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그가 이곳으로 왔다2021.09.05.
늦은 밤. 라틸은 오늘 밤에 칼라인을 찾아가겠다고, 미리 심부름하는 사람을 보내두었다. 그러고서도 거의 한 시간가량을 홀로 생각에 잠겨 할 말을 정리한 후에야 라틸은 하렘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 분위기가 물씬 풍기도록 잘 꾸며진 정원을 지나가자 칼라인의 거처가 나왔다. 미리 문 앞에 서 있던 칼라인의 시종이 라틸을 보자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전에는 칼라인의 시종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라틸은,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문득 저 사람도 좀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후궁들의 시종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의 주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게 하려고 애쓰는데. 칼라인의 시종은 유독 그런 데 관심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내가 도미스와 흑사신단 용병들이 친한 걸 봐서 너무 꼬아서 생각하나…….’
라틸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문을 닫았다.
“폐하.”
하지만 방문을 닫자마자 바로 얼굴에 닿아오는 차가운 입술에 라틸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칼라인이 어느새 라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마 위에 몹시도 차갑고 너무나 부드러운 이상한 감촉이 스치고 지나가자 라틸은 솜털이 오싹 일어났다.
“칼라인.”
놀란 마음이 가시자마자 눈앞에 훤히 보이는 창백한 피부에 라틸은 괜히 목이 잠겨 들어갔다. 칼라인이 걸친 목욕 가운의 허리끈이 너무 느슨하게 매여 있어서, 상체의 반이 다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난…… 대화를 하려고 온 건데.”
라틸은 그의 팔 위에 손을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압니다. 주인은 겁쟁이니까.”
하지만 칼라인이 귓가에 속삭이는 도발적인 말에 라틸은 발끈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겁쟁이라니.”
칼라인은 소리 없이 웃고는 한 손으로 라틸을 번쩍 들어올렸다.
놀란 라틸은 손을 휘젓다가 그의 머리를 붙들었다.
“칼라인!”
“이 정도 높이에 무서워하시다니. 겁쟁이지요.”
“갑자기 들어 올리니 그렇지!”
“용감한 사람이라면 갑자기 들어 올려져도 균형을 잡았을 겁니다.”
“페어 스케이팅이냐…….”
황당해서 항의하는 사이 칼라인은 라틸을 탁상 근처로 데려가더니, 그곳에 내려주고서 의자를 빼주었다. 라틸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칼라인에게 도미스의 기억에 대해 떠보기 위해 온 거라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말다툼부터 하고 나니 그래도 긴장은 조금 풀렸다. 칼라인은 미리 준비했던 과일을 직접 가져와 라틸 앞에 차리면서 물었다.
“그래요, 대화를 하러 오신 주인. 무슨 대화를 하러 오셨습니까?”
“옷은 좀 여미지 그래? 지금 좀 중요한 얘기할 건데.”
“신경 쓰이십니까?”
“안 쓰이겠어?”
칼라인은 소리 없이 웃더니 허리끈을 조금 더 여몄다. 하지만 여전히 라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할 정도로 옷자락이 펼쳐져 있어서, 라틸은 괜히 부채를 꺼내 팔랑팔랑 마구 부쳐댔다. 그렇지만 투덜거리는 마음과 달리 기분은 좋았다. 도미스가 나타났다고 해서 칼라인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아서. 아직 그녀를 사랑하는 건 맞지만 돌아갈 마음은 없단 걸까? 라틸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마음 없이 몸만 잡아두는 건 별로란 사람도 있지만, 라틸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칼라인이 도미스를 아직 사랑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니, 기분이 나쁘니 사실 상관이 아예 없진 않다. 하지만 그가 떠나겠단 청만 하지 않는다면, 라틸은 그를 계속 곁에 둘 수 있었다. 설령 도미스를 향한 그의 마음이 찝찝해서 애정을 주지 못하고 하렘 한구석에 방치하게 된다 해도.
“주인? 지금 표정이…… 아주 음험해 보이십니다.”
“네게 미안한 생각을 해서 그래.”
“무슨 상상을 하셨기에?”
라틸은 빙그레 웃고서 칼라인이 내놓은 포도를 한 알 따서 입가로 가져갔다.
“질문할 게 있어서 왔는데, 칼라인.”
“물어보시지요.”
“도미스가 네가 사랑했던 여자라 했지?”
내내 희미하게 웃고 있던 칼라인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라틸은 신경 쓰지 않고서 포도 껍질을 얇게 벗기며 물었다.
“둘이 어디서 만났어?”
* * *
“너. 생각보다 쓸모없구나.”
실망스러워하는 목소리에 폭파 전문 마법사는 그늘에 몸을 웅크리고서 떨었다. 온 힘을 다해서 저 뱀파이어가 말한 지하성을 부수려 했으나, 결국 성벽에 커다란 구멍을 내는 데 그쳤다. 그 구멍조차도 삽시간에 복구되었다. 몇 번 더 시도해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웃으면서 넘어가던 하얀 머리 뱀파이어의 표정은 그가 실수를 거듭할수록 달라졌다.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으나 눈꼬리가 굳어갔다.
“생각보다…… 잘되지 않습니다.”
폭파 전문 마법사가 가까스로 뱉은 말에 기르골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만 웃었다.
“잘되면 내가 그댈 안 찾았지.”
“다시 한번 해보면……”
“당연히 그래야지.”
기르골이 너그럽게 다시 기회를 줄 것 같자 폭파 전문 마법사는 안도해서 어깨에 힘을 뺐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계속 노력하도록 해.”
그러나 뒤에 나온 말이 이상했다.
“자리를 비우다니요?”
폭파 전문 마법사가 되묻자, 기르골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되물었다.
“내가 가진 마법사는 쓸모가 없으니 다른 마법사를 찾아봐야지.”
“그, 그럼 절 원래 몸으로 돌려주시는 건…….”
“성벽부터 부숴. 그게 거래잖아.”
긴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은 기르골은 눈 깜짝할 사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폭파 전문 마법사는 손을 덜덜 떨면서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면…… 성벽을 부수지 못하면 내내 이 몸으로 있어야 하는 건가? 햇빛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 * * 기르골이 폭파 전문 마법사를 떠나 지하성 주변의 어두운 숲을 나서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에 희한한 장면이 들어왔다. 인간들보다도 배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식시귀가 숲을 떠도는 모습이었다. 식시귀는 자신이 황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식시귀가 몇 발자국을 걸어갈 때마다 흙을 뒤덮은 짙은 녹색의 풀과 나뭇잎들을 보라색 망토가 한 번 더 뒤덮으며 끌려갔다. 석양의 붉은빛 아래에서, 유독 색이 좋은 금발이 부드럽게 흔들렸고 물감 같은 파란 눈동자는 연신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온실 속에서 목욕조차 제 손으로 안 하면서 곱게 곱게 자란 왕자님 같은 분위기. 기르골은 웃으면서 그 꼴을 내려다보다가 일부러 근처로 다가가 물어보았다.
“어디 찾아?”
식시귀는 황급히 위를 쳐다보았다. 높은 나무 위에 앉은 기르골과 시선을 마주하자 식시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경계했다. 경계심이 많은 성품 같았다.
“어디 찾는 거 맞나보네.”
“……누구냐.”
“이 방향으로 가면 나오는 거 한 군덴데. 거기 가나?”
“누구냐고 물었다.”
중얼거리던 기르골이 갑자기 “아.” 하고 탄식하자, 식시귀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르골은 제 주먹으로 손바닥을 툭 치고서 방긋 웃었다.
“너 혹시 여우 가면이 사는 지하성에 찾아가니?”
“그걸 어떻게…….”
내내 기르골을 경계하던 식시귀가 여우 가면 이야기에 처음으로 제대로 대꾸하려는 순간. 나무 위에 있던 기르골이 눈 깜짝할 사이 그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그럼 내가 죽여야 하는 도련님이네.”
코앞에 나타난 웃는 얼굴에 식시귀의 눈이 커다래졌다. 식시귀는 세상이 기우뚱하는 걸 느꼈다. 처음엔 옆으로 넘어진 것이라 생각했으나, 비틀거리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본 식시귀는 기르골이 그의 머리를 뜯어버렸단 걸 알 수 있었다. 한 번 떨어진 걸 도로 붙인 것이라 통증은 없었으나, 죽은 몸뚱이에도 공포가 스며들었다. 식시귀로 부활하기 전에도 부활한 후에도 이처럼 그를 무력하게 만들던 존재는 없었으니까.
“누구냐.”
기르골은 넘어지려 하는 식시귀의 몸을 부축해주면서 물었다.
“너야말로 누구니?”
식시귀는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저 하얀 머리 괴물이 부활한 그를 손쉽게 죽여버리란 걸 알아차렸다.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아이니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자신과 달리 온전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걸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볼 수 없다 해도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만큼 지키다 가야 했다. 이런 곳에서 처음 만난 하얀 괴물에게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연인이.”
“연인?”
“연인이 사라져서. 찾고 있다.”
기르골이 고개를 기울였다.
“여우 가면이 네 연인이니?”
“아니. 여우 가면은 여우 구슬을 다루니까. 그자라면 내 연인을 찾아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만나러 가는 거다.”
식시귀는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솔직한 대답이긴 했으나 고작 이런 대답으로 저 괴물이 물러나 줄까? 좀 더 그럴듯한 말을 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괴물이 납득할 만한 ‘그럴듯한 말’이 대체 뭐란 말인가.
“…….”
그러나 괴물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사랑! 위대한 사랑!”
식시귀의 몸뚱어리를 왈츠라도 추듯 붙잡고서 제자리에서 몸을 움직이더니, 즐겁게 흥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괴물은 식시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는가 싶더니, 몸뚱어리 위에 목을 도로 붙여주었다. 인형 머리라도 끼운 듯 붙인 머리 각도까지 맞춰 준 괴물이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내리자마자 식시귀는 뒤로 물러났다. 괴물은 즐거워 보였으나 미친 거 같았다. 저러다가 또 갑자기 공격을 할지 아닐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
“…….”
“연인을 찾길 바라지.”
다행히 괴물은 더 공격하는 대신, 식시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찍고는 빙그레 웃고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식시귀는 뿌리 내린 나무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죽은 몸에도 공포는 찾아왔다.
‘그건…… 그건 대체 뭐였지?’
* * * 기르골에게 식시귀 헤움은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가 헤움을 살려준 별다른 이유조차 없었다. 그에게 식시귀 하나는 약한 존재였고, 살려줄 때 그리 큰 동정심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르골은 숲을 벗어나기도 전에 화려한 복장의 도련님 같은 식시귀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 길로 곧장 향한 곳은 또 다른 폭파 전문 마법사가 몇 달 전에 다녀갔다는 타리움. 그곳의 불법 경매장에서 뜬금없이 마차가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다. 문제가 그 경매장이 떳떳하지 못한 입장이라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못했다지만. 어쨌든 그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단 수사 결과라도 알아보기 위해 기르골은 아주 오랜만에 타리움의 수도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 여기가 아직도 있나?”
그곳에서 50년째 영업 중인 가게를 찾아낸 기르골은 반가운 기분에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며 종업원은 당연히 다 바뀌어 있었으나, 기르골은 나름대로 추억에 젖어 50년 전 주문했던 음식을 또 주문하고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 상태로 눈을 감고 있자 사방에서 무수히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이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서부터 먼 거리에서 나는 속삭이는 소리까지.
“카리센 황후가 납치당했대.”
“무섭다. 황후가 어쩌다가? 호위들은 어쩌고?”
“그러니 난리가 났지. 거기 황후랑 황제는 사이가 안 좋잖아.”
“테이리 씨네 셋째 말이야, 동생이랑 싸우다가 계단에서 굴렀나 봐. 둘 다 나란히 입원했는데 거기서도 싸우다가 쫓겨날 뻔했대.”
“그 남매는 허구한 날 싸우다 다친 소식만 들려오네.”
“알현 신청한 날짜가 다 되어 가는데 떨려서 미칠 거 같아요. 폐하를 뵈면 뭐라고 말해야 하죠? 난 이런 거 잘 모르는데.”
“모르면 내가 대신 가줄까요?”
소소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르골은 점원이 미리 가져다준 물을 마셨다. 그때 수많은 이야기 중 그의 관심을 한 번에 사로잡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도미스 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은밀하게 사람을 풀어 찾았답니다. 지금은 안 찾고 있고요.”
“찾아서 멈춘 건가, 찾을 필요가 없어져 멈춘 건가.”
아주 멀리에서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기르골은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식당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근처에서 나는 물 떨어지는 소리.
‘분수대.’
눈 깜짝할 사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점원은 음식을 날라 오다가, 멀쩡히 앉아 있던 손님이 난데없이 사라지자 놀라서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