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어떻게 알았어? 내가 여기 있는 거2021.09.19.
기르골이 나타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혼자서 밤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라틸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똑똑” 하는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높은 담벼락 위에 기르골이 우산을 쓰고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게다가 한 손에는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 있다. 아니, 왜 굳이 저기에 앉아있지?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라틸이 멍하니 보고 있자, 기르골은 담 위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해 다가왔다.
“자.”
게다가 다가오자마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다짜고짜 내밀었다. 라틸은 꽃다발을 받아드는 대신 그와 꽃 무더기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여기 있는 거.”
정말로 놀라웠다. 라틸 스스로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닌 건데, 여기서 만나다니. 물론 언덕에서 만난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나자 더욱 기묘하게 여겨졌다.
“알고 나온 건 아닌데. 계속 만나지네. 우린 진짜 운명인가?”
기르골이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하자 오히려 더 신기했다. 그 사이에도 기르골은 얼른 받으라는 듯 꽃다발을 라틸 쪽으로 한 번 더 흔들었으나, 라틸은 이번에도 꽃다발을 받지 않았다.
“다른 사람 주려던 꽃 아닌가? 나 만날 줄 모르고 나왔다며. 그걸 날 주면 어떡해.”
“아닌데. 내가 먹으려고 샀던 건데.”
“그럼 그대가 먹어. 날 주지 말고.”
꽃을 왜 자꾸 뜯어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 이거 염소인가.
“난 사디 양이 나한테 꽃다발을 줄 때 반했거든. 그래서. 내가 꽃다발을 주면 사디 양도 나한테 반할 거 같아서.”
기르골이 한 번 더 꽃다발을 흔들었다. 우산 끄트머리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그때마다 주륵 옆으로 흘러내렸다. 결국, 라틸은 손을 뻗어 꽃다발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난 꽃 안 먹는데.”
“맛있는데.”
“난 고기 좋아해. 초식 안 해.”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었으나 기르골은 라틸이 꽃다발을 순순히 받은 게 기쁜 듯 웃으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도 초식은 안 해.”
“잘하던데.”
“난 주로 마시는 걸 좋아하지.”
“마시는 거?”
음료수를 좋아한단 건가? 아니면 술? 라틸은 꽃다발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기르골은 묘한 미소를 띠고 라틸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더욱 짙게 웃었다. 비밀을 감춘 사람처럼. 그걸 보자 어쩐지 그에게 휘말리는 느낌이 들어서, 라틸은 꽃다발에서 얼굴을 떼고 중얼거렸다.
“그댄 내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야 그쪽을 본 적이 있어서 아는 척한 거지만. 그대는 아니잖아? 정말로 반해서 그리한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반해.”
기르골은 손을 뻗더니, 라틸에게 준 꽃다발에서 한 줄기를 뚝 꺾어 가져가며 대답했다.
“날 어디서 봤어? 말해봐. 얘기해주면 기억해낼게.”
“내 애인이 그대랑 바람이 났어.”
“아하. 미안해.”
순순히 사과하는 목소리에 라틸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봐. 얘기해도 기억 못 하잖아. 그런 적 없어.”
기르골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꽃을 입술 부근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그럴 거 같았어. 내 사랑 이야긴 매번 이별이어서. 뺏겨본 적만 있지 뺏어본 적이 없거든.”
라틸은 그가 또 꽃을 우적우적 먹을까 봐 빤히 그 입술을 쳐다보았으나, 기르골은 그러진 않았다. 그는 꽃잎 위에 한 번 입을 맞추더니 라틸의 시선이 자신의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웃기만 했다. 핏빛을 띤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자, 라틸은 그럴 의도가 아니긴 했으나 너무 기르골의 입술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단 걸 깨달았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자 머리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라틸은 그 웃음소리를 모른 척하며 중얼거렸다.
“자주 차이나 봐?”
‘도미스한테 차였나?’
“그러니까. 사디 양까지 날 차버리면 슬퍼져.”
단 한 번도 차인 적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기르골이 마침내 꽃잎을 한 잎 뜯어 먹으면서 웃었다. 빨간 입술 위에서 빨간 꽃잎이 뭉그러지는 모습은 어쩐지 위험하고 음험해 보였다. 라틸은 그의 입안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꽃잎을 쳐다보느라, 그가 도미스에게 자기 이야기를 듣고서 이러는 건지 아닌지 떠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그땐 기르골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라틸은 덩달아 그쪽을 보았다.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길거리에 까만 우산이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펼쳐진 채. 라틸이 지날 때는 저런 우산은 없었다. 하지만 주위에 우산을 놓고 간 사람은 없었다. 날아왔나…… 의심하기에는 바람이 거세지도 않았다. 라틸은 힐긋 기르골을 보았다. 우산을 유심히 보던 기르골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었다. 왜 웃지? 이상해하고 있자니, 기르골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다시 만나.”
작별 인사인지 혼잣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말을, 기르골은 “똑똑” 처음 인사하듯 던지고서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라틸은 우산을 제대로 고쳐 들었다. 그녀는 홀로 가로등 빛 아래에 서서, 까만 우산을 들어 올리는 기르골을 바라보았다. 뭘 하나 싶어 보고 있자니, 기르골은 우산을 접어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서 거기에 코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라틸은 고개를 기웃했으나 기르골은 이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라틸은 몸을 돌려 그 장소를 벗어났다. 그리고 라틸이 그 자리를 벗어나자, 우산 냄새만 맡던 기르골이 접었던 그 우산을 다시 펼치더니 우산 두 개를 다 자기가 쓰고 서서 어느 방향을 향해 활짝 웃었다.
“못 참고 그새 따라 나왔나?”
양손에 우산을 펼쳐 든 그 모습은 보기 우스꽝스러웠으나, 어두운 골목길 사이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칼라인은 웃지 않았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느릿하게 기르골의 근처로 걸어가며 칼라인은 말없이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칼라인이 보기엔 지금 기르골은 사디가 황제이고 황제가 로드인 건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쓸데없는 데는 호기심을 가지더라도 금세 시들어버리는 기르골이 사디와 오래 대화한 게 신경 쓰였다.
‘죽여야 한다. 지금.’
그 날선 모습을 바라보던 기르골은 뭔가 그리 웃긴 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하늘로 얼굴을 치켜들고서 미친 듯이 웃어대는 그 모습에서는, 칼라인에 대한 조금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웃어댔을까. 기르골이 낄낄거리던 웃음을 뚝 그치며 정색하더니, 다시 히죽 웃으며 물었다.
“애기야. 놀아 달라고?”
말을 마친 그가 눈 깜짝할 사이 두 손에 든 우산을 두어 번 휘두르자, 멀쩡하던 우산이 순식간에 기르골의 키만큼 길쭉한 장창으로 변했다. 칼라인은 대답 대신 그를 향해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뛰어들었다.
* * *
‘……잠이 안 와.’
라틸은 멍하니 이불을 끌어안은 채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옆으로 누웠다가 정면으로 누웠다가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밀기를 반복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려 애쓰면 애쓸수록 정신은 말똥해졌다. 꽃다발을 내밀던 기르골의 모습과 칼라인의 목소리가 번갈아 떠올랐다.
-그냥 황제지. 평범한 황제. 도미스를 잊을 도피처를 만들어 준 황제.
“도피처라.”
라틸은 작게 중얼거리다가 자기가 뱉은 말에 자기가 놀라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모두를 내보낸 방 안에는 속삭임을 들을 사람도 없었다.
‘하긴. 도피처가 어디야.’
게다가 관심 없단 것처럼 말하긴 했어도 싫어한단 것처럼 말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에 아주 적절한 거리 아닐까?
‘실망할 필요 없다. 후궁들 중 날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차피 없어. 내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면…… 게스타 정도일까.’
그래. 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들이 날 사랑하길 바라는 건 이기적인 거다. 그들의 의무는 라틸 앞에서 사랑하는 척하는 거지 진심을 다하는 건 아니었으니. 다행히 두어 시간 정도가 지나자 서서히 잠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라틸은 수마에 젖고 싶어 그 무의식에 힘껏 집중했다. 하지만 가물가물해지는 기억 너머에서 칼라인의 얼굴이 보일 것 같자, 라틸은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서 다시 눈을 떴다. 도미스의 기억을 꿈으로 꾸는 건 평소에도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독 더 그랬다. 지금 도미스를 바라보고 웃어주고 말을 거는 칼라인을 도미스의 눈으로 보게 된다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라틸은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달린 종을 흔들었다.
“예, 폐하.”
댕그랑 소리가 나자마자 바로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틸은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서 작게 지시했다.
“자이신을 데려오라.”
“예, 폐하.”
* * * 라틸은 침상에서 일어나 아주 얇은 가운을 걸친 다음 슬리퍼를 신고 방안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창가로 걸어가 문을 열자 까마득하게 높은 성벽이 내려다보였다. 정원에서 반짝이는 작은 조명은 까만 호수에 떠다니는 별처럼 보여서, 라틸은 허공에 손을 대고 괜히 빛을 휘저어 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도 자이신이 오지 않자 라틸은 시계를 보았다.
‘응?’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평소라면 자이신이 충분히 도착했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자나? 깨워서 오나? 설마 목욕하고 오는 건 아니겠지.’
라틸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직접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의 동시에 맞은편에 있는 응접실 문이 활짝 열리며 경비단장이 들어왔다. 무기를 호위병에게 맡긴 경비단장은 몇 발자국 들어와 황급히 보고했다.
“폐하. 칼라인 님께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자이신 님은 이곳으로 오시다가 칼라인 님 이야기를 듣고 급히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칼라인이 다쳤다고? 어디서?”
라틸이 놀라 묻자 경비단장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대답했다.
“하인이 정원에서 발견했답니다. 그땐 이미 부상을 심하게 입은 뒤였고요. 아직 누구에게 당하신 건지, 정확히 어디에서 다치신 건지는…….”
라틸은 경비단장을 지나쳐 황급히 복도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하렘에 도착해보니 이미 그곳 전체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웬만한 부상 정도로 이럴 리는 없으니, 경비단장의 말마따나 부상이 심한 게 틀림없었다. 라틸은 칼라인의 처소로 가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칼라인은 용병왕이었다. 권력이나 신분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무의 정점에 선 사람. 그런 칼라인을 대체 누가 공격할 수 있단 건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낮에 그와 대화를 나누던 인물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닐 거다. 그땐 칼라인이 다치지 않았어. 그때 다쳤다면 이미 말이 들어왔겠지.’
일단 칼라인부터 보자. 칼라인의 방 앞에 도착하자, 라틸은 우선 칼라인의 상태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건 그것이니까. 그런데 방 안으로 가보니 광경이 이상했다. 궁의들이 침상에서 몇 발자국을 두고 떨어져 있었고, 칼라인을 치료하기 위해 바로 달려갔다는 자이신 역시 곤란한 얼굴로 침대 근처에 있기만 했다.
“왜 치료를 않는 거냐?”
라틸은 칼라인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칼라인 님이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답은 자이신이 했다.
“치료? 거부?”
라틸은 기가 막혀 되물으며 칼라인을 보았다. 중상 입은 사람이 치료를 거부한다고? 실제로 의식이 있는 듯 칼라인은 침상에 누워 있긴 해도 눈은 뜨고 있었다. 라틸은 보자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그는 곧 휘청이며 다시 눕고 말았다.
“붕대를 감아두면 나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게 자이신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왔다. 그 꼴을 본 라틸은 불쑥 화가 치솟았다. 딱 봐도 가슴과 배 쪽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 저 꼴로 붕대를 감아두면 낫는다고? 분노한 라틸은 칼라인의 이마를 딱 때리고서 자이신에게 명령했다.
“치료 거부고 뭐고 당장 치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