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2021.08.22.
밤새 성벽을 향해 이상한 빛덩이를 쏘아내던 사람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도 한동안 계속해 공격하다가 사라졌다. 틀라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때가 지난 시각으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여우 가면이 자신을 기절시켰던 걸 떠올리고서 분노했다.
“네 이놈!”
틀라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익숙한 인테리어를 발견하고 잠시 주춤했다. 다른 곳으로 대피한 줄 알았는데. 이곳은 지하성에 있는 그의 방 안이었다. 틀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아낙차가 안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서 황급히 가까이 다가왔다.
“틀라!”
“어머니.”
틀라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슬리퍼를 신고 일어섰다.
“어떻게 된 건가요? 여우 가면이 저를 기절시켰던 것까지 기억납니다. 누군가 우리를 공격했던 거 같은데. 그자는요?”
“성벽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갔다더라. 거기로 뭐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올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피해가 없나요?”
“구멍이 나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한 건지 그 자리가 금세 메꾸어졌어. 그런 쪽으로 능력 있는 뱀파이어가 있는 모양이더라.”
아낙차는 틀라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하염없이 쓸어주었다.
“너는 중요한 사람이니 우선 여우 가면의 은신처에 대피시켰다가, 안정된 후에 다시 옮겼단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상황도 두려웠지만, 틀라가 또다시 다칠까 봐 몹시 걱정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틀라는 어머니의 걱정을 들으면서 자존심이 더욱 상했다. 어머니도 맨정신으로 그 모든 일을 감당했는데, 자신은 혼자 기절해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조차 몰랐다니. 라틸에게 패한 일과 자신이 로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겹쳐지면서 부쩍 낮아진 그의 자신감이 다시 한번 더 한없이 얇은 유리문처럼 파르르 떨렸다.
“여우 가면이 빨리 새로운 거처를 알아봐야 할 텐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모양인가 봐.”
그래도 다행이라면서 아낙차는 재차 틀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틀라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위로해주어도 틀라의 표정은 굳은 채 풀리지 않았다. 그 기색을 눈치챈 아낙차는 아들을 보듬어주길 멈추고서 물었다.
“왜 그러니?”
“여우 가면이 제 편이 아닌데, 여우 가면의 적까지 제 편이 아니라니. 다른 보금자리로 간다 한들 거기가 우리에게 안전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낙차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 깨어났단 것조차 몰랐으나, 지금은 모든 진실을 아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틀라가 자신이 가짜 로드일 수도 있단 생각을 하며 두려워한단 점까지도. 그 때문에 아낙차는 틀라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그가 하는 말을 바로 이해하고서 얼른 아들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네가 가짜라도 상관없어. 가짜를 만들었다면 그 이유도 있겠지. 진짜가 너무 약하거나, 진짜를 못 찾았거나. 아쉬운 건 그들이니 네가 두려워할 필요 없다. 너는 충분히 강해. 차분하게 굴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어.”
아낙차가 건네주는 위로에 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신중하게 굴겠습니다.”
“그래. 나도 널 도울 방법을 찾아보마.”
“어머니는 편히 계세요. 저 때문에 고생하셨으니, 제가 어머니를 지켜야지요.”
걱정으로 가득한 틀라의 말에 아낙차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아들의 차가운 손을 꼭 쥐고서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귀한 황자로 태어나 누구보다 귀하게 자란 자식이 이렇게 온갖 고생을 하고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곧 틀라의 생일이지 않던가.
“라틸 그것은 화려한 생일 연회를 열겠지. 파티도 크게 열고…… 모두가 생일을 축하할 거야. 그날이 네 생일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 말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생일이 대수입니까.”
그러나 틀라는 지금은 라틸보다는 여우 가면을 향한 원한이 더 컸다. 라틸 쪽도 언젠가는 복수를 해야겠지만 당장 급한 건 여우 가면이었다.
“어쨌든 이 일로 확실해졌습니다. 여우 가면은 기르골보다 약해요.”
“그걸 이용할 셈이니?”
“네. 어쩌면 그자는 진짜 로드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니, 진짜 로드가 누구인지 알려준다면 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틀라는 여우 가면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라나문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분명 여우 가면은 라나문을 로드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초상화를 방 안에 둔 거겠지.
“거래가 된다면 좋겠지만…… 괜찮을까? 말이 통할 뱀파이어가 아닌 거 같다면서?”
“네. 그게 문제지요.”
* * * 업무를 보는 내내 라틸은 ‘도미스를 찾으란 명령을 취소할까?’와 ‘아니야, 그래도 알아보자.’ 사이에서 망설였다. ‘이 사실을 알면 칼라인이 분명 안 좋아할 텐데…….’ 싶다가도 ‘칼라인은 내 후궁으로 들어왔잖아. 자기가 먼저 조심했어야지.’ 같은 반발심이 치솟았다. 그래도 라틸은 저녁때까지 일은 꾸역꾸역 다 하다가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자 일부러 라나문을 찾아갔다. 혼자서 식사해봤자 또다시 같은 고민만 반복될 거 같으니, 일부러 함께 있을 만한 다른 후궁을 찾아간 것이었다. 어차피 라나문도 그날이 생일이니 선물에 관련해 질문할 것도 있었고.
“폐하.”
라나문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지, 책상 위에 뒤로 덮어둔 편지지가 보였다.
“함께 식사할까 하는데.”
라나문 같은 사람이 과연 누구에게 편지를 쓰나, 궁금해졌지만 라틸은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사교계에 들어가면 일단 편지를 쓸 일이 아주 많아지니까. 라나문처럼 사교계와 거리를 둔 사람도 이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도 마침 식사하려던 참입니다.”
“잘됐네. 같이 식사하지.”
라틸이 아직 닫지 않은 문 너머로 눈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더니 1분도 지나지 않아 미리 준비해 둔 왜건을 끌고 줄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오셨어도 차리게 시킬 수 있는데요.”
“네가 먹는 음식에 또 뭐가 들어있을 줄 알고. 그거 있잖아. 고-.”
“드시지요.”
그때 일은 상상도 하기 싫은지 라나문은 서둘러 왜건을 살피며 말했다. 차가운 척하는, 아니, 실제로도 얼음 기운이 쌩쌩 날리는 남자가 보여주는 속 보이는 태도에 라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볼이 위로 올라갔다. 하인이 탁자 위에 음식을 완벽하게 세팅해 놓고서 나가자, 라나문과 라틸도 마주 보고 자리를 잡았다. 라나문의 시종인 카르둔도 문을 닫고 나가자 라틸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잘 차려진 음식을 둘러보았다.
“네가 좋아한단 거로 차리게 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말을 마친 라틸은 라나문의 얼굴을 힐긋 살폈다. 라나문은 여전히 변화 없는 냉랭한 얼굴이어서, 라틸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닌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그러다가 라나문도 라틸을 쳐다보는 바람에 라틸은 얼른 시선을 피하며 스푼을 쥐었다.
“먹자.”
식사를 하는 내내 두 사람의 대화는 그런 식이었다. 라틸은 하얀 빵을 찢다가 라나문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고, 라나문은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라나문이 수프를 마시다가 라틸에게 안부를 물어보면 라틸도 그럭저럭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 공간에서 지내는 사람이라기에는 약간 어색하고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라틸은 이런 분위기 덕분에 오히려 칼라인과 도미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난 네가 어색해서 좋다, 라나문.”
“돌려서 질책하시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널 보면 다른 생각을 못 하겠거든.”
“그런 사람은 하나둘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그런 사람 중 일부가 되시려는 겁니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라나문의 말에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라나문은 잠시 라틸을 희한하단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곧 희미하게 따라 웃고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라틸은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 되어서야 미리 준비해 온 질문을 던졌다.
“곧 생일인데. 아직도 뭘 가지고 싶은지 생각 못 했어, 라나문?”
“폐하께서는 정하셨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는데.”
“감히 후궁의 몸으로 폐하보다 먼저 대답하겠습니까.”
“황명이다. 괜찮으니 먼저 대답해.”
라틸이 권력을 들고서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자, 라나문의 표정에 또다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조차도 아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었으나 라틸은 문득 이것도 라나문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반응이 거의 없어서 상대하고 있자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가 반응할 때마다 미로에서 길을 찾아낸 기분도 들었다. 그때였다. 라틸의 권력에 눌려 잠시 말없이 있던 라나문이 시선을 반짝 들더니 라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폐하. 제가 선물로 어떤 소원을 말하든 들어주시겠습니까?”
라틸은 거기에 진지하게 대답을 하려다가 ‘어라’ 싶은 기분에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방금 그 말. 낯익은 느낌이 나서. 왜 낯익은 느낌이 나지? 게스타가 저런 말을 했던가? ……아니다. 게스타는 같이 여행 가자고 했으니. 그런데 왜 낯익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으려니 답이 떠올랐다.
‘연애의 시작!’
라나문이 인덱스까지 붙여가면서 열심히 보던 그 책! 그 책에 그런 비슷한 조언이 있었던 거 같다.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라틸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내렸다. 아니면 큰소리로 웃어버릴 거 같아서. 라틸은 집중력을 최대로 발휘해서 떨리려는 어깨도 막았다. 하지만 미세한 떨림까지는 막지 못했나 보다. 라틸의 반응을 본 라나문의 목소리가 놀랍게도 한층 더 가라앉았다.
“왜 비웃으시는 겁니까.”
라틸은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고서 고개를 들었다. 라나문이 차가운 표정에 붉어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얼음처럼 시리지만 저렇게 피부가 붉어진 걸 보니 곧 녹아내릴 게 틀림없었다. 좀 웃었다고 저렇게 바로 예민하게 묻는 것도, 본인이 너무 연애 서적에 나온 걸 그대로 실천한 게 부끄러워서 저러는 것일 터. 라틸은 입술을 막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서 고개를 저었다.
“비웃기는. 귀여워서 그러지.”
“비웃으시는 거로 보입니다.”
“그럴 리가.”
“그러면 그렇게 웃지 마십시오.”
라틸은 알겠다고 라나문을 달래 주려다가, 그의 붉은 기운이 어느새 귀까지 가 있는 걸 보자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라나문을 보고 있으려니 서넛이 왜 매일 자기를 놀려대는지 그 기분이 공감되었다. 저러면 놀리고 싶어지지.
“싫은데?”
“!”
라틸 본인이 당했다면 당장 베개를 들어올려 상대의 등짝을 퍽퍽 내려칠 만큼 얄미운 말이었으나, 라나문은 놀랍게도 이번에도 잠시 표정을 까딱할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보자 라틸은 라나문이 화내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정말로. 저렇게 냉정하고 침착한 남자가 평소의 포커페이스를 깨면 어떤 모습일까?
“내 생일 선물로 가지고 싶은 게 생겼다, 라나문.”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라틸은 턱을 괴고서 아까와 다르게 웃었다.
“무엇입니까?”
“네가 흐트러진 걸 보고 싶어.”
라나문은 ‘진심이냐’는 눈으로 라틸을 쳐다보았다. 라틸의 요구가 너무나 황당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라틸이 웃고만 있을 뿐 요구를 바꾸지 않자, 라나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잠시. 라나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저도 폐하께 받고 싶은 선물을 정했습니다.”
“말해봐. 내 요구를 무르란 선물 말고는 다 주지.”
“폐하께서 제가 흐트러지게 만들어 주십시오.”