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생일을 약속2021.08.25.
흐트러지게 만들어 달라니. 라틸은 라나문의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순간 헷갈렸다.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말이었다. 아니, 사실 라틸이 저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건 딱 하나였다.
‘잠자리에서 흐트러지고 싶단 뜻인가?’
해석이 다양할 수도 있겠지만 라틸의 머리는 저 말을 딱 하나로만 해석했다. 라틸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라나문의 냉담한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 조금이나마 타시르 같은 구석이 있다면 라틸은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라나문의 표정은 이 와중에도 건조하고 담백하기 짝이 없어서, 라틸은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방금 그 말뜻이 조금 애매하게 들리는데.”
라틸은 괜히 탁상 위에 놓인 냅킨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라나문은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으나 시선은 라틸의 손가락에 닿아 있었다.
“어떻게 들리십니까?”
라틸은 냅킨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조금씩 뜯어냈다. 잠자리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려. 라틸은 입안에서 말을 뭉갰다. 괜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냅킨을 계속 뜯기만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돌연 라나문이 말없이 제일 윗옷 단추를 풀더니 손부채질을 했다.
“조금 덥군요.”
라틸은 냅킨만 쳐다보다가 그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마자 보인 건 풀어진 단추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쇄골이었다. 라틸은 다시 시선을 내리면서 물었다.
“단추는 왜 풀어?”
“좀 더워서요.”
돌아온 대답은 덤덤했으나 라틸의 마음은 덤덤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로 접어들 생각을 하고 온 건 아닌데, 분위기가 미묘하고 말랑해지는 게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주위가 너무 고요하게 여겨졌고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오감이 다 작동하는 것 같았다. 그저 웃으면서 넘어가기엔 라나문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억지로 양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왜 이렇게 입술 끝이 무겁게 여겨지는지. 그래도 힘을 주어 미소 비슷한 걸 만들어 내고 앞을 보니, 라나문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서 본인은 태연한 표정이라 얄미웠다. 만약 라나문의 귓가가 붉지 않았더라면 좀 빈정이 상했을 정도로. 눈이 마주치자 그의 회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서 섬세하게 세공한 보석처럼 보였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라틸은 자신의 볼이 위로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건 의지와 상관이 없는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민망하지 않은 건 아닌지라, 라틸은 괜히 부채를 펼쳐 얼굴의 반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생일날이 되면 알겠구나.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지.”
다행히 목소리만큼은 라틸 역시도 평소처럼 낼 수 있었다. 라틸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라나문의 반응을 샅샅이 살폈다. 라나문은 역시나 평소와 같은 얼굴로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라틸은 벽 가운데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걸 보자 주체 없이 움직이던 입술 근육에 드디어 통제권이 돌아왔다. 라틸은 정색을 하고서 부채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그날을 기대하지.”
* * * 황제가 나가자마자 시종인 카르둔은 얼른 방 안에 들어와 라나문의 표정을 살폈다. 물론 라나문은 카르둔이 곁에 있을 때도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카르둔은 라나문의 유형제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붙어서 지내온 만큼 남들보다는 라나문의 표정을 읽는 데 월등했다. 카르둔은 오늘도 눈치 좋게 라나문이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란 걸 알아차렸다.
“폐하께서 도련님께 좋은 말씀을 해주셨군요!”
카르둔이 외치자, 라나문은 뒷짐을 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나문이 눈짓으로 상을 치우란 신호를 하자 카르둔은 얼른 밖으로 나가 하인들을 불러왔다. 하인들이 테이블을 깨끗하게 치우고 나가자 카르둔은 서둘러 문을 닫고서 라나문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얼른 라나문에게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서 발을 제자리에 두질 못했다.
“폐하께서 라나문 님께 칭찬을 해주셨나요? 아니면 이제부터 총애하실 것 같나요? 아니면…… 하여튼 뭔가 좋은 소식이 있는 거지요?”
라나문은 거만하게 뒷짐을 지었는데, 그 모습은 몹시도 위풍당당해 보여서 카르둔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고자약을 먹고 의기소침해 있거나 얼굴에 트러블이 잔뜩 올라와 의기소침해 있거나 인간 베개로 사용된 다음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어깨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을 보자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폐하께선 내 얼굴이 마음에 드시나 보더라.”
“도련님 얼굴은 누구나 마음에 들어 합니다.”
“생일 때까지 아무 일이 없어야 한다. 음식에 이상한 게 들어가서도, 피부에 이상이 생겨도 안 된다.”
생일? 생일을 두고서 두 분이 무언가 약속하신 건가? 카르둔은 심장이 콩콩 뛰었다. 입이 무거운 라나문은 더 이상의 구체적인 정보는 주지 않았지만, 카르둔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배로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도련님. 염려 마세요.”
“이 이야기가 다른 곳에 새어 나가는 것도 막아라.”
“예?”
소문은 왜 막으라 하시는 거지, 생각하면서도 카르둔은 순순히 대답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러면 됐다.”
라나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까 라틸이 보았던 벽시계를 살피다가 일어섰다.
“폐하께서 오늘 또 오시진 않을 테니 이제 그 상인에게 가보지.”
카르둔은 라나문이 편지를 쓰고 있던 책상을 쳐다보았다. 라틸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 편지지는 뒤집혀 있지만 카르둔은 그 안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알았다.
“정말로 타시르 님께 대적자 편지를 상담받으실 건지요?”
“게스타의 가문과 우리 가문은 사이가 나쁘지. 자칫하면 내 약점을 건네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칼라인 님은…….”
“이후 조사 결과는 괜찮긴 했는데. 그래도 클라인 황자 부적 사건 때 모습이 신경 쓰인다.”
라나문은 카르둔과 의논한 끝에, 그를 자꾸 대적자라고 부르는 편지가 온다고 타시르에게 상담하기로 했다. 상담용 편지를 쓰는 와중에 라틸이 갑자기 찾아와서 도중에 멈추었지만. 하지만 막상 한 번 편지가 끊어지고 나자, 라나문은 편지로 묻기보다는 그냥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낫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타시르 그자는 상인이라…… 혹시 돈을 많이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우리 정보를 팔아버릴까 봐 좀 걱정입니다.”
“타시르가 있는 상단은 신뢰도도 좋고, 타시르 본인도 입이 무겁지. 상인은 정보력이 생명이니,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정보와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 그 정도 되는 상인이라면 눈앞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견해를 가지고 행동할 거다.”
“그건 그렇지만…….”
카르둔은 그래도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으나 라나문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타시르는 다행히 방 안에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은밀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라나문의 요구대로 사람들을 다 물린 타시르는 편안한 의자를 권하면서 웃었다
“우리 도련님이 저와 단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시니 감동입니다.”
평소와 다른 바 없는 능글맞은 태도로 타시르는 라나문의 옆자리에 자신도 엉덩이를 붙이며 생글 웃었다.
“그래, 은밀하게 둘이서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제가 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을까요?”
“너는 머리가 좋지.”
“마음의 준비를 안 해도 될 것 같군요.”
“내가 대적자라 주장하는 편지가 계속 오고 있는데.”
“잠시만요. 역시 준비를 좀 하겠습니다.”
타시르가 한 손을 내밀면서 ‘그만’ 하는 수신호를 보내자 라나문은 심드렁하게 말하기를 멈추었다. 타시르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서 잠시 묘한 미소를 지은 채 허공을 쳐다보았다. 지금 라나문이 뱉은 ‘대적자’란 말이 자기가 아는 그 ‘대적자’와 같은 말인가 비교해보듯이.
“라나문 님이 말씀하시는 ‘대적자’가 혹시 500년에 한 번 뱀파이어 로드와 함께 나타난다는 그 대적자가 맞는지요?”
“바로 알아듣는군.”
“좀비가 나타나는 세상 아닙니까. 조사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조사해 봤지요.”
좀비가 나타났단 이야기를 들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타시르는 라틸의 명령으로 아낙차를 추적해 갔다가 좀비와 싸우기도 했고, 죽은 틀라 황자가 좀비를 부리는 모습도 보았다. 당연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시르는 한 손은 ‘그만’하는 수신호를 하고 한 손은 가슴에 올린 자세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3분 정도가 지나서야 타시르는 두 손을 얌전히 내리면서 물었다.
“그럼 우리 도련님이 대적자이신 겁니까?”
“아니.”
“하지만 그런 편지가 온다고…….”
“그러니까. 내가 보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왜 나한테 계속 그런 편지가 올까.”
“……편지를 볼 수 있겠습니까?”
타시르가 질문하자 라나문이 최근에 받은 편지를 내밀었다.
“앞서 받은 편지들은 모두 태워버렸다.”
“깔끔하시군요. 그게 뭔 줄 아시고.”
타시르는 혀를 차면서도 라나문이 건넨 편지 봉투를 열어보았다. 타시르가 편지를 읽는 동안 라나문은 커다란 이젤에 얹혀 있는 스케치북을 보았다. 스케치북에는 라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모습. 궁정 화가들의 그림처럼 정교하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들의 솜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솜씨로 그림 그림이었다. 타시르는 편지를 다 읽고서 내리다가, 라나문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자 웃으면서 물었다.
“라나문 님께도 하나 그려 드릴까요?”
“난 폐하를 언제든 직접 뵐 수 있으니 괜찮다. 초상화로 상상하지 않아도.”
“하하, 제가 그려 드린다는 건 라나문 님 초상화인데요.”
“내 초상화라면 전문적인 화가에게 맡기겠다. 너같이 어설픈 애송이가 아니라.”
“그 애송이한테 중요한 일을 상담하러 오셨으면서.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
타시르가 섭섭하단 목소리로 편지를 내밀자, 라나문은 봉투를 받아 들고서 잠시 망설이다가 차갑게 말했다.
“비전문가 중에서는 네가 제일 잘 그리는 것 같다.”
“말을 바꾸시는 건가요? 하지만 그 정도론 상처가 안 풀어집니다.”
“넌 가장 뛰어난 화가는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상인이지.”
타시르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저 자존심 강한 도련님이 저렇게 노력하는 걸 보아하니, 아쉬워서 온 게 맞긴 하구나, 싶어서.
“편지는 다 읽었습니다. 장난 같진 않군요. 내용이 제법 그럴듯합니다.”
“그런가.”
“제가 조사해 보니, 대적자 후보들을 몇 년 전에 신전에서 불러들인 적이 있다던데. 라나문 님도 그때 그곳에 가셨습니까?”
“그래. 얼마 안 있어서 나왔지만.”
“그러면 그때 신전에 불려갔던 사람들 모두가 이 편지를 받고 있을까요?”
라나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다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아마 말이 나왔겠죠. 제 생각에 ‘전부’ 받은 건 아닐 것 같긴 합니다만…… 우선은 이것부터 조사해 보죠.”
“그거면 되나?”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숫자가 많아질수록 라나문 님이 대적자일 확률이 줄어드는 거니까요. 그리고 하나 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도 확인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