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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다 (158/367)

158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다2021.09.01.

라틸은 황당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감출 마음도 없었다. 대놓고 라틸은 도미스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도미스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작게 웃었다.

16551107462703.jpg“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군요. 하지만 이해해줘요. 라트라실 황제의 특사가 나를 염탐하면서 다니니, 이런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황제의 특사가 공무로 나를 염탐하라 시켰을 리는 없으니, 사디 양의 사심으로만 보이거든요.”

맞는 말이긴 했으나 라틸은 인정하지 않았다.

16551107462711.png“왜요. 공무일 수도 있죠.”

이에 일부러 뚱한 목소리를 내자, 도미스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이윽고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왜 저렇게 웃는 거야? 묘하게 불쾌하게 여겨지는 미소인지라 라틸은 기분이 나빠졌다. 저 입에서 다음에 나올 말이 그리 좋은 말이 아니란 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16551107462703.jpg“그렇군요. 그럼 사심은 황제에게 있단 건가?”

16551107462711.png“!”

16551107462703.jpg“황제의 명이라면 그대에게는 모두 공무일 테니, 공무일 수도 있겠네요. 그게 황제가 자기 후궁을 뒷조사하는 일이라도요.”

예상대로 도미스가 뱉은 말은 라틸의 기분을 한층 더 나쁘게 했다.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서 더욱더 그랬다. 칼라인이 관련되어 있으니 내가 당신을 조사하고 다니는 거지. 당연하잖아. 아니면 우리는 연관된 점이 전혀 없는데, 내가 뭐하러 당신을 조사하겠어?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뒤늦게 자신이 도미스의 기억을 꿈으로 꾸고 있단 게 떠올랐지만, 이 부분은 잠시 모른척했다. 지금은 그 일 때문에 도미스를 찾아다닌 건 아니니까. 라틸은 도미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기분 나빠하는 티를 더욱 강하게 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16551107462711.png“곤란한 분이네요. 다가와서 내게 아는 척한 것도, 칼라인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쪽인데요. 그런데 이젠 감히 폐하까지 끌어들이다니. 그쪽이야말로 이상한데요.”

그런데 한참 두 사람이 침착하게 서로를 말로 떠보고 찌르고 있을 때였다. 이를 지켜보던 흑사신단의 용병 하나가 불쾌하단 듯 중간에 끼어들더니 라틸의 어깨를 툭 손으로 치며 위협했다.

16551107462703.jpg“저쪽으로 물러서라, 인간. 아이도미스 님께 무례하게 굴지 마.”

얼핏 느끼기에는 그리 센 힘이 아니었으나 라틸은 어깨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힘이 무척이나 센 자였다. 하지만 라틸이 화가 난 건 흑사신단 용병이 생각보다 힘이 강한 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호감이 없는 상황에서 말을 나누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도미스와 자신이 아직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 용병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무례하니 어쩌니 하고 멋대로 어깨를 밀쳤다는 것. 이 자체가 이미 기분이 나빴다. 판단이 끝나자마자 라틸은 자신의 어깨를 세게 밀친 용병에게 파고들어 그자의 팔을 잡아 그대로 힘껏 메어쳐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 용병은 땅바닥에 등을 부딪치며 엎어졌다. 쿵 소리가 나며 용병이 쓰러지자, 내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용병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도미스 역시도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본 것처럼. 그들은 평범하고 특색 없어 보이는 사람. 무술을 익힌 것 같지도 않은 사람에게 동료가 한 방에 제압된 게 몹시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라틸은 여기서 더 싸우기도 귀찮아서, 도미스 쪽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본 다음 근처를 지나가는 승합 마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용병들은 바닥에 누워 있는 동료 쪽으로 다가가 그를 발로 툭툭 걷어차면서 타박했다.

16551107462703.jpg“뭐 하는 거야? 저런 약해 보이는 인간에게 지다니.”

16551107462703.jpg“뱀파이어 체면이 없다 뱀파이어 체면이.”

16551107462703.jpg“도미스 님 앞이라고 너무 방심한 거 아닌가?”

동료 용병들은 아까 인간이 그들의 동료를 한 번에 제압한 게, 이 동료 용병이 적당히 그 인간에게 져준 거라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엎어진 용병은 웃지 못했다. 경계하고 있던 정도는 아니지만, 방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방심하고 뭐고 할 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이 넘어가고 있었다. 겉보기와 전혀 다른 어마어마한 힘에 들려서. 도미스, 정확히는 도미스의 모습을 가지게 된 아이니 역시 팔짱을 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의심쩍었다.

16551107462703.jpg“저자는 황제의 특사인데…… 어떻게 뱀파이어인 너희를 한번에 제압한 거지?”

엎어진 용병이 손바닥을 털고 일어나며, 민망한 기분을 감추려는 건지 괜히 이리저리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다른 용병들은 ‘너희’가 아니라 ‘쟤’라면서 엎어진 용병을 가리켰으나, 아이니는 구긴 이마를 풀지 못했다.

16551107462703.jpg‘전에도 사디, 저 여자가 헤움 황자를 쫓아냈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

  * * *

16551107498273.png[흠흠. 오늘은 평소보다 좀 화려하게 입었는데. 알아보시려나?]

방문 앞에 서자마자 안에서 클라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16551107462711.png‘평소에도 이미 화려하게 입잖아?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게 입잖아? 거기서 더 화려할 게 있다고?’

라틸은 당황해서 들어갔다가, 인간 펜던트가 되어 있는 클라인을 보고 본능적으로 두 걸음 도로 뒤로 물러났다.

16551107462711.png‘눈부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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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107498273.png“폐하!”

클라인이 활짝 웃으면서 부르는 걸 본 후에야 라틸은 다시 앞으로 걸어가,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했다.

16551107462711.png“굉장하구나 클라인. 옷에서 나오는 광채가…… 널 파묻었네.”

보고 있자니 눈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옷 여기저기에 달린 보석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계속 번쩍여서. 클라인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자랑했다.

16551107498273.png“폐하께서 식사하러 오실 거라기에 좀 신경 써서 차려입어 보았습니다.”

본인은 좋다고 웃고 있어서, 라틸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의 뺨을 가볍게 쓸고 탁자 앞으로 갔다. 탁자에는 이미 준비된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라틸은 자리에 앉으면서 혹시라도 클라인이 하이신스와 자신이 사귀었던 일을 두고 아직 마음 아파하진 않나 살폈으나, 다행히 겉으로 보기엔 그런 기색은 없었다. 속마음까지 확인할 수 있다면 더 정확했겠지만, 식사를 하면서 많이 차분해진 건지 클라인의 속마음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라틸은 식사를 하면서 아까 낮에 보았던 도미스에 대해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냥 도미스를 실제로 보았다는 놀라움이나, 도미스가 난데없이 꺼낸 칼라인에 대한 화제 등이 신경 쓰여서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도미스와 떨어져 있으려니 새삼 여러 가지 의문점이 더 떠오른 탓이었다. 칼라인이 도미스에게 굳이 사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당시에도 이상하게 여겨졌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 말고도 이상한 게 있었다. 사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도미스는 어떻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사디를 가리켜 ‘라트라실 황제의 특사 사디’라고 불렀을까? 수도 안에서 도미스를 찾는 건 쉽고 가능한 일이었다. 도미스는 눈에 확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사디는 마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흐릿한 사람이었다. 인상착의만으로 찾기 힘든 사람. 심지어 ‘사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카리센에서 큰 활약을 했지만 타리움 사람들은 그저 이름과 공을 전해 들었을 뿐. 사디의 가짜 신분, 얼굴, 이름을 다 매치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심지어 카리센 사람들도 사디를 직접 만나고 소개받고 대화를 나눈 사람이 아니라면 바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도미스는 첫눈에 알아보고 이름까지 불렀다. 칼라인이 뭘 어떻게 설명해야 그게 가능할까?

16551107462711.png‘하지만 칼라인에게 이 질문을 하면 또 그러겠지. 주인이야말로 도미스 얼굴을 모르지 않습니까, 하고.’

16551107498273.png“폐하?”

라틸이 우두커니 앉아 나이프로 접시만 긁고 있자, 클라인이 맞은편에서 라틸을 불렀다. 라틸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나 먹으려던 계란 요리를 계속 먹었다. 포크 끝에서 계란 노른자가 퍼석하게 뭉개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라틸의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16551107462711.png‘아. 혹시 도미스가 카리센에서 날 본 적이 있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카리센에서 만나서 기억하는 거라면 라틸도 도미스를 기억했을 것이다. 라틸은 이미 도미스의 얼굴을 알고 있기도 하거니와, 도미스는 멀리 있어도 눈에 확 띄는 사람이라 모르는 사이여도 한 번 보면 기억에 강하게 남을 인상이니까. 그렇지만 라틸은 먼발치에서도 도미스는커녕 그 비슷한 사람조차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도미스가 카리센에 있었더라면 칼라인이 무언가 반응을 보였겠지. 그러나 칼라인은 카리센에 있을 때 아이니와 추문이 조금 날 뻔했던 걸 제외하면 아주 조용히 지냈다. 엄청난 미남인데도 칼라인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 역시 아이니 황후뿐…….

16551107462711.png‘음?’

곰곰이 생각하면서 앞에 놓인 음식을 무작정 입안에 밀어 넣던 라틸이 돌연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16551107462711.png‘칼라인이 딱 잘라 그랬지. 자기는 도미스를 만난 적이 없다고.’

라틸은 포크를 내려놓고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물품. 지도 귀퉁이에 쓰여 있던 ‘3’이란 숫자. 또 하나의 마법 물품.

16551107462711.png‘엄마가 가지고 있던 물품은 없앴지만, 만약 그런 물품이 세 개가 있는 거라면 아직 하나가 남아 있지. 누군가 그 물품을 이용해 도미스 얼굴을 따라 한 건?’

그렇다면 상대가 도미스가 아니었단 칼라인의 말도 맞고, ‘사디’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던 점도 납득할 수 있다.

16551107462711.png‘아이니는 자기 전생이 칼라인의 연인이라고 믿고 있었어. 아이니라면 칼라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모습을 칼라인의 애인처럼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칼라인과 관련된 일이 될 때마다 이성을 잃었으니.’

하지만 이것도 걸리는 점은 있다. 흑사신단 용병들. 그 용병들이 그녀에게 잘 대해주던 것. 그게 찝찝했다. 아이니가 얼굴을 바꿔서 도미스 행세를 하는 거라면 용병들이 넘어갈 리가 없으니까.

16551107462711.png‘아닌가? 하긴. 보통 사람은 상대가 변신해서 접근하는 거란 생각은 못 하지. 어쩌면 아이니가 아니라 삼자일 수도 있고.’

16551107498273.png“폐하.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라틸이 무의식중에 이미 다 먹어버린 빈 접시에 자꾸 헛손질을 하자, 클라인이 맞은편에서 걱정스럽게 불렀다.

16551107462711.png“아. 어어.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라틸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방긋 웃었다.

16551107462711.png“이제 다 풀렸으니 제대로 먹을게. 너도 얼른 먹거라. 나만 쳐다보지 말고.”

16551107462711.png‘나한테도 도미스 기억이 있지. 그 기억을 이용해서 아이도미스가 진짜 도미스인지, 도미스를 흉내 내는 가짜인지 알아봐야겠다.’

    * * * 그 시각. 카리센의 다가 공작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따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16551107462703.jpg“황후가 탈출한 게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무책임하단 소리를 들을 거다.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으니, 납치당했단 소문을 퍼트리도록 해라.”

16551107462703.jpg“예, 공작님.”

가까스로 찾아낸 몇 가지 증거들은 아이니가 납치당한 게 아니라 탈출한 것 같단 정황을 가리켰으나, 공작은 이 모두를 묻어버리기로 했다. 측근들을 모두 내보낸 다가 공작은 아이니가 사라진 빈방을 초조하게 둘러보다가 화가 나서 숨을 씩씩거렸다. 이게 다 하이신스 황제 때문이었다. 그자가 아이니를 이런 별궁으로 보내니까, 아이니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게 분명했다.

16551107462703.jpg‘빨리 하이신스 그자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우선 공작은 헤움 황자를 불렀다. 어렵진 않았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아이니의 방에 쪽지를 놓아두자, 헤움 황자가 알아서 그를 찾아왔기에. 다가 공작은 초조하게 파이프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다가, 헤움 황자가 나타나자마자 지시했다

16551107462703.jpg“전하께선 이미 아이니가 사라진 걸 아시겠지요. 아이니를 찾아 주십시오, 전하. 황제보다 먼저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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