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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거짓말쟁이란 건 알고 있었다 (162/367)

162화. 거짓말쟁이란 건 알고 있었다2021.09.15.

기르골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라틸에게 붉은 시선을 보내왔다. 라틸은 마른침을 삼켰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면서 비가 몰아쳐 목덜미에 닿자 등골이 오싹해왔다. 하지만 라틸은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웃으면서 물었다.

16551114564275.png“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그 대답을 듣자 기르골의 눈꼬리가 좀 더 짙게 휘었고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1655111456428.jpg"우리 아는 사이라며."

기르골이 자신의 거짓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라틸은 입술을 모으고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도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상대가 거짓말쟁이란 걸 알고 있었다.

16551114564275.png“내가 줬던 건 꽃다발인데. 마음 아니고.”

1655111456428.jpg“그러니까. 꽃다발을 받았으니 마음으로 보답하려고.”

라틸은 기르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산도 가지고 있으면서 그는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뒤로 다 넘어가 있었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긴 했지만.

1655111456428.jpg“대답은?”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빗물이 자꾸만 옷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편안한 셔츠가 물에 젖어 들어갈 때마다 몸에 달라붙는 감각에 라틸은 몸이 간지러워졌다. 라틸은 몇 번이나 생각했다. 저 남자…… 대체 내 이름. 아니. 이름도 아니다. 가명을 어떻게 알았을까?

16551114564275.png‘도미스에게 들었나?’

라틸은 기르골이 아이도미스에게 자기 이름을 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달리 알 방법이 없으니까.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라틸은 몇 번 보았다고 난데없이 연애하자고 하는 수상쩍은 인물과 연애할 마음은 없었다.

16551114564275.png“꽃다발에 넘어오다니. 너무 쉬운 마음인데.”

라틸이 우산 밖으로 나가며 혀를 차자, 기르골은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1655111456428.jpg“난 쉬운 게 아니라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야, 아가씨.”

16551114564275.png“그럼 거절할게. 난 남 이야깃거리 되는 거 별로라.”

라틸은 대답을 듣지 않고 비를 손으로 막고 언덕 아래로 뛰어갔다. 기르골은 대답을 하자마자 빠르게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비에 젖은 탓에 옷자락은 빠르게 뛰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자꾸만 몸에 엉겨 붙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꿋꿋하게 잘 내려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기르골은 웃으면서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1655111456428.jpg“저 아가씨가 대적자일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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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궁전으로 돌아와 가면을 벗은 라틸은 내내 비를 맞아 차가워진 몸을 따뜻한 물에 담가 풀면서 기르골에 대해 생각했다.

16551114564275.png‘기르골이 내 이야기를 아이도미스에게 들은 게 맞겠지? 들었다면 어떻게 들은 건지?’

기르골이 자신의 이름을 안 것도 연애하자고 제안을 한 것도 다 이상했다. 하긴. 도미스의 꿈속에서도 그자는 능글맞은 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같긴 했지만.

16551114564275.png‘아이도미스에게 내 이야기를 들은 거라면 연애하잔 이야기는 왜 꺼낸 걸까? 아이도미스가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을 리는 없는데…… 혹시 내가 칼라인과 아이도미스 사이에 방해가 될 거라 여겨서?’

하지만 기르골의 고백이야 이미 거절했으니 더 걸릴 것도 없다. 아이도미스와 기르골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 그게 찝찝하긴 하지만. 목욕물에 점점 피부에 열이 올라오고 땀이 나자, 라틸은 슬슬 다른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칼라인. 기르골과 칼라인은 절친한 친구였다. 도미스보다 서로를 먼저 안 친구. 라틸은 기르골을 찾으면 칼라인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다. 그러면 칼라인이 도미스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좀 가실까 봐.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르골을 칼라인에게 소개해 줘야 하는데…….

16551114564275.png‘칼라인이 기르골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어쩌지?’

도미스 이야기는 그가 꿈결에 그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단 핑계를 댔다. 그런데 기르골까지 같은 핑계를 대도 될까? 칼라인이 믿을까? 목욕물이 식어갈 즈음.

1655111456428.jpg“폐하?”

라틸이 너무 오래 욕조에서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는지 문밖에서 시녀가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1114564275.png“다 했다.”

라틸이 대답하고서 몸을 일으키자, 대기하던 시녀들이 들어와 커다란 수건을 라틸의 몸에 덮어주고 물기를 닦아 주었다. 시중을 받으며 라틸은 ‘괜찮을 거야’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 잠결에 기르골 이름도 같이 말했다고 하면 되겠지.

16551114564275.png‘하지만 기르골 얘기를 하기 전에 칼라인이 기르골과 화해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떠보자. 영원히 보기 싫을 정도로 어긋난 걸 수도 있잖아.’

그런 사이라면 기르골을 데려와 보여주는 게 오히려 못 할 일이었다.

16551114564275.png‘좋아.’

마음을 먹은 라틸은 내일 오후쯤 시간이 날 때 칼라인을 찾아가 보기로 결정하고서 시녀가 건네는 부드러운 가운에 팔을 꿰었다. * * * 이틀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 후궁들은 비 내리는 날 산책하기 싫은지 다들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혔으나, 칼라인은 비를 맞으면서 정원에 나와 있었다. 라틸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서넛이 왕반지라고 귀띔해 주었지만, 그건 절대로 아닐 테니까. 칼라인은 일전에 오리고기 이야기를 꺼냈을 때 라틸이 보인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도미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다 알았으나, 라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아직 알아가는 중이었다. 생일에 어떤 걸 주어야 기뻐할지, 지금은 생각하고 생각해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아직 두 사람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었으니까. 지나가던 하인들이 비를 맞으며 꽃을 쓰다듬는 칼라인과, 그 곁에 혼자 우산을 쓰고 선 칼라인의 시종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으나 칼라인은 생각에 빠져 그걸 알아채지도 못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종이 먼저 후궁인 칼라인이 비를 쫄딱 맞는 게 이상한 광경이란 걸 뒤늦게 깨닫고는 속삭이듯 작게 보고했다.

1655111456428.jpg“단장님. 이걸 쓰시지요. 인간들이 이상하게 봅니다. 저는 제 우산을 챙겨 오겠습니다.”

시종이 우산을 건네자, 칼라인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이상해 보인단 말에 순순히 우산을 받아 들었다. 시종이 꾸벅 인사를 하고 정원 밖으로 나가자, 칼라인은 한 손에 우산을 들고서 다시 꽃을 쳐다보길 계속했다.

16551114593243.png‘검술을 익혔다고 했지. 보검을 드리면 싫어하시려나. 너무 무난한가.’

그런데 한참 고민에 잠겨 있자니, 아까 시종이 떠나간 곳에서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오싹한 분위기. 칼라인은 꽃잎에 묻은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다가, 낮게 내리떴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내린 그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의 뒤쪽에 오랜 악우가 서 있었다. 한때 그의 스승이자 친구였으나, 지금은 누구보다 증오스러운 이가. 덤덤한 표정 아래로 칼라인의 마음이 거세게 흔들렸다. ‘주인’이 이자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 그와 측근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런데 가짜 로드에게 홀려 지하성 부근을 얼쩡거려야 할 뱀파이어가 이쪽에 서 있다니. 눈이 마주치자 기르골은 권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이 지을 만한 미소는 아니었다.

1655111456428.jpg“안녕.”

기르골의 인사에 칼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 기르골의 등장에 칼라인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행동을 정할 수 없었다. 기르골도 칼라인이 같이 인사할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닌지,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으로 매만지듯, 기르골은 잘 꾸며진 하렘의 내부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그 과정이 끝나자 기르골은 활짝 웃으면서 칼라인에게 소감을 이야기했다.

1655111456428.jpg“전대 뱀파이어 나이트가 꼴이 우습게 됐네. 인간 황제가 만들어 둔 정원에서 살아가게 되다니.”

16551114593243.png“…….”

칼라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기르골은 전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1655111456428.jpg“궁금해. 어떤 황제가 자넬 이런 꼴로 만든 건가?”

16551114593243.png“!”

우산을 쥔 칼라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칼라인이지만 기르골이 황제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듯하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주 조심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잘못 대답했다가는 오히려 황제에 대한 기르골의 흥미를 더욱 부추길 수 있으니.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지금 황제야말로 그가 저자의 눈에서 감추려 그렇게 애쓴 로드의 환생이 아니던가.

16551114593243.png“그냥 황제지. 평범한 황제.”

칼라인은 우산을 들지 않은 한 손을, 손바닥이 자신을 향하게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16551114593243.png“도미스를 잊을 도피처를 만들어 준 황제.”

그 외엔 아무 의미도 없다던가,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으나, 결국 칼라인은 그 부분은 생략했다. 기르골은 눈치가 빨랐다. 너무 구구절절 설명하면 오히려 ‘뭐가 있구나’ 싶어서 호기심을 보일 것이다. 그의 호기심을 받는 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고. 예상대로 기르골은 칼라인의 대답에 황제에 대해선 흥미가 사라진 듯 가식적으로 웃으며 계속 조롱했다.

1655111456428.jpg“자기를 잊으려 인간 권력자에게 몸을 바치는 애인이라. 도미스가 잘도 좋아하겠어?”

  * * * 라틸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16551114564275.png‘이게…… 무슨 소리야?’

라틸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모든 기척을 본능적으로 지웠다. 예민한 칼라인과 기르골조차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라틸은 그렇게 세상에서 자신을 숨긴 채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꼭지가 바닥을 향한 우산은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접으면 소리가 날 게 분명하기에, 라틸은 우산을 접지도 못하고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 비 때문인지 혼란스럽기 때문인지 더이상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라틸은 발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16551114593243.png-그냥 황제지. 평범한 황제. 도미스를 잊을 도피처를 만들어 준 황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주위에 아무도 없단 걸 확인한 라틸은 우산을 접고 칼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어가 보았다. 그곳엔 누군가 서 있었단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칼라인은 보이지 않았다. 칼라인과 대화한 상대 역시. 라틸은 인상을 찌푸리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칼라인이 도미스를 잊지 못한 것. 도미스를 잊기 위해 후궁으로 지원한 것. 다 알고 있었는데. 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듣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16551114564275.png‘……잠시 나갔다 오자.’

  * * * 밤이 되자 칼라인은 아무도 모르게 하렘을, 궁전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칼라인은 기르골이 평소 어떤 여관을 선호하는지 알았다. 그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외곽을 좋아하는지 중앙을 좋아하는지, 그는 괴로울 정도로 기르골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껍데기였단 걸 깨닫고 말았지만. 하늘 위에서는 계속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잔잔하게 떨어지고 있었으나 칼라인은 우산을 쓰지 않고 기르골이 갈 만한 여관을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다. 낮에는 위치가 위치인지라 기르골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가 내킨다면 주위에 누가 있건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굴 뱀파이어인지라, 최대한 조용히 보내야 해서. 하지만 기르골이 여기까지 나타났다. 도미스가 죽은 후 낯짝 한 번 비추지 않던 뱀파이어가 왜 여기 나타난 건진 알 수 없으나 대비를 해야 했다. 그자가 앞으로 어떤 짓들을 할지 알면서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을 즈음. 인기척이 전혀 없는 비 오는 날의 밤거리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칼라인은 지나가던 걸 멈추고 그곳을 쳐다보았다. 깜깜한 어둠을 한 줄기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가로등 빛으로 바닥에 동그랗고 노란빛의 구가 만들어졌다. 그곳에 기르골과 ‘사디’가 마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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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골은 사디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고, 사디는 그 풍성한 꽃다발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우르릉 천둥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번개가 번쩍이며 사방이 하얗게 변했다. 그 찰나의 반짝임 속에서, 칼라인은 도미스를 보았다. 도미스와 마주 선 기르골이 그녀 양부의 머리를 건네던 모습을 보았다. 경악한 그녀의 표정과 웃고 있던 기르골. 짧게 지나간 과거의 환영 뒤에서 다시 하늘은 어두워졌고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요란한 빗소리가 과거와 현재를 뒤섞자 칼라인의 눈동자 흰자위가 붉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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