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악연들이 모두 만나다2021.09.08.
라틸은 어제 늦은 밤, 칼라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홀로 조용히 식사했다. 너무 탱글탱글해서 제대로 포크에 집히지도 않는 면을 휘젓고 있노라니 칼라인의 매콤하고 씁쓰름한 사과가 떠올랐다.
-폐하께 모든 걸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럼 말하면 되잖아.
-폐하께 눈치 없는 남편이 될 것 같아 말하기가 꺼려집니다.
라틸이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칼라인은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제가 비록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제게 폐하는 배우자이십니다. 결혼한 것과 다를 바 없지요. 배우자 앞에서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 이야기를 하라니요.
-그 배우자가 괜찮다잖아.
-과거 연애사를 결혼 후에 얘기해봤자 싸움의 시작이자 발단이 될 뿐입니다. 여기서 오는 좋은 일은 하나도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저처럼 대할 건데, 어째서 자꾸 얘기하라 하십니까.
라틸도 그건 인정했다. 전 연인에 관해 파고들어 봤자 얻는 건 상처뿐이었다. 정신적으로 피곤해지기만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지 않는가. 라틸도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그의 과거사에 대해 굳이 캐묻진 않았을 거였다. 알아서 뭐가 좋다고.
-그럼 내 생일 선물로 이야기해줘.
-왜 이렇게 궁금해하십니까.
-모르면 그냥 넘어갔지. 아는데 모르는 척하려니 힘들다.
-모르는 척해주세요. 주인이 잘하는 거잖습니까.
-네가 나한테 옛날얘기를 해주면, 나도 옛날얘기를 해 줄게. 그러면 공평할까?
-옛날얘기라니요?
-내가 전에 연애한 얘기.
칼라인은 입을 벌리고 라틸을 쳐다보다가 답지 않게 황망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상처를 내면서 싸우자는 걸로 들립니다.
그로부터도 한동안 내내 거절했으나, 결국 생일 이야기로 설득하자 칼라인은 마지못해 도미스와의 첫 만남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뭘 좀 조사하기 위해 산골 마을을 돌아다니다 만났습니다. 어떤 여자가 사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뛰어가고 있었죠.
-그게 도미스야?
-네. 마차에 부딪힐 것 같기에 피하도록 도와줬는데…… 겁을 먹고 오히려 달아났습니다.
‘피하도록 도와줘서 겁먹은 게 아니잖아. 뒤에 흑마법사 질문을 해서 달아난 거지.’
라틸은 면을 포크로 돌돌 말면서 생각했다. 게다가 그 마차가 그냥 마차던가. 괴물 마차였지? 어쨌든 흑마법사 이야기가 생략된 걸 제외하면, 자신이 본 기억과 정황은 같았다.
‘좋아. 아이도미스를 찾아가서 기억을 비교해보자. 그러면 알겠지. 가짜가 도미스를 흉내 낸 건지, 아니면…… 도미스가 살아 돌아온 건지.’
라틸은 그쯤에서 그 대화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칼라인이 라틸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먼저 이야기를 시도했다.
-도미스를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많이 주었고요.
-그래?
-……그래서 주인에겐 그 몫까지 더 잘하고 싶습니다.
-상처는 도미스가 받았다며. 왜 나한테 잘하겠단 건데?
-전 주인과 결혼했으니까요.
라틸은 이미 도미스의 기억을 꿈으로 보면서, 칼라인이 처음에 도미스에게 얼마나 쌀쌀맞게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도미스가 먼저 칼라인을 좋아하는 눈치였단 것도. 하지만 칼라인이 자신에게 잘하겠단 이야기를 하며 도미스 이야기를 꺼내자, 문득 기분이 상했다. 혹시 도미스에게 못한 걸 자신에게 잘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나 싶어서.
-아직도 그 사람 좋아한다며. 왜 헤어졌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요.
-아아.
-그러니 아시겠지요. 제가 밖으로 나가 도미스를 만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상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라틸은 표정을 펴지 못했다. 억지로 대답을 강요했으니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한단 걸 알면서도. 칼라인도 그 기색을 눈치챈 건지 대번에 후회하는 목소리로 이마를 짚었다.
-역시 괜히 이야기했습니다.
-아니야. 듣고 나니 훨씬 나아. 안 들었으면 계속 그 생각만 했을 테니까.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도미스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한테 잘하려는 건 아니지?
-……역시 괜히 이야기했습니다.
이후로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라틸은 칼라인의 방을 나섰다. 상념에서 깨어난 라틸은 그래도 역시 칼라인에게 그 일을 물은 건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꾸는 게 도미스의 기억이라는 게 맞다는 걸 확인해야 아이도미스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할 수 있지 않던가. 불쾌한 기분은 아직도 신 오렌지처럼 이를 시리게 했지만. 입맛이 사라진다. 라틸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칼라인이 만난 도미스가 가짜라면 칼라인의 모든 말이 진실. 도미스가 진짜라면 칼라인의 말은 거짓.’
산책을 핑계로 밖으로 나오자마자 라틸은 빈방으로 간 다음 숨겨둔 옷으로 갈아입고 가면을 착용했다. 궁전을 출입할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 둔 신분 패까지 확실하게 챙긴 다음 거울을 보니, 누가 봐도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여자가 보였다. 라틸은 거울을 한 번 손으로 쓸어보다가 단호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이도미스를 찾아가 보자.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겠어.’
* * * 물줄기가 힘껏 치솟다가 부서지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분수대에서 튄 물방울이 뺨에 묻자, 기르골은 엄지로 물을 쓸어 닦으며 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서, 따뜻한 초록색 눈동자로 나란히 앉은 뱀파이어를 바라보는 여자에게로. 그 여자는 도미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뱀파이어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저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구나. 기르골은 소리 내 웃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미스의 이름을 언급하는 목소리를 따라왔는데, 갑자기 한 쪽이 돌아가는가 싶더니. 그다음에 나타난 이가 저 얼굴일 줄이야. 검은 손이 심장을 틀어쥐는 느낌은 기르골을 흥분시켰다. 그는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피 흘리던 도미스를, 증오에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을 떠올렸다.
* * *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단 걸 모른 채, 아이니는 자신이 ‘전생’에 꽤 친하게 지냈던 뱀파이어 믹스에게 사디에 대해 상담하고 있었다. 식시귀를 한번에 물리치고, 좀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뱀파이어조차 눈 깜짝할 사이 메치어 버리는 여자에 대해. 믹스는 두 다리를 벌린 채 편한 자세로 앉아 이야기를 듣다가, 뱀파이어를 메쳐 버렸단 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어제 킬리가 웬 인간 여자한테 당했다고 다들 놀려대고 있더니. 도미스 님이 말하는 그 여자에게 당한 건가 보군요. 동료들이 놀려대기에 반쯤 장난이라 생각했는데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아이니는 중얼거리고서 초조하게 두 손을 깍지낀 채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그 여자가 대적자일 확률은 없을까?”
“식시귀, 뱀파이어, 좀비를 쉽게 상대하는 여자라.”
믹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능성이 있지요.”
아이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나타났군.”
아이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믹스는 그 모습을 가엾게 바라보았다. 그는 도미스와 대적자가 어떤 사이인지 알았다. 운명이 만들어 둔 적이긴 하지만, 그 운명은 한쪽에게 지나치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완전한 로드로 각성하기 전까지, 아니, 각성한 후에도 도미스는 대적자에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았다. 결국은 그녀의 손에 죽었고. 로드인 도미스는 분명히 죽었으니 지금의 도미스는 로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말하는 걸 보아하니 기억은 남아 있는 터. 대적자 이야기에 저 정도로 반응하는 게 오히려 온순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 여자가 대적자라면 빨리 처리해야겠군요.”
“처리한다면…….”
“죽여야지요. 강해지기 전에요. 어디 있는 여자인진 아십니까?”
* * *
‘대적자? 여자?’
아이니가 내뱉은 대적자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는 건 믹스 뿐만이 아니었다. 기르골도 눈살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대적자가 여자라고?’
지난번의 대적자는 분명 여자였고, 대적자나 로드는 남자일 때도 여자일 때도 있으니 성별이 여자라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기르골이 대적자일 거라고 골라둔 꼬마가 남자였단 것이다.
‘그 재수 없던 흑발 꼬마가 대적자가 아니었나?’
예언이 이루어진 날짜에 태어난 아이들이 신전에 모였을 때. 기르골은 그 아이들 중 누가 대적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그곳으로 찾아갔다. 당시 가장 눈에 띄는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인형처럼 생긴 남자아이였다.
‘여기는 욕조도 없고 개인 방도 없고 음식이 맛도 없고 하인들도 없고 내 조랑말도 없다. 하지만 가장 싫은 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단 거다.’
게다가 그 귀여운 얼굴로 얼마나 말을 재수 없고 쌀쌀맞게 하던지. 기르골이 이번 대적자는 성질머리가 아주 제대로 꼬였다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기르골이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 로드는 몹시 빼어난 사람도 있었으나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멍청하고 재능이 없다고 사람들에게 무시 받던 사람도 있었다. 반면 대적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눈에 띄고 우수했다. 신전에 모인 대적자 후보들 중에서 그 재수 없는 아이는 혼자 다른 색으로 눈에 띄었고, 기르골은 남몰래 그 아이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해 보았다. 아이는 그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가뿐하게 테스트를 통과했고, 이후로 기르골은 그 아이가 대적자라고 확신한 채 아이의 성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대적자가 있다고? 로드 하나 대적자 하나. 지금까지 내내 이랬는데? * * * 자신의 발언이 기르골에게 어떤 혼란을 주었는지 모른 채, 아이니는 믹스에게 상담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칼라인에게 전하고 싶은데. 나는 신분이 없는 사람이라 궁전에 들어가기가 어려워.”
“신분이 없으시다고요?”
“……이 몸에는 좀 사정이 있어서.”
아이니가 곤란해하며 말하자, 믹스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제안했다.
“그러면 흑사신단 소속 용병으로 신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단장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하러 궁전에 들어가니, 그때 일행에 끼어 들어가시지요.”
아이니는 믹스의 제안에 처음에는 기뻐서 그러겠다고 말했으나 1분도 지나지 않아 힘없이 포기했다.
“그건 안 돼.”
“안 된다니요?”
“…….”
“칼라인은 내가 이번 대 로드가 아니라 날 기피해.”
아이니의 곤란해하는 목소리에 믹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반박했다.
“그분이 그럴 리가요. 나이트는 로드를 위해 살지만, 나이트라고 해서 로드를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단장이 사랑한 건 도미스 님입니다. 로드란 신분이 아니라.”
“하지만 그러더라.”
아이니는 허탈하게 중얼거렸으나, 사실 그녀가 궁전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뿐만은 아니었다. 칼라인에게 사디에 대해 경고를 하면, 그가 ‘그쪽이 사디를 어떻게 압니까?’라고 의심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녀가 도미스의 환생이란 걸 부정하는 그인데. 전생의 모습을 취하지 않은 그녀가 아이니 황후란 걸 알면…… 칼라인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이 일을 전할 방법은 생각을 좀 더 해 보자.”
* * *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갈 즈음. 반대편에 있던 기르골은 분수대 가까이 다가가 분수대 물에 손을 담근 다음,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쥐고 위로 쭈욱 끌어올렸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머리에 쭉 달라붙으며 올백 머리를 만들어냈다. 한 올이라도 흘러내리는 걸 용납하지 않고 완전히 머리카락을 다 붙인 기르골은 가장 윗단추를 잠그고서 만족스레 웃었다. 저 여자. 자기가 도미스의 환생이라면서 로드가 아니라 주장하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으나, 무슨 상관인가. 진짜건 가짜건 ‘도미스’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도미스의 기억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대하기 즐거울 텐데. 둘만의 재회를 위해 기르골은 도미스가 믹스와 헤어지길 기다렸다가, 믹스가 다른 쪽으로 가자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음흉한 속내와 달리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얼굴에 올라온 미소는 첫봄의 햇살처럼 아름다워서,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그를 곁눈질했다. 기르골은 도미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 도미스도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도미스는 기르골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서 휑하니 지나가 버렸다. 그녀가 도미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저렇게 나올 수 없는데. 기르골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대로 된 가짜도 아닌가? 하지만 곧 기르골은 마음을 바꾸었다. 죽이는 데 기억이 무슨 상관이야? 그런데 그쪽으로 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 이상한 거로 그의 뒤를 쿡 찔렀다. 기르골은 고개만 돌려 뒤를 보았다. 갈색 머리에 파란 눈. 모르는 얼굴. 인간. 처음 보는 여자가 꽃다발로 그를 찌른 거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는 꽃다발을 세우면서 기르골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돌연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대를 본 적이 있다.”
그가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사이. 그 여자, 라틸이 기르골의 품에 꽃다발을 안기며 다시 웃었다.
“그건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