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여기에서 나가세요2021.08.29.
말을 하던 타시르가 갑자기 “아.” 하고 탄식하더니 조심스럽게 라나문에게 물었다.
“이미 이 정도는 처리하셨을까요?”
라나문은 입을 꾹 다물고서 이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받는 족족 다 태워버렸으니 처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이야 연회장에 좀비가 등장하고 궁전 호수에서 괴물이 나오는 둥 온갖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전에는 평화롭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대적자 운운하는 편지는 장난으로만 보였다.
“이게 장난 편지일 것 같진 않나? 그렇다면 조사까지 할 가치도 없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대적자란 존재를 신경 쓰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라나문 님. 이런 거로 감히 라나문 님께 장난이라…… 글쎄요.”
장난 편지를 쓴다면 굳이 알려지지도 않은 대적자를 들먹였겠냐고 말하는 타시르는, 평소보다 아주 약간 더 심각해 보였다.
“그렇군.”
“장난이라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혼란을 조성할 수 있는 내용이니 찾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라나문 님.”
말을 마친 타시르는 라나문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가 더 할 말이 있으려나 싶어서. 라나문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차라도 가져오라 할 걸 그랬네요.”
시간이 좀 더 길어질 듯하자 타시르는 농담조로 말하면서 느긋하게 다리를 뻗었다. 라나문이 이젤에 놓인 초상화를 계속 보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란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라나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움을 받았군.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전 마지막으로 답례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는데요.”
“손꼽히게 부유한 사람에게 물질로 갚는 건 의미 없는 일이겠지. 답례는 네가 원할 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거로 하겠다.”
도움을 받고서도 당당한 라나문의 제안에 타시르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려던 질문, 계속하시지요.”
질문을 하겠다면서, 라나문은 문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타시르는 곁에 서서 그가 문 앞에 설 때까지 함께 걸어갔다. 질문을 안 하려는 건가, 싶어진 타시르는 직접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기 직전. 라나문은 손을 올려 막고서 마침내 오래 끌던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가 진짜 대적자라면.”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건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고, 저는 라나문 님께 조언을 해드릴 위치가 아니니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데요.”
“……같은 후궁 입장으로 조언을 해준다면.”
라나문의 입에서 나온 ‘같은 후궁’이라는 말에 타시르의 눈가가 가늘게 휘었다.
“듣기 좋은 말이네요. 음…….”
문고리를 손에서 뗀 타시르는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나문은 차분하게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이 질문은 정말로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타인의 의견, 정확히는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들어보고 싶어서 한 것일 뿐. 지루할 정도로 시간을 끈 후에야 타시르는 팔짱을 풀고 문을 열어주며 웃었다.
“그럼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셔야지요. 여기서 나가세요.”
* * * 라틸이 평소처럼 업무를 보는 도중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서 각 부의 장관이 보내온 보고서를 하나하나 살피고 있으려니, 시종이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폐하. 지시하신 일을 마쳤습니다.”
라틸이 쳐다보자 시종이 입 모양으로 작게 ‘도미스요’라고 덧붙였다.
‘아, 도미스! 찾아보라고 했지.’
라틸은 팔을 내리고서 시종장과 서넛에게 나가보라 지시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라틸은 시종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시종이 곁으로 오자 라틸은 얼른 질문했다.
“어디에 있더냐? 도미스가 확실해?”
“사실 이름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인상착의가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꼭 같았고, 이름은 가명을 사용할 수도 있는 듯해 보고드립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수도 외곽에 있는 별꾀꼬리 여관에 머물고 있고, ‘아이도미스’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도미스. 도미스랑 이름도 비슷하네.”
가명이라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일단 그런 인상착의가 흔하진 않을 터. 라틸은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시종을 내보냈다. 이후 빠른 속도로 업무를 처리한 라틸은 여유 시간이 생기자, 이전처럼 ‘사디’로 변신하고서 궁전을 빠져나왔다.
“외곽에 꾀꼬리 뭔가 하는 여관으로 갑시다.”
라틸은 수도 안을 뺑뺑 도는 승합 마차를 잡은 다음 보고 받은 여관까지 수월하게 도착했다. 마부만큼 지리를 잘 아는 사람도 없기에 헤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라틸은 마차 삯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 여관의 커다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별 위에 올라탄 꾀꼬리가 춤을 추고 있는 커다란 간판이 붙은 여관은 칼라인과 비극적인 사랑을 나눈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기엔 참으로 방정맞은 분위기였다.
‘이 안에 도미스가…….’
칼라인과 처음 만날 때의 도미스, 그와 이별하던 때의 도미스, 어두운 거리를 도망치던 도미스…… 이 모든 광경들이 떠오른다. 라틸은 초조하게 여관 앞을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저 방정맞은 꾀꼬리 간판을 보자 이제야 조금 후회가 되었다. 젠장. 그냥 위치나 확인했으면 됐지, 내가 여기엔 왜 온 거야? 라틸은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잔돌들을 발끝으로 툭 툭 두드리며 한탄했다. 얼결에 오긴 했는데. 자신이 도미스를 만나서 뭘 어쩌겠단 건지, 새삼 막막했다. ‘내가 당신의 기억을 꿈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거? 절대 안 된다. ‘내 후궁이 당신과 예전에 사귀던 사이였다’고 말하는 거? 다짜고짜 나타나서 시비 거는 것도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아니다. 말하는 게 좋은가? 도미스는 죽었다 살아났잖아. 어쩌면 칼라인이 후궁으로 들어간 걸 모를지도 몰라. 좀…… 정보에 둔하다면.’
그런데 라틸이 아직 뭘 어떻게 할지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맑은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나서 한껏 떠들어대는 목소리는 너무 시끄럽지도 않으면서 근처에 있는 사람들까지 덩달아 즐거워질 정도였다. 라틸은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시끄러워서 쳐다보았다기보다는 그저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방향에 있는 한 사람을 보는 순간. 라틸은 입꼬리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라틸은 입을 꽉 다물고서 소란의 가운데 있는 사람을 보았다.
‘도미스…….’
라틸이 찾아 나온 상대인 도미스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붉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실타래처럼 찰랑거리면, 그녀는 앞이 머리카락 때문에 가려지는 게 귀찮은지 연신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있었다. 햇볕을 받아 붉은 머리카락은 더욱 짙게 보였는데, 색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굉장히 화려하게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저절로 쳐다볼 정도로. 활짝 웃을 때 크게 벌어지는 입술은 시원시원했고, 귀엽게 접히는 눈매는 강렬한 머리카락 색에서 오는 분위기를 조금 완화해 주었다. 도미스의 주위에는 길쭉길쭉한 청년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 같이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버석한 미남미녀들이어서 더욱 눈길을 사로잡았다.
‘흑사신단 용병들인가.’
라틸은 저런 분위기의 용병들을 알았다. 후궁들을 맞이하는 서약식 때 본 흑사신단 용병들이 꼭 저랬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활짝 웃으면서 떠들어대지 않았단 정도.
“…….”
라틸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표정조차 제대로 짓지 않던 흑사신단의 용병들이 도미스 옆에서 저렇게 무장해제되어 웃는 걸 보자 싱숭생숭했다. 도미스는 칼라인의 ‘진짜’ 연인이니까 저렇게들 좋아하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처럼 눈치를 보아야 할 상대가 아니라, 칼라인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연인이라는 걸 저들도 아니까. 라틸은 저도 모르게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들이 여관 안으로 우르르 들어가는 걸 보고서 쓸쓸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승합 마차를 잡으려 할 때였다.
“저기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라틸을 불렀다. 도미스의 목소리. 대번에 알아들은 라틸은 흠칫했다. 자신을 부른 것 같긴 한데. 도미스가 자신을 부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저기요.”
그러는 사이에도 다시 한번 더 도미스가 ‘저기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부른 게 아니라면 그냥 도로 돌아가면 되는 거니까.
‘진짜 날 부른 거네?’
그러나 예상외로 도미스는 정말로 라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미스의 뒤에 선 용병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인 걸로 보아, 그들이 라틸을 가리키면서 무어라 말한 게 아닐 텐데도. 라틸은 반사적으로 얼굴에 쓴 가면을 만지작거리다가, 도미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내리고 물었다.
“나요? 왜요?”
자신이 ‘라틸’일 때 온 거라면 용병단 중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알려준 것이겠지만. ‘사디’일 때 온 것이다 보니 도미스가 다가온 이유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사디’와 도미스는 아무 접점도 없으니까. 어쨌든 자신을 부른 게 맞는 것 같기에 침착하게 대답하자, 도미스는 바로 앞까지 얼어오더니 활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라틸을 가리켰다.
“사디 양이지요?”
도미스의 질문에 라틸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얘가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이상한데. 내 가명은 또 어떻게 안 거야?’
“날 알아요?”
그게 떨떠름했던 라틸이 묻자, 도미스는 빙그레 웃더니 뒷짐을 지고서 라틸을 위아래로 쳐다보고서 웃었다.
“칼라인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라트라실 황제의 특사이시라고.”
칼라인이 내 이야기를 했다고? 심지어 특사란 이야기를 했어? 라틸은 그 말이 의외라 여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칼라인은 사디가 라틸인 걸 알았다. 그런데 굳이 도미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나?
‘카리센에 나와 칼라인이 간 일을 듣고서 도미스가 오해라도 했나?’
어쨌든 신중하게 굴기 위해 라틸은 모른 척 “그래요?” 하고 되물었다. 상대가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온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저쪽은 자신이 연적이라는 걸 모르는데 다짜고짜 시비를 걸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요?”
“멀리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기에. 혹시 할 말이 있나 싶어서 와봤어요.”
“아.”
도미스의 또랑또랑한 말투에 라틸은 자신이 너무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단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렇게 온 거구나. 칼라인에게 이름과 얼굴을 들어서 아는데, 와서는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아는 사람이랑 좀 닮아서.”
너무 남을 빤히 쳐다본 건 자신의 실수이기에 라틸은 순순히 사과하고서 돌아섰다. 그러나 떠나려는 라틸을 도미스가 한 번 더 붙잡았다.
“그쪽, 혹시 칼라인에게 마음이 있나요?”
라틸은 눈을 깜빡이면서 정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도미스가 라틸이 본 칼라인의 기억 속 모습과 꼭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서 라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