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기분이 어때? (165/367)

165화. 기분이 어때?2021.09.26.

라틸의 눈동자가 활짝 열린 창문과 칼라인을 번갈아 살폈다. 덩달아 사람들의 시선도 라틸을 따라 움직였다.

16551115054014.jpg“창문은 누가 열었답니까? 위험하게.”

궁의 한 명이 그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닫자, 라틸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확신했다.

1655111505402.jpg“…….”

라틸은 턱을 들고서 칼라인을 내려보다가 궁의들 쪽을 향해 물었다.

1655111505402.jpg“칼라인의 상처를 보았느냐.”

16551115054014.jpg“예. 피가 많이 나서 크게 다치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의를 벗으실 때 보니 다행히 상처가 크진 않습니다.”

1655111505402.jpg“그래.”

라틸은 덤덤하게 대답하고서 칼라인 쪽으로 다가갔다. 라틸이 머리맡으로 와 서자 칼라인은 붕대 끄트머리만 쥔 채 고개를 숙였다.

1655111505402.jpg“내가 해주마. 자이신 치료를 받기 싫다면.”

칼라인은 여전히 붕대를 쥐고 있었으나 라틸이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자, 어쩔 수 없는지 천천히 손을 빼 허벅지 위에 내려두었다. 라틸은 붕대를 칼라인이 돌리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꼼꼼하게 매 두었던 붕대가 한 겹 한 겹 풀려 갔다. 궁의들은 난감하고 곤란한 분위기에 자기들끼리 쳐다보면서 ‘나가야 해?’ ‘모르겠습니다’ 같은 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칼라인을 감쌌던 붕대의 마지막 부분까지 풀어 버리자, 피를 흡수한 붕대가 바로 아래로 툭 떨어지듯 흘러내렸다. 라틸이 붕대를 옆으로 치우자 눈치를 보던 궁의 한 명이 다가와 얼른 받아 들었다. 다른 궁의는 치료 약을 먹인 새 붕대를 가져와 라틸의 옆에 두고 물러섰다. 라틸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붕대를 한 손으로 집으며 칼라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았다. 초록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라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눈을 떼지 않은 채 라틸은 붕대를 들지 않은 손을 뻗어 칼라인의 상처 부근을 감으로 짚었다. 그제야 칼라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라틸은 시선을 내려서 그의 상처를 보았다. 창백한 조각 같은 피부 위로 유난히 붉은 상처 두 군데가 보였다. 딱 두 군데. 하얀 피부에 석류처럼 피어난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흘러나온 피는 그의 바짓단 아래로 조금씩 새어 들어갔고, 일부는 이불에 스며들어 갔다. 라틸은 그의 상처 부근을 손가락으로 그어 보았다. 칼라인의 배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가 움찔했다. 라틸은 엄지로 상처를 더듬을 듯 손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1655111505402.jpg“창 같은 데 찔렸다가 나아가는 상처 같네.”

본인의 주장처럼, 그리고 궁의의 말처럼 정말로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라틸이 손을 떼자 긴장이 한번에 풀린 건지 칼라인의 근육이 한 번 더 움찔했다. 라틸은 약 먹인 붕대를 두 손으로 펼치고서 그걸 칼라인의 가슴과 배 부근에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칼라인은 라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으나, 자이신이나 궁의를 거부하듯 단호하게 거절하진 않았다. 라틸은 자신이 처치한 엉성한 붕대를 내려다보다가 작업이 마무리되자 손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서려는 칼라인의 가슴을 눌러 제자리에 눕힌 라틸은 다시 한번 열려 있던 창문을, 그 아래 약간 눌린 자국이 난 카펫을 보다가 칼라인의 귀로 입술을 가져갔다.

1655111505402.jpg“네가 치료받기 싫을 때 괴물이 나타나 이목을 끌어주다니. 운이 좋았구나, 칼라인.”

16551115054068.jpg“!”

1655111505402.jpg“이 정도 상처라면 처음부터 중상이 아니니 치료받기 싫다고 말해도 됐을 텐데.”

16551115067989.jpg

  * * *

16551115067997.jpg“괜찮으십니까?”

16551115054068.jpg“네가 가져다준 피가 도움이 많이 됐다.”

16551115067997.jpg“다행입니다.”

16551115054068.jpg“창문을 안 닫고 가서. 폐하께서 이상하게 보셨지만.”

침대에 누운 칼라인이 눈으로 창문을 보았다. 창문은 또 열려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이 방 안쪽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서넛이 들어올 때 열면서 닫지 않은 탓이었다.

16551115067997.jpg“열어두어야 나갈 때 바로 나갈 수 있습니다.”

16551115054068.jpg“그렇겠지.”

16551115067997.jpg“아까도 급히 들어왔다 나가야 해서…….”

16551115054068.jpg“그래.”

칼라인은 건조한 목소리로 다 이해한다고 중얼거렸다. 전혀 이해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서넛은 신경 쓰지 않고 가져온 화분을 칼라인의 머리맡에 두고 일어섰다.

16551115054068.jpg“그건 또 뭐야.”

16551115067997.jpg“병상에 누워 있으면 심심하실까 봐.”

칼라인이 기도 안 찬단 표정으로 서넛이 가져온 선인장을 쳐다보자, 서넛은 화분에 붙은 푯말을 가리키며 선인장의 이름까지 가르쳐주었다.

16551115067997.jpg“이름은 웅심입니다.”

칼라인이 ‘장난해?’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서넛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6551115067997.jpg“저 때문에 폐하께 의심을 산 건 아닐 테니 염려 마시지요. 자이신의 치료를 거부했을 때부터 이미 의심하셨을 테니까요. 제가 그렇게 의심을 샀거든요.”

칼라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6551115054068.jpg“자랑이다.”

16551115067997.jpg“그보다 자이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곤란해질 텐데요.”

16551115054068.jpg“아직은 때가 아냐. 내가 부상 입을 경우는 드무니까. 오히려 폐하가 다치실 일이 더 많지. 각성 전까진 자이신이 폐하께 도움이 될 거다.”

말을 꺼내 보기는 했으나 같은 의견이기에 서넛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15067997.jpg“그렇지요.”

대화가 끝났다 싶은지 서넛은 꾸벅 인사를 올리고 자신이 열어두고 온 창문으로 걸어갔다. 라틸은 자이신 관련해 칼라인과 서넛에게 한 번씩 의구심을 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굳이 창문을 통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서넛이 막 창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16551115054068.jpg“서넛.”

서넛이 놓고 간 화분을 집고서 뾰족한 가시 끝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던 칼라인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 서넛은 창틀을 잡은 채 고개만 돌렸다. 칼라인이 심각한 얼굴로 화분을 끌어안고 있었다.

16551115067997.jpg“왜 그러십니까?”

16551115054068.jpg“내가 전에 말한 그 배신자. 기르골이 나타났다.”

16551115067997.jpg“그럼 부상을 입은 게-.”

더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 복도를 지나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넛은 창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거의 동시에 문 너머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115054014.jpg“칼라인 님. 궁의가 상처를 소독해주러 찾아왔습니다.”

16551115054068.jpg“쫓아내.”

  * * * 그 시각. 라틸은 호숫가 주변에 뒷짐을 지고 서서, 호수 주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러싼 성기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16551115054014.jpg“사람들 출입을 막기 위해 계속 교대로 서 있습니다.”

성기사단장 백화의 설명에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야트막한 비탈을 내려갔다. 축축한 흙이 값비싼 신발에 엉망으로 달라붙었으나 라틸은 신경 쓰지 않고 호수 바로 앞까지 내려갔다.

16551115054014.jpg“위험합니다, 폐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시종장이 놀라 불렀으나 라틸은 괜찮다고 손을 저은 다음, 그 손 방향을 돌려 이번에는 자신의 발치를 가리키며 백화에게 물었다.

1655111505402.jpg“이 주위로 전에 무슨 부적을 묻어뒀다 안 했나?”

16551115054014.jpg“예. 일정한 간격으로 대신관님의 부적을 묻어 두었습니다.”

1655111505402.jpg“한데 어떻게 괴물이 호수로 달아났지? 아니, 전에도 괴물이 호수에서 나왔다며.”

라틸은 자신의 손가락이 호수 바닥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대고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1655111505402.jpg“혹시 그건가? 여기 호수 밑에 통로라거나, 그런 게 있나?”

궁전 건축에는 관여한 바가 없기에 백화는 고개를 저었다.

16551115054014.jpg“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1655111505402.jpg“그래. 그대는 물론 모르겠지.”

라틸은 즉위한 후 보았던 황궁 지도를 떠올리며 자신의 머리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일단 지도상에는 비밀 통로 표시가 없었는데. 백화는 그런 황제의 눈치를 살피다가 덧붙였다.

16551115054014.jpg“왜 자꾸 괴물들이 호수로 다녀가는지도 조사해보겠습니다. 만약 통로 같은 게 있다면 차라리 잘된 겁니다. 막으면 되니까요.”

그때였다. 호수 주위에 선 성기사들과 별개로 따로 호수 주위를 검사하고 있던 성기사 몇몇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발견한 건가? 라틸이 개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자, 흙을 파던 성기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라틸과 백화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16551115054014.jpg“폐하. 단장님. 전에 호수 주위에 묻어 두었던 부적들이 사라졌습니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과 빠른 목소리. 이 상황에 많이 놀란 눈치였다. 라틸은 다른 쪽 성기사들을 보았다. 그들 역시도 부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성기사들도 이쪽으로 모여들어 같은 보고를 했다.

16551115054014.jpg“저쪽에도 부적이 없습니다.”

16551115054014.jpg“중요지라 하셨던 곳에도 부적이 사라졌습니다.”

16551115054014.jpg“누군가 흙을 팠다가 덮은 흔적이 있습니다. 분명 꺼내 갔을 겁니다.”

라틸은 그 급한 보고를 들으며 혀를 찼다. 어쩐지. 대신관의 부적을 여기저기 놔뒀는데 괴물이 어떻게 달아났나 했더니. 성기사단장 백화는 부하가 보고를 마치자마자 라틸의 눈치를 살폈다. 하렘 안에는 라틸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고 보호받아야 할 곳. 황제의 사생활이 오가는 은밀한 장소. 그런 곳에 괴물들이 나타나는 건 물론, 괴물은 접근할 수도 없는 부적이 사라졌다는 건…….

1655111505402.jpg“하렘 안에. 흑마법사들과 손잡은 누군가가 분명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던 서넛이 돌아왔다.

16551115067997.jpg“왜 거기까지 내려가 계십니까.”

라틸은 서넛의 손을 잡고 비탈에서 올라오며, 칼라인과 서넛이 치료를 거부한 일을 떠올렸다.

16551115067997.jpg“폐하?”

라틸이 맞잡은 손을 쳐다보자 서넛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16551115067997.jpg“왜 그러십니까?”

라틸은 대답 대신, 그의 손목을 잡고서 그의 손바닥을 좀 더 유심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16551115067997.jpg“폐하?”

그게 이상한지 서넛이 재차 물었지만, 라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내 서넛의 손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 황제가 마주 보고 서서 근위기사의 손바닥만 계속 내려다보자 성기사들이 수색을 하다 말고 이쪽을 연신 이상하게 힐긋거렸다. 그들은 성기사이기도 했지만, 후궁으로 들어와 있는 대신관의 측근들이기도 했기에 황제가 난데없이 다른 사내에게 보내는 관심이 탐탁지 않았다. 서넛은 라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돌처럼 굳어서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밖에서. 게다가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라틸이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라틸이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들어 서넛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서넛은 손바닥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16551115067997.jpg“!”

라틸이 단도를 꺼내는가 싶더니 그의 손바닥을 휙 그어버린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백화와 성기사들도 놀라서 입을 벌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물거리던 백화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폐하.”하고 라틸을 말려보았으나, 라틸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라틸은 여전히 서넛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바닥에까지 떨어지자, 라틸은 단도를 집어넣고 그의 손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손가락에 묻혔다. 그 피로 라틸이 서넛의 입술 부근에 호선을 그어주었다. 이 알 수 없는 작업이 끝나자 라틸은 그제야 걱정스럽다는 투로 서넛에게 물었다.

1655111505402.jpg“기분이 어때?”

1655111512750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