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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161/367)

161화.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2021.09.12.

기르골은 얼결에 꽃다발을 안았다. 천사 같은 외형의 그가 화사한 꽃다발을 안은 모습은 신전에 그려져 있을 것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표정에 떠오른 건 어리둥절함이었다. 기르골은 여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정정했다.

16551114436246.jpg“우린 초면인데.”

정답이었으나 라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16551114436252.jpg“아니야. 하지만 탓하지 않겠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거든.”

‘사디’는 실제로 놀라울 정도로 존재감이 약한 외모였다. 이 점을 이용한 거짓말이었다. 기르골은 그 말을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어쨌건 갑자기 꽃다발을 건넨 상대에게 호기심이 든 건 확실해 보였다.

16551114436246.jpg“날 어디서 보았지?”

16551114436252.jpg“그건 기억나지 않아. 너무 잘생겨서 얼굴만 기억에 남은 거라.”

라틸의 말에 기르골은 꽃다발을 품 안에 꽉 안더니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라틸은 그가 꽃 냄새를 맡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을 걸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내내 지켜보던 인물을 현실에서 보니 신기해서 말을 건 건데. 꽃다발을 받고 저렇게 좋아하니 뿌듯했다. 기르골은 꽃에 코를 박듯이 하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16551114436246.jpg“초면이 아니라는 아가씨, 이름이 뭐지? 이름을 알려주면 나도 기억을 뒤져볼 수 있을 거 같은데.”

16551114436252.jpg“바빠서. 대화는 나중에.”

하지만 ‘사디’의 모습으로 기르골과 더 깊게 알고 지낼 생각이 없었기에, 라틸은 돌아서서 별꾀꼬리 여관을 향해 걸어갔다. 기르골은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한쪽 팔에 꽃다발을 품고서 다른 손으로 꽃봉오리를 뜯어 입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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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놀이를 하면서 지나가던 아이는 생으로 꽃을 뜯어먹는 기르골이 이상하게 보이는지, 근처를 달려가다 말고서 눈썹을 치켜떴다. 아이가 기겁해서 쳐다보자 기르골은 꽃을 또 뜯어 먹다 말고서 친절하게 새로 딴 꽃봉오리를 내밀었다.

16551114436246.jpg“너도 줄까?”

아이는 황급히 고개를 젓고서 얼른 자리를 떠나갔다.

16551114436246.jpg“맛있는데.”

아이가 가버린 후에도 기르골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꽃을 ‘우득 우득’ 뜯어 먹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까 꽃을 준 여자가 걸어간 쪽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16551114436252.jpg‘왜 따라오지?’

기르골에게 꽃을 건넨 라틸은 아이도미스를 찾기 위해 별꾀꼬리 여관으로 걸어가던 도중, 기르골이 자신을 계속 따라오고 있단 걸 눈치챘다. 꽃을 하나씩 하나씩 뜯어 먹는 괴상한 꼴로 따라오는데,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인 채 오고 있지만.

16551114436252.jpg‘식성이 특이하네.’

커다란 거울을 매달아 둔 가게를 지나며 기르골이 자신을 따라오는 게 착각이 아니란 걸 확신한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도미스를 만나려 했는데. 저렇게 졸졸 따라오고 있으니 곤란했다. 지금부터 아이도미스와 할 대화는 자세히 들으면 좀 미친 대화일 테니. 결국 라틸은 이리저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많은 장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커다란 기둥 뒤를 지나며 가면을 벗어버린 라틸은, 거기서 바로 몸을 돌려 왔던 방향으로 도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고 있자니 옆을 지나쳐가는 기르골이 보였으나 라틸은 이번에는 그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으나, 서로 정면만을 본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기르골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라틸을 그대로 지나갔다. 희미하게 스친 옷자락을 의식한 건 라틸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아무리 빠르게 걸어가도 자신에게 꽃을 준 여자가 보이지 않는단 걸 알아차린 기르골은 어느 모자 가게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고개를 기우뚱했다. 하지만 이미 그 여자는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기르골은 좀 더 주위를 더 둘러보았지만 결국 그 여자 쫓기를 그만두고, 근처의 노점상으로 걸어가 커피를 산 다음 간이 의자에 앉았다. 꽃을 하나하나 먹으면서, 그는 이번에는 꽃다발을 주고 가버린 여자가 아니라 가짜 도미스가 말한 대적자일지도 모르는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기르골의 손가락이 불그스름한 꽃잎을 뚝 뚝 뜯을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서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꽃 한 다발을 다 먹고 나서야 기르골은 그 대적자라는 여자를 알아낼 방법을 떠올리고서 꽃다발을 만족스레 내려다보았다. 꽃다발에는 초록 줄기만 뾰족하게 남아 있었다. * * *

16551114436252.jpg‘결국 아이도미스는 못 만났네.’

대신 기르골을 보았으니, 그야말로 ‘꿩 대신 닭’이었다. 라틸은 궁전 안으로 들어온 다음 옷을 갈아입으면서, 실제로 본 기르골의 모습을 하나하나 되짚어 떠올려 보았다. 꿈속에서 볼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남자였다. 아니, 실제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꿈속에서는 아무래도 도미스가 보고 듣는 걸 위주로 같이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도미스는 거의 모든 감각이 칼라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탓이었다.

16551114436252.jpg‘도미스는 칼라인에게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 아니, 두 번째 봤을 때 반한 게 틀림없어.’

하지만 왜? 칼라인의 어떤 점에 반한 걸까? 기르골과 칼라인은 둘 다 엇비슷하게 아름답고 좀비에게서 구해준 것도 둘이 동시였는데, 도미스는 왜 처음부터 칼라인에게 반했을까? 옷을 다 갈아입은 라틸은 가면을 벗은 다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산책을 끝낸 척 집무실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16551114436252.jpg‘하긴. 다 자기 취향이지.’

그런데 공개 집무실로 돌아와 보니, 책상 앞에 시종 하나가 초조한 얼굴로 연신 다리를 움찔거리며 서 있지 않는가.

16551114436252.jpg“무슨 일이냐?”

라틸이 의자로 걸어가며 묻자, 시종은 얼른 인사를 올리고서 보고했다.

16551114436246.jpg“폐하. 대현자가 레안 황자님을 뵈러 별궁에 들어가려다 가로막히자 폐하를 뵙고 싶어 합니다.”

라틸은 의자에 앉으면서 시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종은 자기가 대현자를 불러들이기라도 한 양 라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라틸은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아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대현자가 오빠를 만나려 했다고? 자기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시종장이 라틸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16551114436246.jpg“어떻게 할까요, 폐하? 들어오라 할까요? 아니면 돌려보낼까요?”

16551114436252.jpg“뭐가 좋을까요.”

16551114436246.jpg“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라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책상을 노크하듯 툭 두드리며 지시했다.

16551114436252.jpg“대현자는 여기로 부르고. 다들 나가라.”

  * * * 라틸은 커다란 사각형 모양 손수건을 펼쳐 놓고서 그걸로 꽃을 접기 시작했다. 반 정도 완성되었을 즈음. 열린 문 너머로 대현자가 들어왔다. 대현자가 들어오자 밖에서 시종이 눈치껏 문을 닫아 주었다. 넓지만 갑갑한 공간 안에 라틸과 대현자 단둘만이 남았다.

16551114436246.jpg“폐하를 뵙습니다.”

대현자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리는 동안 라틸은 무표정하게 그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대현자가 고개를 들 즈음 나흘 정도 햇볕 아래에서 방치한 초콜릿처럼 웃었다.

16551114436252.jpg“오랜만이군.”

대현자는 라틸의 미소 아래에 숨은 언짢은 기색을 눈치채고서 송구하다는 듯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라틸은 그에게 근처의 의자에 앉으라 손짓하면서 말했다.

16551114436252.jpg“그래. 레안 황자를 찾아가려다 못 만났다고.”

라틸이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 입술만 올리자, 대현자는 얌전히 허벅지 위에 자신의 두 손을 올리고서 라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1114436246.jpg“폐하.”

16551114436252.jpg“용서해 주십시오. 많이 반성했습니다. 화를 푸십시오. 이해해 주십시오.”

16551114436246.jpg“!”

16551114436252.jpg“다 금지라네. 말하다 거절당하면 기분 상할까 봐.”

라틸이 빙그레 웃자, 대현자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라틸이 예시로 들어준 말 중에 하고 싶던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라틸은 대현자를 재촉하는 대신 펜에 잉크를 묻히고 새 종이를 펼치면서 그가 금지된 예시를 벗어난 말을 하길 기다렸다. 쉬이 입을 열지 못하기에 라틸은 빈 종이에다가 의미 없는 철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세 번 적었다. 네 번째 적으려 하고 있자니, 대현자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16551114436246.jpg“신도 감히 레안 황자님을 용서해 달라 청하진 못하겠습니다.”

16551114436252.jpg“청하러 온 거 같은데.”

라틸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대현자가 또 입을 다물 눈치기에, 라틸은 자기 입을 한 손으로 눌러 ‘조용히 할게’란 표시를 하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얼른 말을 이으라 손짓했다. 대현자는 몹시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16551114436246.jpg“폐하께서 황자님께 화내실 수밖에 없단 건 압니다. 하나뿐인 동복 남매에게 배신을 당한 거니까요.”

16551114436252.jpg“알면 용서란 말 꺼내지도 말게.”

16551114436246.jpg“레안 황자님도 국민들의 안녕과 폐하의 안녕 사이에서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폐하를 살리는 길을 택하고 싶었기에, 빠르고 손쉬운 방법을 제쳐두고 폐하께 양위하겠단 방법부터 선택하신 거고요.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요.”

라틸의 심드렁한 표정을 본 대현자는 참담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16551114436246.jpg“레안 황자님께서 500년에 한 번 깨어나는 로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다 신의 탓입니다.”

16551114436252.jpg“그대가 레안 황자에게 내가 사악한 존재라 권했나?”

16551114436246.jpg“그건…….”

16551114436252.jpg“아니라면 그건 그대의 탓이 아니지. 내가 아무에게나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하진 말게.”

16551114436246.jpg“폐하. 감히 용서를 청하진 못하겠습니다. 그저, 그냥, 레안 황자님이 좋아하는 공부라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16551114436252.jpg“거절하네.”

라틸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버리자, 대현자의 표정이 슬퍼졌다.

16551114436246.jpg“폐하께서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셔야 합니다. 그게 폐하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길입니다. 운명에 먹히면 안 되지 않습니까.”

라틸이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대현자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서 말을 바꾸었다.

16551114436246.jpg“폐하께서 사악한 존재란 뜻이 아닙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가 말을 마치기 전. 라틸이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16551114436252.jpg“그대는 내가 어린 시절에도 비슷한 말을 했지. 대현자. 그대가 보기엔, 나는 사악한 존재건 말건 피를 볼 운명 같은가 봐?”

라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권태로웠으나 그 말에는 분명하게 가시가 느껴졌다. 대현자는 아차 싶어서 얼른 용서를 빌었다.

16551114436246.jpg“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무어라 변명하려는데 지척에서 ‘스릉’ 맑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대현자는 굳은 채 눈동자만 들어올렸다. 어느새 곁으로 온 라틸이 웃으면서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16551114436252.jpg“내 운명은 그대에게 있는가? 그대 운명은 확실하게 내 손에 있는데.”

16551114436246.jpg“!”

  * * * 대현자는 라틸을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무거운 표정으로 떠났다.

16551114436252.jpg“대현자도 계속 감시하라.”

라틸은 흑림 둘을 불러 지시를 내린 다음 책상 앞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해 나갔다. 그러다가 저녁 여섯 시 쯤. 오늘 일과가 적당히 마무리되자, 라틸은 산책하러 나갈 테니 식사는 차리지 말라 지시하고서 다시 ‘사디’로 변한 다음 궁전 밖으로 나갔다. 궁전을 벗어난 라틸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비탈길을 반 정도 올라왔을 때쯤 비가 내렸으나 돌아서지 않았다. 여름이라 저녁이어도 하늘은 밝았고 비가 내려도 햇살은 내려왔다. 언덕 꼭대기로 올라간 라틸은 궁전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계속 비를 맞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서운한 감정도 화가 나는 감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독하게 외롭고 허무한 감정이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커다란 새가 날개를 한 번 푸덕이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타고 이마와 콧등을 흐르던 비가 멈춰 있었다. 라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까만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 너머에선 여전히 폭우가 떨어지고 있는데. 까만 하늘은 빛을 가렸으나 비는 막아주었다. 머리카락에 고여 있던 빗방울이 옷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라틸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옆을 보았다. 시야의 사각지대로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완전히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까만 우산을 든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르골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16551114436246.jpg“우리 연애할까? 사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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