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아까와 달라졌는데2021.09.22.
서넛도 전에 이런 적이 있었다. 자이신의 치료를 거부했다. 별다른 이유도 대지 못하면서. 그런데 이번엔 칼라인이 이러고 있다. 라틸은 고개를 기울였다. 대신관의 치료가 궁의들의 치료보다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어떤 의료 도구도 사용하지 않으니까. 한데 왜…… 거부하는 걸까. 어디가 무서워서? 그 사이.
“저, 칼라인 님.”
라틸의 명령을 들은 자이신은 침대 머리맡 가까이로 가서 조심스럽게 칼라인을 불렀다.
“아픈 치료가 아닙니다. 그냥 제가 손만 올려두면 됩니다.”
자이신은 칼라인이 치료를 거부하는 게 어린아이 같은 이유일 거라 짐작하는 듯했다. 아니야, 자이신. 그거 아니야. 라틸은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자신도 칼라인이 저러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기에 말없이 상황을 살폈다.
“눈을 감고 셋만 쉬세요. ‘셋 둘 하나’ 하는 사이에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자이신이 자신만큼이나 근육질인 다 큰 사내에게 사탕을 흔드는 목소리를 내자, 궁의들이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여기저기로 피했다. 그러나 칼라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른 움직임도 없었고, 고집 역시도 변화가 없었다.
“저는 용병이라 미신을 잘 믿습니다, 폐하, 대신관에게 한번에 치료받는 건 꺼려집니다.”
칼라인이 이불을 단단하게 여며 쥐고서 뱉는 말에 라틸은 이를 갈았다.
“무슨 미신? 고통을 이겨낸 만큼 강해진단 미신? 설마 그런 헛소리를 뱉는 거냐? 죽을 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싶어?”
“상처가 깊다면 버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그럼 보여봐.”
라틸의 지시에 칼라인의 손가락이 이불 위에서 움찔했다. 라틸은 그 방향을 향해 허공에서 손을 휙 저었다. 치워, 라는 신호로. 하지만 칼라인은 망설이기만 할 뿐 상처를 보이지도 못했다. 더욱 수상하게 여겨진 라틸은 자이신에게 ‘치료해’라고 재차 눈으로 지시했다. 자이신은 상한 샌드위치 같은 표정으로 칼라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황명이니 치료를 하긴 해야 하는데. 칼라인이 낭떠러지에 얹어둔 칼날처럼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리저리 눈치가 보이는 듯했다. 아주 천천히 자이신의 손이 칼라인의 이불 위에 닿았고, 그는 손가락을 구부려 이불을 잡고 내리기 시작했다.
* * * 지하성 성문을 지나간 헤움 황자가 낯익기도 낯설기도 한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탕 탕’하고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자신의 발밑에서 나는 건지 벽을 따라 울리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뒤쪽에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누군가요.”
헤움은 고개를 돌렸다. 귀여운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그쪽을 보고 있었다.
“우리 황자님 아니십니까.”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호를 그렸다. 여우 가면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자, 헤움 황자는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에 가까스로 힘을 뺐다.
“여우님이군.”
“너무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여우 가면이 반가워하며 하는 말에 헤움 황자는 바빴다고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여우 가면은 헤움 황자의 팔을 잡고서 자연스럽게 어딘가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식사는 당연히 하고 가시겠지요?”
여우 가면이 헤움 황자를 안내한 곳은 그가 여기서 지낼 때도 몇 번 사용해보지 않은 식당 안이었다. 여우 가면이 의자를 빼내 주기에 거기에 엉거주춤 앉자, 따로 신호를 받지 않았는데도 앞치마를 두른 하얀 유령들이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둥둥 떠왔다. 매콤한 양념을 바르고 안에 과일과 야채를 넣어 구운 고기, 여러 종류의 각양각색 과일들, 국물이 있는 음식 등등. 하나같이 맛있는 냄새가 났고, 괴물들의 만찬에 나올 법한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움 황자는 인간이었던 시절에 이런 음식들을 늘 보며 살아왔던지라 익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여우 가면은 헤움 황자가 식사하는 동안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안부를 물어보며 말을 주도했다. 그러다 음식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헤움 황자는 조심스럽게 여우 가면에게 부탁했다.
“실은 부탁할 게 있어서 왔는데.”
“우리 황자님 부탁은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무엇인가요?”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네, 누구지요?”
여우 가면이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자신의 턱을 올린 채 헤움 황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누구든 찾아줄 수 있단 태도였다.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헤움 황자는 얼른 ‘카리센의 아이니 황후’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름을 뱉기 전. 그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문득 떠오른 불안감 때문이었다. 찾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찾고 나면? 여우 가면이 아이니를 찾았는데, 아이니가 정말 대적자라면? 여우 가면은 그보다 많은 걸 알고 있으니, 아이니가 대적자인 걸 알게 되면 바로 죽여버릴 것이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대적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대적자에 관한 평가는 늘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인물. 근원부터가 그들과 맞지 않는 인물. 절대로 함께 갈 수 없는 원수 등등. 그는 아이니를 사랑하기에 아이니가 대적자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황자님?”
헤움 황자가 입을 반쯤 연 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여우 가면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말이 사라졌는지.”
헤움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전에 나한테 대적자란 인물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지.”
“그렇지요.”
여우 가면이 순순히 과거의 일을 인정했다. 헤움 황자는 작은 나뭇가지로 과일, 야채 등을 묶은 음식을 집어 입안에 넣고서 자연스러운 척 우물우물 씹었다. 그러면서도 여우 가면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폈다. 혹시 이 갑작스러운 대적자 화제에 여우 가면이 눈치 좋게 굴진 않을까 싶어서. 다행히 여우 가면은 아직 표정 변화가 없었다. 가면 때문에 사실 반은 변화가 있어도 볼 수 없지만.
“대적자는 우리들의 적이니 미리 경고를 들어야 할 거 같았어.”
“갑자기 그게 생각나셨습니까?”
여우 가면은 그렇게 묻더니 “아.” 하고 알겠다는 듯 웃었다.
“카리센 연회장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다지요. 그때 황자님을 밀어붙인 여자가 대적자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시는 건지요?”
얼추 맞는 말이기도 해도 헤움 황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상한 기운으로 날 밀어냈다. 혹시 그 여자가 대적자일 확률은…….”
말을 마다가 헤움 황자는 또 멈칫했다. 말하다 보니 스스로도 더욱 의아해져서. 분명 헤움 황자는 그 ‘사디’란 여자와 아이니 모두에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다가 공작은 영웅이 둘일 필요는 없다며 한 명을 무시하자고 했지만, 그건 코앞에 놓인 현실적인 권력만 보았을 때 일이다. 진짜 영웅이 ‘사디’ 쪽이라면 헤움 황자도 세상도 사디란 여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헤움 황자는 분명 두 사람 모두에게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너무 이상했다.
“황자님?”
“확률이 없을까?”
“있겠지요. 식시귀인 황자님을 물리쳤다니까요.”
“…….”
“그 여자에 대한 정보를 주신다면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면 되겠지요.”
여우 가면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헤움 황자는 억지로 웃었다. 여우 가면은 그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걸 좀 더 가져오라 할까요?”
헤움 황자는 여우 가면의 말을 듣고서야, 자기가 내내 빈 수프 그릇을 숟가락으로 휘젓고 있던 걸 깨달았다. 표정은 애써 관리하고 있었으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손까지는 막을 수 없던 것이다.
“아니. 괜찮다.”
헤움 황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바로 사디에 대한 인상착의를 알려주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또 묻고 말았다.
“대적자가 혹시 여러 명일 수도 있나?”
* * * 자이신이 칼라인의 이불을 내리려는 순간. 칼라인의 손이 움찔하는데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높은 곳에서 거대한 것이 떨어져 바위와 부딪칠 때나 날 법한 소리였다.
“!”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벽 탓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라틸은 뒤에 서 있는 서넛에게 눈짓으로 ‘나가서 무슨 일인지 봐봐’ 하는 신호를 보냈다. 서넛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서 문으로 걸어갔다. 덜 닫힌 문 너머로 경비병 하나도 서넛을 따라가는 게 보였다. 라틸은 다시 자이신을 보고서 그에게 치료를 이으라 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 이번에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사람이 지르는 비명이 아니었다. 또다시 방 안에 모인 이들이 벽 쪽을 쳐다보았다. 라틸은 이번에는 나가서 확인하라 하는 대신 직접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시종들이 머무는 응접실을 지나 복도로 나가자 비명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이곳 복도는 벽이 없고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는 회랑 구조인지라, 비명의 근원지를 찾는 건 쉬웠다.
‘호수 쪽이다.’
예상대로였다. 호수 부근에 가자 사람들이 기겁해서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거대한 정체불명의 덩어리. 쌀 한 톨의 크기를 사람의 두 배 정도로 거대하게 키워둔 모양이었는데, 그 밍밍한 모양새와 달리 쩍 벌어진 입안 속 이빨들은 늪에 사는 물고기들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모양이 아주 흉악했다. 그 쌀알 모양의 괴물은 조경이란 조경을 죄다 걷어차고 뽑으며 돌아다니다가,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 같으면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틸은 검을 뽑았으나 한발 앞서 대신관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대신관을 지키기 위해 따라다니는 성기사까지 쫓아가자, 라틸은 검을 집어넣진 않으면서도 우선 사태를 지켜보았다.
칼라인이 좀비를 손쉽게 제압하는 걸 보았고, 본 적은 없지만 대신관이 호수에서 나타나 라나문을 공격하려던 괴물도 제압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 쌀알 모양의 괴물도 하나뿐이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대신관이 괴물의 곁으로 달려가 커다란 주먹을 내리치려는 순간.
“!”
내내 위협적으로 뛰어다니던 괴물이 갑자기 호숫가로 달려가더니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호수 안으로 따라 들어가 괴물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관이 라틸을 쳐다보자 라틸은 그만 돌아오라 손짓하고서 소란을 듣고 달려온 백화에게 지시했다.
“괴물이 저 안으로 들어갔다. 성기사들이 호수 근처를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서게 하라.”
“예, 폐하.”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에 젖어 호수 근처로도 오지 않았지만, 라틸은 상황이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이자 다시 칼라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괴물도 괴물이지만 칼라인의 부상도 얼른 치료해야 했기에.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칼라인이 스스로 붕대를 감고 있고, 궁의들은 곁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왜 혼자 저러는 거냐.”
그걸 본 라틸이 궁의들에게 묻자, 가장 직위가 높은 궁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좀 억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란 때문에 나갔다 들어와 보니 칼라인 님께서 붕대를 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대신관 님이 치료하라 명령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씀드렸더니…….”
“직접 한다?”
“예.”
칼라인은 라틸의 눈치를 보면서도 여전히 붕대를 돌돌 감고 있었다. 용병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능숙한 손길. 라틸은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아까와 방 안 생김새가 조금 달라진 걸 눈치챘다.
‘……저쪽 창이 열려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