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때리진 않았다. 그저 조용하고 무거운, 충격받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그 고요해 보이는 머릿속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서넛은 라틸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게 더 무서워서, 허리를 숙여 라틸과 시선을 맞추고 속삭였다.
“저는 폐하의 적이 아닙니다.”
라틸은 대답 대신 서넛의 손목을 움켜잡고 손바닥이 보이게 돌렸다. 라틸이 그어둔 손바닥의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어 이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